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 보유자인 황수로 화장(花匠)이 자신이 만든 삼색(흰색+분홍색+빨간색) 오얏꽃 화준(花樽) 옆에 섰다. 조선시대 연회에서는 왕이 앉은 어좌(御座)의 왼편에 붉은 오얏꽃 화준이, 오른편에 흰 오얏꽃 화준이 놓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60년대 초였다. 꽃을 연구하러 일본에 갔던 한 여성이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일본의 꽃꽂이 장인이 그에게 한 말이다, “‘이케바나(生け花·꽃꽃이)’ 같은 꽃 장식은 일본에만 있는 전통문화다.”
이 한마디가 여인의 행로를 돌려놓았다. “정말 그렇까. 한국에도 고유의 꽃 문화가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올 초 중요무형문화재 제124호로 신규 지정된 ‘궁중채화(宮中綵花)’ 기능보유자 황수로(본명 황을순·78) 장인의 얘기다.
황씨는 고종 때 궁궐 행사담당 주사로 일했던 외할아버지에게 가화(假花·가짜 꽃)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외할머니는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비단·모시 등을 염색해 꽃을 만드셨다.
“조선시대 궁에는 꽃을 다루는 화장(花匠)이 수십 명씩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꽃이라는 게 행사가 끝나면 폐기돼버리니 남아있는 유물이 없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중 꽃 문화의 맥이 완전히 끊어지게 됐죠.”
‘궁중채화’는 궁중 연희·의례 등에 사용된 비단 꽃을 말한다. 이씨 왕조의 상징이었던 오얏꽃(자두꽃) 화준(花樽·꽃병), 잔칫상에 올리는 상화(床花), 채색 널빤지에 꽃을 꽂았던 지당판(池塘板)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그런데 왜, 생화를 쓰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궁에는 꽃이 지천에 널려 있었지만, 절대 살아있는 꽃을 꺾어 실내를 꾸미지 않았어요. 생명을 존중했던 거죠. 대신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이용해 꽃을 만들었습니다. 비단뿐 아니라 모시나 종이, 떡과 얼음 등 다양한 재료가 꽃으로 재탄생했죠.”
왕실에 쓰이는 꽃인 만큼, 제작 과정은 까다로웠다. 질이 좋은 비단을 홍화·치자·쪽·쑥 등의 천연재료로 염색한다. 목단(목련), 월계꽃(장미) 등 각각의 꽃잎 모양을 오려낸 후, 인두로 한 장 한 장 눌러 각기 다른 모양새를 만든다. 꽃잎이 오랜 기간 빛깔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제한 밀납으로 코팅한다.
그리고 수십에서 수백 겹에 달하는 꽃잎들을 노루털이나 모시 가닥으로 한 땀 한 땀 엮으면 꽃 한 송이가 완성된다. “꽃술 부분은 진짜 꽃가루를 꿀에 개어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가짜 꽃인데도 신기하게 나비와 벌들이 몰려들죠.”
궁중채화 문화를 되살릴 수 있었던 건 연회 준비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해놓은 ‘조선왕실 의궤’ 덕분이었다. 황씨는 사학과(동아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의궤에 나타난 채화 관련 자료를 샅샅이 수집했다.
전문가가 없는 탓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6년 ‘궁중채화연구소’를 개설, 제자 10여 명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는 “뒤늦게나마 전통을 이어갈 기반이 생겨 무엇보다 다행”이라 했다. 요즘엔 4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가구박람회에 내놓은 ‘세모시 무궁화’를 만들고 있다.
‘수로’라는 예명은 신라 향가 ‘헌화가(獻花歌)’의 주인공 수로부인에서 따온 것이다.
“수로부인은 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꽃을 사랑한 여인’이잖아요. 궁중채화는 고된 작업이지만, 저 역시 아름다운 꽃과 함께하는 일이라 늘 행복합니다.”
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