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미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아기 달맞이 2013. 1. 27. 19:12

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수 많은 역사적 고통과 아픔을 겪어 왔습니다.

그러나

무색하게 흘러버린 세월과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 묻혀

오늘날 우리가 잊거나 혹은 모르는

일들과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중 저는 덕혜옹주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요즘 화제가 되고있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바로 권비영작가님의 덕혜옹주입니다.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rosepink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애끓는 비통함과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여러분과

지난날의 대한민국을 함께 되뇌이고 싶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귀찮더라도..이런 글은

한번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100년도 채 되지않은멀지않은 가까운 과거의 실존 인물을 다룬 것 입니다.

린나이에 찾아온 비극의 시작

1912년 5월 25일

조선 황족사이에서 고귀한 여자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는

고종이 60세가 되어 얻게된 늦둥이로서

고종의 귀여움을 많이 많은 고명딸입니다.

1918년 한참 어리광 피울 일곱살,

고종의 시종이던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까지 맺었지만

일본으로 억지로 업혀가게 됩니다.

덕혜옹주가 이은(덕혜옹주의 오빠)처럼 되지 않기위해 고종은 노력했지만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고종은 아들과 딸을 일본에게 뺏긴격입니다.

고종승하 이후

일본은

"조선의 황족들은 신식교육을 받아야된다"

라는 명분을 앞세워

1925년 3월 27일 경성역에 특별열차를 마련하고는

덕혜옹주를 강제로 데려갔습니다.

1925년 3월 28일 14살,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

낯선 땅, 일본에서의 생활

일본동료 :

"..얘야 학교 식수를 사용하지 않고

왜 매일 팔팔끓인 물을 보온병에 들고 다니니?"

덕혜옹주 :

"식수에 독이 있을까봐 마시지 않고있어.

난 오빠처럼 독을 먹다 죽기는 싫어.."

오빠 이은이 이방자여사와 정략결혼을 한것처럼

덕혜옹주도 대마주 번주집안의 일본인 백작 소 다케유키(종무지)와

강제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때 다정하던 시절 ,

소 다케유키(종무지)와 덕혜옹주

1933년 덕혜옹주는 한국이름으로 정혜, 일본이름으로 마사에라는

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고종, 순종, 어머니의 연이은 죽음들

조선에 대한 그리움,

원하지 않은 이국생활로 인한 신경 쇠약증세,

강제결혼에 대한 정신적 압박감

황족이었으나

비켜갈 수 없었던 망국의 고통을 겪은 그녀는

정신질환을 앓게 됩니다.

".. 가을학기가 시작됐으나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종일 누워있고 먹지도 않고

때로 밤에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가 뒷문으로 해서

오카사카 방면으로 걸어가고 하는 일도 있었다.

보통일이 아니구나 싶어 정신과 진료를 받게 했다.

의사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이라고 했다"

- 이방자 여사의 말 -

진단은 정신분열증

그렇게 마쓰자와병원에서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감금 당한 사이,

1950년

딸은 18세에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습니다.

1953년

남편 다케유키에 의해 강제 이혼까지 당합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모셔가기 위해 이승만 정부에 귀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은 왕실재산을 국유화하고 왕족들을 천대했다.

이씨 왕가의 자손들은 해방이 되고도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한번 박정희를 만나 덕혜옹주 이야기를 청했다.

박정희가 물었다.

"덕혜옹주가 대체 누구요?"

나는 대답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녀입니다."

-김을한의 말-

해방 후

1962년 1월 26일

조선기자인 김을한(김장한의 형)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37년만에 조선땅을 다시 밟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의 정신질환으로 생을 보낸후

창덕궁 낙선재로 귀환합니다.

그러나 수십년을 정신병원에 있었다는 그녀가

낙선재에 들어서자 눈물을 흘리며 순종순명효황후 윤비에게

황실 에법에 맞게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몇 년 전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생기발랄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일본말로 인사했으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내가 다시 한국말로

'먼 여행 오시느라 피곤하신가봐요?' 했으나

옹주는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

-이방자여사 말-

1972년 회갑상을 받은 덕혜옹주의 모습.

정신질환외에 중풍을 앓고 있던 그녀의 노년은

고달픈 과정으로 사진에 찍힌 얼굴의 눈도 초점을 잃고 있습니다.

측은한 눈빛의 유모(왼쪽)의 얼굴이 보입니다.

이후 1989년 4월 21일,

창덕국 낙선재에서 77세에 덕혜옹주는 타계합니다.

조선과 일본에게 외면받은

우리조선의 마지막 황녀

그녀에게도 세가지 죄목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나치게 영민한것이고

둘째는 품어서 괴로운 그리움을 품은것이고

셋째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딸로 태어난것이다.

일제에 의해 지배당했던 조선은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조선왕족들에 무심하였습니다.

반자본주의를 내세우는 북쪽도. .

자본주의를 내새운 대한민국도. .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왕정복고를 두려워하여 왕실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현대사에서조차 이들에 대해 구체적인 조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덕혜옹주,

이제서야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친왕(이은)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덕혜옹주의 말-

자료도움 :

http://mlkangho.egloos.com/10383653

http://blog.naver.com/asd2274/110080274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