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박연준 두 번째 시집 나와

아기 달맞이 2012. 11. 30. 07:04

알코올 중독 아버지, 날보고 '처제'라고…"

아버지, 그립고 고단한 이름

 

시인 박연준은 “시를 쓰는 게 팔자 같다”고 했다. 20대 중반에 “ ‘시가 오려는 걸 보니 가난해지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어서 하게 된 것도 아니고, 싫다고 안 할 수 없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떠나 보내기 …두 딸의 기록

‘섭섭하게,/그러나/아조 섭섭치는 말고/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서정주 ‘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죽음의 풍경이 꼭 슬픈 건 아니다. 조금 섭섭한 듯 아버지를 떠나 보낸 두 딸 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한 시집을 낸 시인과 죽음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영화로 찍은 감독이다.

잠든 호리병 - 박연준

입술을 깨물고 푸르르르 입방귀를 뀌었지

외로웠을까, 목이 긴 햇살 같은 날들

빨간 입술로 나는 순정했다네

당신과 내가 나란히 누워

곤히 잠든 시간들만 따로 모아

목이 긴 호리병에 담아놓고 싶다

따가운 볕 아래 펼쳐놓고

증발할 때까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

맨송맨송한 민낯으로 바라보고 싶다

나무 위에서 나무 아래,

흙 속으로 막 사라지는

딱정벌레를 보듯

따뜻하게 기우는 고개

붉고, 붉지만은 않은 증발

그것은 물과

물을 닮은 촉촉함이었다고

당신은 흘리는 듯 쏟아버릴까

손가락과 손가락이 아닌 것에서

모든 관계가 열렸다 사그라진다고

빨간 입술로

순정했을까

웃다가 그늘을 잃어버린 여자

호리병 속 맑은 잠


피할 수 없는 이별이 있다. 죽음이다. 혈육의 죽음, 특히 부모의 죽음은 영원한 헤어짐이다. 박연준(32)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는 숙명적 이별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사그라지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시인의 애끓는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그는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화법으로 주목받았다. “20대에는 두렵고 망설일 게 없었어요. 필터나 여과지가 없었죠. 그냥 짐승이었어요. 일찍 등단할 수 있었던 이유였겠죠. 그 때는 슬퍼서 시를 쓰고 시를 쓰면서 슬펐으니까.”

 그의 슬픔의 근원, 그의 시를 지배하는 화두는 아버지였다. 2007년에 출간된 그의 첫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창비)에서는 아픈 아버지를 향한 애증이 읽혔다. 이번 시집은 사랑하면서 미워했던 아버지와의 끈을 끊어내는 순간들의 감정이 박혀 있다.

 “이번 시집은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요. 완전히 증발되는 것에 대한 기록이죠.”

 이 마음은 오롯이 ‘잠든 호리병’이라는 시에 담겼다. ‘당신과 내가 나란히 누워/곤히 잠든 시간들만 따로 모아/목이 긴 호리병에 담아놓고 싶다/따가운 볕 아래 펼쳐놓고/증발할 때까지/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맨송맨송한 민낯으로 바라보고 싶다’는.

 박연준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슬픔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 중심에 아버지가 있었다. 첫 시집을 보고 그가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그와 아버지는 너무 끔찍하게 각별했다. 서로 할퀴며 깊은 생채기를 낸 것도 그래서였다.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와 얼굴을 모르는 사이가 됐어요. 아버지와 나는 24살 차이, 띠동갑인데 젊은 아버지가 혹 같은 딸을 키운 거죠. 서로 많이 집착했다고나 할까요.”

 시인을 깊은 슬픔으로 몰아 넣은 건 아버지의 병이었다. 밴드마스터이던 아버지는 그가 스무 살 때 쓰러져 건강이 악화됐다. 음악을 그만둔 뒤 아버지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술을 마시고 피폐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게 괴로웠다.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얼굴이 간지럽다//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반항도 안 하고/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처제, 하고 불렀다’(‘뱀이 된 아버지’ 중)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를 어떻게 할 수 없어 병원에 보내곤 했어요. 어느 날 탈진 상태에서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처제’라고 부르시더라고요. 너무 기가 막혔죠.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아팠어요.”

 25살에 독립한 뒤 아버지와 거리를 두려 애썼다. 하지만 혈육이 어디 그런가. 애틋하면서도 선뜻 손 내밀기 어려웠던 아버지와 딸의 모습은 이 시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다.

 ‘혼자 미소 짓다가 힘겨워지면/아버지는 내게 전화를 건다/내가 아빠 이제 난,/하고 끊을 채비를 하면/아버지는 그게 그래서 말이야,/망설이다 시작한다/전화를 끊고/내 귀는 여전히 흔들린다//끊어진 전화와 끊어진 마음 사이에서/도르래를 굴린다’(‘수화手話’ 중)

 그의 시에 뿌리 박은 아픔과 슬픔은 여전했지만 토로하는 목소리는 낮아졌다.

 “첫 번째 시집은 사이렌 같은 비명이었죠. 20대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펄쩍 뛰면서 슬퍼했다면 지금은 슬픔이 지나간 뒤 감정을 건져 올려 썼다고 할까요.”

 20대의 전력질주를 거쳐온 그는 숨을 고르고 있다. 켜켜이 쌓인 슬픔도 멎은 듯하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세 번째 시집은 완전히 다를 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