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본 연극 영화

피에타(2012)

아기 달맞이 2012. 9. 18. 07:28

피에타

연출: 김기덕

출연: 조민수, 이정진

2012, 104min.

#. 불편함의 정체

김기덕 영화를 보느라 들고 나는 상영관 앞에서는 반드시 여러 차례 숨을 고르게 된다.

보기 전에는 불편해질 준비를 하느라, 보고 나서는 불편함의 정체를 헤아리느라 자주 가슴이 답답해지고 먹먹해지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가 주는 불편함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상식과 점잖은 이해를 뛰어 넘는 잔혹하거나 가혹한 행동과 이미지들이 주는 불편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이미지의 공격보다는 해석과 관련한 것으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대사의 동어반복이나 직유의 몽타주 같은 과잉 의미화가 주는 피로와 짜증, 같은 것.

언제부터인지 나는 두 번째가 훨씬 더 피곤하고 힘겹다 느낀다.

첫 번째의 경우에는 대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라는, 아마도 경험에서 우러나왔을 통찰과 나름의 진실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점은 김기덕 영화 최고의 장점이기도 한 반면, 후자의 경우는 자주 의미의 투박한 강요와 압박으로 느껴지곤 한다.

두 가지 불편함 모두 그러나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상은 늘 '점잖게' 돌아가지만은 않으며, 인간이 얼마나, 어디까지 잔인하고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는 매일 저녁 뉴스에서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영화 텍스트 자체의 가혹함이 아니라 현실의 가혹함이거나, 그보다는 그 가혹함을 우리가 흔히 휴식으로 삼고 싶어하는 영화에서까지 보아야 한다(그러니까 보도록 만든다)는 사실이 지닌 가혹함일 것이다.

의미의 반복과 강조 역시 의도와 주장을 읽어내기 쉽다는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영화가 그토록 자주 심한 비판과 경멸에 노출되는 데에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그의 화법이 너무 쉽다는 점도 한 몫 하는 거라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는 좀처럼 모호하게 포장하거나 변명하거나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적어도 그의 영화에 '난해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정작 난해하고 심오한 것은 그의 영화 자체가 아니라 그의 영화가 던지고 있는 질문들이다.

어려운 질문을 단순하게 - 그리고 공격적으로 - 던지는 것, 김기덕이 제일 잘하는 일이다.

#. 죄와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악어>의 용패(조재현)와 <나쁜 남자>의 한기(조재현)를 비롯한 김기덕의 인물들이 그토록 가학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고 따라서 인과관계에 따른 이해가 불가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물으면 김기덕이 했을 법한 답은 이렇다.

그럴 수 있다.

사실 다른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인간은 본디 그런 존재다, 누구나 그런 형편에 처해 있으면, 그 정도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영화는 잔인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데 <피에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냉혈한 이강도(이정진)의 잔인함에는 엄마가 그를 버렸기 때문이라는,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고 가족을 경험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라는, 친절하고 반복적인 설명이 뒤따른다.

그런 점에서 <피에타>의 강도는 김기덕이 갓 '말랑말랑해지던' 시기의 작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의 동자승과 어렴풋이 만난다. <봄, 여름... 봄>의 후반부, 절에 아이를 버려두고 떠나다가 얼음속에 빠져 숨지는 엄마가 나오는데, 이는 처음 '봄'의 동자승과 마지막 '봄'의 동자승의 순환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 어쩌면 처음 봄의 그 아이도 그렇게 버려졌을 거다.

이 경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김기덕은 이번엔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엄마한테 버려진 채 30년 넘게 홀로 그야말로 야생동물처럼 살다가(강도는 늘 손수 잡아와 직접 도살한 동물들로 식사를 해결한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라고 불쑥 누가 나타나면 그럴 수 있다고.

또, 엄마라면, 엄마니까 그럴 수 있다고. 게다가 아들을 버린 엄마라면 말이다.

여튼 강도의 강포함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은 곧 그에게 구원에의 희망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원인이 치유되면 그런 엉망진창인 삶도 회복과 구원이 가능하다는.

그건 '구제 불능의' 삶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리하여 30년만에 엄마가 나타나야 했다, 강도의 구원을 위해서.

아이러닉한 것은 그의 구원이 그가 해친 누군가의 '복수'를 통해 도달되는 종착역이라는 점이다.

한술 더 떠, 그보다 더 아이러닉한 것은 그 복수란 곧 '희생'이었다는 점.

희생자를 위한 복수를 위한 희생. 그것으로 미선(조민수)은 복수와 폭력의 순환을 끊어냈다.

여기서 <피에타>는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이나 <친절한 금자씨>류(그리고 최근의 숱한 복수 영화들) 보다는 이창동의 <시>의 범주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강도는 엄마에 의해 구원되었는가?

엄밀하게 말하면, 아니다. <봄, 여름....봄>에서 장년이 된 동자승(김기덕)이 맷돌을 매고 겨울산을 오르는 고행을 멈출 수 없었던 것처럼, <피에타>에서 역시 궁극적인 죄값은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 되어 있다.

결국 김기덕에게 구원이란, 스스로 죄값을 치러낼 용기를 얻는 것 정도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승려와 불교의 이미지가 한 장면 삽입된 것은 전작에 비해 누군가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피에타)" 주어야만 가능한 구원의 본질에 조금 더 다가선 것으로 보아도 좋을까.

처연하고도 강렬한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는 그럼에도 김기덕이 '기독교적인'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라면 아직은 유보적인 입장임을 짐작하게 한다.

<나쁜 남자>의 엔딩에 이어 여기서도 마지막 이미지는 트럭이다.

이를테면 죄와 구원과 용서와 희생이라는 형이상학적이고 고귀한 주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 앞에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 조국을 욕했더니 조국에서 훈장을 주더라...

야인이 되어 잠적한지 3년만에 들고 나와 칸에 입성한 작품 <아리랑>(2011)을 통해 김기덕은 그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영화로 해외에서 인정받고 돌아오니 대통령이 훈장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아이러니.

<피에타>에서도 조국의 현실은 어느 정도 거기 거주하는 인물들의 비참함의 근원이다. 김기덕이 15세때부터 공장에서 일했다는 청계천이 영화의 주요 배경인데, 재개발을 앞둔 영세 공장지대의 처참함은 몇 블럭 건너 고층빌딩 숲과 대조되는 이미지로 내내 등장한다.

여기에 '친절한 기덕씨'는 반복되는 활자 이미지를 통해 현실비판의 의미를 강화한다.

"SH". 다분히 서울 주택공사의 로고를 연상시키는 빨강과 파란 색상의 이 이니셜은 영화에서 강도가 속한 고리대금업 회사(순호금융이었던가, 삼호인가, 삼화인가... 잘 기억안남..) 이름으로, 악덕 사장의 사무실 문 앞에 허술한 종잇장처럼 붙어있어 카메라의 시야에 여러 차례 포착된다. 기본적으로 용서와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이 영화에서 SH의 사장이 유일하게 죄과로 인해 직접 응징당하는 인물이라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 한데, 이는 영화가 개인의 죄와 구원을 다루어내면서 구조적인 악을 간과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구원의 문제를 다룬 영화이자 "자비"를 말하는 영화로서 제도로서의 종교 역시 참조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는 붉은 십자가와 건물 외벽의 간판이라는 활자 이미지로 두세차례 반복해서 제시된다.

십자가와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는 간판은 강도가 살고 있는 집의 창문 밖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곳에 건재한다. 더욱이 "할렐루야..." 밑에는 특히 "합동 총회 신학교"라는 글씨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통상 간판이나 외벽에 교단명을 로고가 아닌 활자로 표기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다분히 노골적이고 의도적인 노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청계천이 감독의 생의 한 줄기였듯이, 그가 한 때 목사가 되고 싶어 몸담았던 '총회신학교' 역시 그의 절망과 고통을, 혹은 구원에의 유일한 빛을 설명하는 한 동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은 혹 제도 종교를 향한 화해의 제스처일까.

사실 이러한 반복적 표기가 긍정인지 부정인지 조롱인지, 단순한 회고나 향수인지, 이 부분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하여 죄와 용서와 구원에 대한 메시지로 인해 혹 교계의 관심을 받게 될 경우, 그에게서 "그들(교회와 교단)을 욕하고 비웃었더니 불러다가 칭찬하더라"는 자조를 듣게 되지는 않기만을 소박하게 바랄 뿐.

#. 김기덕이니까.

이처럼 <피에타>가 문제작이고 구원과 죄의 본질적 아이러니에 대해 심오한 통찰을 지녔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실, 중반 이후가 되어야 영화는 비로소 '볼 만해' 진다.

그 전까지는 본격적인 문제의식과 진짜 질문이 드러날 때까지 동어반복과 당황스런 인물의 성격 변화와 간혹 짜증나는 직유와 직설의 이미지들을 인내심을 갖고 참아내야 한다. 예의 '김기덕이려니...' 심호흡을 해가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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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