그곳에 가면

무등산 보리밥집

아기 달맞이 2014. 2. 4. 07:46

광주발! 버스로 떠나는 콘짱의 한국기행. 일본인 유학생 콘짱이 광주 광천터미널을 시점으로 전국 곳곳을 돈다. 이번 달은 첫 등장을 기념해 콘짱의 '제2의 고향'이자 36개 승차 홈에 없는 광주를 걸어본다. 매달 다른 승차 홈에서 낯설고 설레는 여행을 할 것이다.





쟁반에는 어마어마한 종류의 반찬이 얹혀 있다. 수를 세보니 접시가 23개나 된다.

나와 광주의 만남은 2007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대학교 서머스쿨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를 찾아간 게 처음이었다. 당시 나는 와세다대학교 학부 2학년.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한들 필수과목이라 어쩔 수 없이 수강하는 어린 학생에게 와 닿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있었겠는가. 나는 광주는 물론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새 발의 피 정도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웃나라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으로 단기유학을 결정했다. 인천공항에서 광주행 리무진버스를 탄 지 4시간 반. 광주 광천터미널에 도착해서야 나는 광주가 서울에 있는 도시가 아님을 깨달았다. 광주와 나의 인연은 이런 착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국인 친구를 데려가면 꼭 할머니집이 생각난다며 신나고, 외국인 친구를 데려가면 이국적인 분위기에 환성을 지른다.

현재 147만의 인구를 가진 광주는 광산구·동구·서구·남구·북구의 다섯 개 구로 구성돼 있다. '광주'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풍부한 식문화? 임방울의 < 쑥대머리 > ? 고싸움놀이? 5·18? 광주는 예향(藝鄕)이라고도, 식향(食鄕)이라고도 회자된다. 그것이 나를 오랫동안 광주에 머물게 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느덧 광주살이 4년째가 된다. 친구들이 멀리 광주를 찾아오면 꼭 데려가는 곳이 있다. 무등산 기슭에 위치하는 보리밥집이다.





십인십색(十人十色) '나만의 한 그릇'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게 보리밥의 재미다.





무등산 보리밥집 메뉴.

나는 기운이 떨어지면 항상 무등산을 찾아간다. 시간이 없으면 등산을 못하더라도 무등산이 보이는 데까지 가서 한동안 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상대방의 목소리 또한 내 목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쁘고 단조로운 일상 속에선 나를 뒤돌아보는 기회조차 놓치기 일쑤다. 그러니까 나는 일부러 무등산을 향한다. 신기하게도 어떨 때는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씩씩한 아버지처럼, 또 어떨 때는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고 부드럽게 감싸안아주는 어머니처럼 보인다. 내가 외로움을 타지 않고 유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무등산 덕분일지도 모른다. 또 김치·한정식·오리탕·송정떡갈비·무등산보리밥을 가리켜 광주오미(光州五味)라 한다. '광주의 맛'을 즐기고 무등산의 정기까지 받을 수 있다니 일석이조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님이 오면 인사 대신 보리밥집을 찾아간다.

법원 길을 쭉 위로 15분가량 올라가면 그 보리밥집이 진좌(鎭座)하고 있다. 마치 겨울 하늘과 같은 파란색 지붕이 특징이다. 대문이 작아 차로 가면 한번쯤 슝 지나가버릴 수도 있지만 그 존재감은 각별하다. 한국인 친구를 데려가면 꼭 할머니집이 생각난다며 신나고, 외국인 친구를 데려가면 이국적인 분위기에 환성을 지른다. 건물이 바로 40년이나 된 민가인 셈이다. 주위에도 보리밥집이 많지만 대대적으로 보리밥을 판다고 주장하지 않는 점에 주인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3분도 경과하기 전에 할머니가 허리를 굽히면서 크나큰 쟁반을 들고 들어온다. 쟁반에는 어마어마한 종류의 반찬이 얹혀 있다. 수를 세보니 접시가 23개나 된다. 갑자기 배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보리밥과 함께 된장국, 쌈 야채, 참기름이 식탁에 올랐다. 준비 완료. 4인용 식탁이 행복으로 가득 찼다. 잘 먹겠습니다!





무등산 서석대.

십인십색(十人十色) '나만의 한 그릇'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게 보리밥의 재미다. 이것 넣을까 저것 넣을까 하면서 나는 콩나물, 시금치나물, 부추무침, 상추무침, 고사리, 무생채, 버섯볶음을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비벼 먹었다. 탱글탱글한 보리밥에 다양한 야채들이 어울려 한 입 한 입 씹을 때마다 다른 식감을 연출해준다. 남녀노소 고추장에 물든 입언저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도 마음이 가는대로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먹었다. 마지막에 숭늉 한 모금하고 식사를 마쳤다.

밖에 나가니 무등산은 곧 눈앞이다. 무등산은 2012년 12월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무등산에는 김덕령(金德齡) 장군 전설을 비롯한 옛이야기가 숨어 있다. 또 입석대를 비롯한 자연의 신비가 누워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철이 있어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무등산은 언제든 넓은 가슴으로 우리를 환영해준다. 오늘도 나는 그에게 힘을 얻고 다시 바쁘고 단조로운 일상으로 돌아간다.

곤도유리 |

일본 아오모리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제일문학부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 적벽가 > 예능보유자 송순섭과 판소리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박사과정 중이다. 전공은 민속학. 주로 판소리, 농악 등 공연예술을 연구하고 있다.

글 사진 곤도 유리 / webmaster@outdoor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