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에 피는 꽃에는 강한 생명력과 에너지가 숨어 있다. 그런 꽃들로 만든 꽃차는 봄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물에 닿으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특별한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무릇 꽃차는 "입으로 즐기기 전에 눈으로 향으로 즐겨라"라고 조언하는 꽃차연구가 송희자 선생의 향긋한 꽃차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꽃차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꽃차'라고 하면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한 캐모마일, 재스민, 마리골드와 같은 차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우리 정서에 맞는 은은한 향의 꽃차를 대중적으로 즐기게 된 중심에는 꽃차연구가 송희자 선생이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꽃을 실내에 들여 즐기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꽃은 지고 난 뒤에도 열매를 맺거나 씨앗을 뿌리기 때문에 살아 있는 꽃을 꺾어 꽃꽂이하는 것은 생명을 소멸한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죠. 꽃을 따 요리를 하는 일도 극히 드물었고요. 하지만 식용이 아닌 약용으로 쓸 경우에는 꽃으로 차를 만들거나 꿀에 절여 먹었다고 해요. 이렇듯 치료의 목적으로 꽃차를 섭취했기에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구증구포(九蒸九曝)로, 단어 그대로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볕에 말려 사용했어요. 이런 구증구포는 예부터 한약재를 만들 때 약재의 성미를 바꾸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인데, 제조 방식만으로도 꽃차가 약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죠. 아홉 번 찌고 말릴 만큼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도 알 수 있고요. 또 생화를 한지로 싸서 약간의 미열만 남은 재에 넣었다가 꺼내기를 반복해 꽃을 말렸지요. 이렇게 말린 꽃은 색도 까매지고 형태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돼요. 이 때문에 차보다는 약재로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어요. 사대부 집안에서는 진달래 같은 꽃을 꿀에 절여 먹기도 했고요. 진달래꽃의 부드러운 부분이 꿀에 녹아들기 시작하면 물에 타 먹거나 그냥 먹었는데 특히 천식 치유에 효과적이었다고 해요.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꽃을 약으로써 활용했지만, 요즘에는 꽃차를 통해 보는 즐거움과 향은 물론 힐링 등 다양한 치료 효과를 얻는 분들이 많답니다."
송희자 선생이 꽃차를 연구하게 된 것은 1993년부터다. 서울 토박이였던 그녀가 시어머니 간병을 위해 남편과 함께 전남 담양으로 내려가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됐던 것.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아 산책길에 만난 찔레꽃의 향과 자태에 반해 꽃차 공부를 시작했다. 전문잡지와 야생화 서적, 한방사전을 뒤적여가며 집 주변의 꽃을 말리고 꿀에 재우고 덖고 볶으면서 꽃의 향과 고운 빛깔을 잡아둘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렇게 꽃을 연구한 지 20년, 현재 그녀가 만들 수 있는 꽃차의 종류는 160가지가 넘는다. 열매로 만든 차와 잎차까지 합하면 2백여 가지를 넘긴다.
"꽃차를 즐기는 것마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꽃차를 만들라고 하면 어려워하는 것이 당연해요. 하지만 어찌 보면 꽃은 사람과 같아요. 호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점점 관심이 가게 되듯 좋아하는 꽃이 있다면 그 꽃에게 관심을 가져보세요. 어떤 빛과 토양을 좋아하는지 어떤 온도에서 말려야 하는지 그 꽃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좋은 꽃차를 만드는 데 기본이에요."
그러나 모든 꽃이 차의 재료가 될 순 없다. 이른 봄에 피는 꽃에는 대체로 독성이 없으나 그 외의 많은 꽃에는 독성이 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꽃들로 함부로 차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동백, 수선화, 매화, 팬지, 진달래, 도화, 목련 등 쉽게 접할 수 있는 봄꽃을 차로 즐기는 편이 좋다.
"마당이나 베란다에 꽃이나 꽃나무를 키우고 있다면 그 꽃으로 차를 만들어보세요. 단 마셔도 무해한 꽃인지 확인하고, 꽃을 자를 때는 꼭 전지가위를 이용해 가급적 식물에게 큰 자극을 주지 않는 것이 좋아요. 또 식물의 생장이 활발하지 않은 새벽에 꽃을 따야 꽃의 상태도 훨씬 신선하고 식물도 아픔을 덜 느끼게 된답니다. 매화나 도화는 나무의 한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꽃을 채취하거나 나무의 모든 꽃을 따버리면 이듬해에 꽃을 피우지 못하니 꽃을 솎아준다는 느낌으로 채취하세요. 집에 꽃이 없다면 꽃시장에서 화분을 구입해서 꽃차를 만들 수도 있어요. 관상용 화분이라 살충제나 기타 화학성분을 뿌렸을 수도 있으니 첫 꽃순은 잘라버린 뒤 새로 나온 꽃으로 꽃차를 만들어보세요. 구입한 꽃을 마당에 심었다면 보름 정도 지난 후에 꽃을 채취해 차를 만들면 됩니다."
● 벚꽃차는 예부터 숙취나 식중독 해독제로 쓰였다. 약 10%의 농도로 소금물을 만든 후 꼭지가 붙은 벚꽃을 담가 숙성시킨다. 병에 보관하면서 매실초 등의 식초를 약간 넣으면 맛이 더욱 좋아진다. 한 잔에 1~2 송이를 넣고 끓는 물에 1분가량 우려내 마신다. ●● 백화차, 팬지, 동백꽃, 수선화 등 봄에 나는 대표 꽃차를 즐기는 라이프스타일러 권형민 실장. ●●● 대표적인 혼합차인 백화차. 백 가지 꽃을 각각 말린 다음 일정 비율로 혼합한 뒤 밀폐용기에서 숙성시킨 꽃차다.
꽃차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방법을 달리한다. 꽃잎이 얇은 매화, 산수유, 개나리와 같은 봄꽃은 자연 그대로 말린 후 차를 달이는 반면, 국화, 구절초, 무궁화 같은 가을꽃은 가볍게 쪄서 말린 후 솥에 넣어 은근한 불에 덖은 뒤 우려야 제 향과 빛깔이 난다. 말린 꽃을 그대로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방법 외에도 설탕이나 꿀에 재워 마시면 달콤하고 향긋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잎이 얇은 봄꽃은 말리지 않은 생꽃을 그대로 우려 마셔도 좋다. 꽃의 성질과 특징에 따라 가장 맛있는 맛을 낼 수 있는 가공법을 선택해 꽃차를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초보자들은 꽃차 만들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럴 땐 시판 꽃차를 구입해 마시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한번 꽃차를 맛본 사람들이 계속해서 꽃차를 찾는 이유는 저마다 품은 향기와 모양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꽃차의 향기와 아름다운 형태는 차를 마심으로써 기분이 전환되는 일종의 아로마테라피 효과를 얻는 동시에 복잡한 일상 속의 스트레스를 덜어낼 수 있다. 단, 꽃차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이로운 것은 아니다. 처음 접하는 차를 마셨을 때 머리가 아프거나 목이 칼칼하면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다.
꽃차는 뜨거운 물에 우려야 꽃이 피어나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물을 10분 이상 끓인 다음 식기 전에 바로 붓고 1~2분 정도 짧은 시간에 우려 마시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 우리면 오히려 역한 향이 날 수도 있다. 물을 부을 때에는 찻잔의 중심에서 원을 그리면서 따른다. 말린 꽃은 아주 가볍기 때문에 한곳으로만 물을 따르면 꽃이 제 모습대로 피어오르지 않으며 꽃잎의 가장자리가 따로 놀 수 있다.
꽃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코로 향을 음미하다보면 어느새 꽃잎이 하나둘씩 피기 시작하는데, 이때 혀끝으로 가져가 입으로 음미한다. 꽃차는 다섯 번 정도 물을 붓고 우려 마실 수 있는데, 처음 우린 차와 마지막에 우린 차까지 저마다 향과 맛이 모두 다른 것도 꽃차를 마시는 즐거운 묘미다. 꽃차의 다양한 맛을 즐기고 싶다면 여러 번 우려 다양한 맛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꽃차는 녹차와 달리 가벼우면서 부피가 작고 향기롭기 때문에 소량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많이 넣을수록 향이 짙어질 뿐만 아니라 쓴맛 등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강하게 먹는 것보다는 연하게 먹는 것이 맛도 향도 훨씬 좋다. 염장하거나 설탕·꿀 등으로 절인 차의 경우 짠맛이나 단맛이 강할 수 있으므로 첫 번째는 끓는 물을 부었다가 바로 따라버리고 두 번째부터 천천히 우려 마시면 된다.
● 다양한 종류의 유리 소재 다기. ●● 고기요리를 먹고 난 뒤에는 소화를 돕는 매화차를 마시고 나물이나 샐러드 등의 채소요리에는 지용성인 아카시아꽃차나 등나무꽃차를 함께 마시면 좋다. ●●● 푸딩병이나 잼병 등은 버리지 말고 모아두면 꽃차를 조금씩 덜어 선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입니다. 꽃차를 마셔보니 피고 지는 것만으로는 못내 아쉬워서 꽃을 일상으로 들여 즐겼던 우리네 여인들의 고운 정서가 느껴집니다.
전문적으로 많은 양을 만들긴 어려워도 집 안에서 작은 화분에 키우던 꽃 몇 송이를 말려보거나 다양한 꽃차를 구입해 이런저런 요리와 궁합을 맞춰보기도 합니다. 눈으로 꽃을 보고 코로 향을 맡고 입으로 맛을 느끼는 꽃차는 여러 번 우려 마신 후에도 남은 꽃을 버리기 여간 아까운 게 아니에요. 아름다운 자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겠죠. 젖은 꽃의 물기를 살짝 제거한 뒤 흰 떡이나 아이스크림 위에 얹어놓으니 사랑스러운 디저트가 되었네요.
얼음용기 칸칸이 색이 다른 꽃송이들을 넣은 후 물을 붓고 얼려두면 차가운 오미자차나 투명한 음료에 넣어 색다르게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세안할 때나 족욕할 때 얼음 몇 개를 녹여 사용하면 기분전환에도 도움이 되고요.
5~9송이만 있어도 두세 명이 즐기기에 충분하므로 한 번에 많은 양을 마련하기보다는 제철 꽃을 즐길 수 있도록 조금씩 만들거나 구입하는 것이 좋습니다. 혹 선물하거나 장기간 보관할 때는 작은 잼병이나 유리로 된 약병을 버리지 말고 깨끗이 소독해서 속이 보이는 커다란 유리볼이나 화기에 모아두었다가 사용하면 좋고요. 뚜껑들은 각각 재질이 다르기 때문에 식기소독용 세제를 이용해 세척하고 병들은 뜨거운 물로 소독해서 완전히 말린 뒤에 보관하는 것이 요령입니다. 꽃차 병으로 사용할 때는 뚜껑 위에 한지 등으로 커버를 만들어 씌우면 밀봉의 효과도 있는데다 꽃차의 이름이나 만든 날짜 등을 적어두기도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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