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에서 경순왕을 연기한 정보석. [사진 국립극단]
아랫것들이 이 모양이니 윗것들은 오죽하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바바리 코트를 입고선 촉새처럼 사방을 휘젓는다. 총을 빼들고 협박·공갈과 비굴 모드를 휙휙 넘나든다. 후백제의 왕 견훤은 한 수 위다. 말폼새며 짓거리가 영락없는 ‘양아치’다.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만 많아요. 캐릭터 최악 아니니?”
국립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 네 번째 연극인 ‘멸’(滅)(김태형 작, 박상현 연출)의 전반적인 풍경이다.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퓨전 사극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뒤죽박죽이다. 옷은 최신식이요, 말투는 뒷골목이다.
엄격한 역사적 고증? 그런 거 없다. 세상에 경순왕이 경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걸 뒤에서 조종한 게 견훤이란 게 가당하기나 할 소리인가.
그저 신라 말·후삼국시대라는 역사적 시기와 경순왕·마의태자·견훤 등 그 시대 주요 인물만 가져다 놓았을 뿐 나머지는 몽땅 작가의 가상이다. 아마 과거를 빗대 현대를 풍자하고픈 의도가 강한 듯싶다.
의도야 어떻든 연극은 재미있다. 저열한 경순왕, 팜므파탈 왕후, 조폭 뺨치는 견훤, 막무가내 견훤 아들 등 캐릭터가 살아있다. 장면 전환은 빠른데다 등장 인물간의 얼개와 사건도 꽤 설득력이 있다. 군더더기 없는 얘기인 덕에 몰입도가 좋다.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통찰력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괜히 난해하거나 아니면 지루한 여타 삼국유사 프로젝트 연극에 비해 한층 짜임새를 갖춘 수작이다.
◆연극 ‘멸’=18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1만원∼3만원. 1688-5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