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백자 달항아리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만의 미감이 있다. 무게가 있되 날렵하고, 고요하되 경쾌하고, 도량이 하해와 같되 섬세하기가이슬 같은, 아름다움의 절대치다.
‘박영숙 요(窯)’의 박영숙(66) 대표는 그 유연하고 흔연하고 정결하고 따스한 달항아리에 인생을 걸었다.
“관람객들 발걸음을 달항아리 앞에 딱 붙들려면, 그 앞에서 눈물이 펑 쏟아지게 만들려면 차가운 도자기 안에 내 혼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했다. 18세기의 재현이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창조. 그가 밥 먹는 시간까지 아끼며 몰입하는 작업이다.
영국왕실 V&A 박물관 최고 컬렉션으로 뽑힌 박영숙의 달항아리
“저것 만든 이 누구요?” 이우환 선생과 우연한 만남이 날 일으켜
박영숙(66)은 백자를 만드는 작가다. 1979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도자기 브랜드 ‘박영숙 요(窯)’를 만들었으니 올해로 33년째 도자기를 껴안고 뒹굴어왔다. 처음엔 주전자와 접시와 합을 만들었고, 10여 년 전부터 달항아리를 만든다. 그는 국제적인 작가다.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빅토리아 앨버트(V&A) 박물관, 미국의 하버드대학 박물관, 시애틀·보스턴·휴스턴 박물관에 그의 달항아리가 영구 소장돼 있다.
박영숙은 지금 은둔에 가깝게 경기도 성남시 사송동의 작업실 안에만 칩거한다. 그 흔한 언론 인터뷰조차 죽 거절해 왔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만나더라도 허튼 입은 아예 떼지 않는다. 왜 이렇게 값이 세냐는 사람에게선 아예 등을 돌려버린다. 그래서 손가락질도 꽤 받았지만 그의 칩거는 무슨 귀족주의나 신비주의가 아니다. 기운을 모으려는 것이고 에너지를 아끼려는 것이다. 그렇게 아낀 힘을 오로지 백자 달항아리에만 쏟아붓는다. 고집과 열정! 목표를 향해 맹목으로 치닫게 하는 힘은 타고난 미감이나 솜씨가 아니라 고집과 열정이다. 그 맹목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유일한 것을 창조해 낼 수 없다. 박영숙은 바로 그걸 가진 사람 같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인터뷰를 달갑잖아 하던 그가 이번에 나를 만난 것은 아마도 마음 혹은 몸이 조금 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몇 해 전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적도 있고 예순여섯 나이가 버거웠을 수도 있다. 아니 거꾸로 인제는 할 만큼 했다는 충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그를 썩 기쁘게 한 일이 있다. 영국 왕실의 보물창고인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이 소장한 박영숙의 달항아리가 ‘박물관 최고의 컬렉션’으로 꼽혔다는 소식이었다. “영국 저명인사 다섯 명을 선정해 그들로부터 해마다 박물관 최고 컬렉션을 지정하도록 하나 봐. 영화 ‘007시리즈’에 나오는 주디 덴치 기억나요? 그에게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싶은 단 한 가지를 택하라고 했더니 바로 내 달항아리를 꼽더라는 거야.” 달항아리를 꼽은 주디 덴치의 선정 이유는 이랬다.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그 앞에서 내가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지름 2m 백자접시 수많은 실패 끝에 만들어내
박영숙은 정식으로 도자기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동아문화센터에서 취미로 백자를 배웠고, 도자기 사업을 하던 남편의 가게 귀퉁이에 재미삼아 전시해 뒀다. 인사동의 ‘내향’이란 가게였다. 이걸 지나가던 이우환 선생이 발견한다. “내 접시를 콕 집으면서 이걸 만든 사람이 누군지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래.” 그날부터 이우환 선생이 그의 스승이 된다. “도자기를 가르쳐줄 테니 두 가지 약속만 하자고 하시데. TV에 나가지 말 것, 건방지게 굴지 말 것. 그걸 철저히 지켰지.” 그래서 79년 ‘박영숙 요’가 태어났고, 급기야 이우환의 ‘조응’ 모티브가 박영숙 접시 위에 얹히게 된다. 희고 매끄러운 백자 위에 푸른 점 하나, 혹은 둘! 이우환과 박영숙의 우아하고 선(禪)적인 만남이었다.
그는 도자 역사의 신기록도 세운다. 역시 이우환 선생의 자극 때문이었다. “이우환 선생이 중국에는 지름 2m짜리 접시가 있다는 거야. 그런 크기는 가장자리가 휘어져 내려서 성형이 불가능하거든. 중국에 있다면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냐, 오기가 생기데!” 갖은 실패 끝에 그는 기어이 지름 2m의 대형 접시를 만들어낸다. 그 기술이 밑바탕이 되어 그는 백자 달항아리의 키를 조선 때보다 20㎝나 늘려놓는다. 1㎝만 커져도 가마 속에서 흘러내릴 확률이 몇 배로 늘어나는 모험이었건만! 국보급 조선 달항아리는 키가 가장 큰 것이 48㎝ 정도인데 박영숙이 만든 항아리는 대개 60㎝를 넘는다. 66.5㎝에 이르는 놈도 있다. 실패할 확률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몰아붙였고, 기어이 그 덩실한 높이와 크기를 이뤄냈다.
달항아리 이전 그는 주전자의 달인이었다. 박영숙 주전자는 특별했다. 물을 따르고 나면 마지막 한 방울이 끝내 떨어지지 않고 주둥이 끝에 정확하게 매달렸다. “비결이 뭐지요? 주둥이의 각도? 길이? 혹은 흙의 두께입니까? ” 박영숙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더니 “사실 잘 모르겠어. 그냥 손으로 만져가며 대중해서 만들어. 그런데 저절로 이렇게 되더라고!” 한다.
수년간 지켜만 봤던 달항아리, 쉰 중반부터 도전
2000년 국립박물관 관장을 지낸 정양모 선생이 박영숙에게 달항아리 만들기를 제안했다. 그래, 달항아리! 이미 그는 조선 달항아리를 신주처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지금 리움에 간 보물 1439호 달항아리를 원래 내가 가지고 있었어. 어둠 속에서, 달빛 아래서, 꽃 필 때, 눈 내릴 때 달항아리의 빛과 질감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수십 년 지켜봐 왔던 사람이 바로 나지!” 그러나 차마 그걸 만들 생각은 못했었다. 그런 그의 내면의 심지에 정양모 선생이 불꽃을 화르륵 댕겼다. 그의 나이 쉰 중반, 삶의 환희와 좌절을 웬만큼 겪고 난 어름, 몸과 마음이 달항아리처럼 둥글고 커지고 텅텅 비고 담담하고 담백해진 이후였다.
그는 새롭게 백토를 구하고 유약을 연구하고 그릇의 형태를 가늠하면서 달항아리 만들기에 돌입했다. 달항아리를 만들면서 그는 가위 침식을 잊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고구마로 때웠고, 흙을 만지다 눈을 들면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있었다. 항아리는 수도 없이 터지고 무너져내렸다. 달항아리는 사발 형태 둘을 맞엎어서 만드는데 굽기 전부터 위·아래가 붙지 않거나 겨우 붙더라도 구워낸 뒤 폭삭 주저앉기 일쑤였다. 두 개의 반구(半球)를 이어붙여 높이 50㎝ 안팎의 항아리를 만들고 표면의 질감을 만들어내기까지 거의 4년이 걸렸다. 2004년 첫 완성작이 나오기 시작했고 2006년에 현대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아래·위 사발이 가마 속에서 터지거나 깨지지 않고 서로를 꽉 껴안는 걸 보면 흡사 부부 같아. 자기를 허물고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온전히 하나가 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달항아리는 도량이 바다 같지.”
그의 하루는 눈뜨자마자 부처님 앞에 올리는 삼배로부터 시작된다. 절하면서 마음을 텅텅 비운다. 이우환·정양모 선생 말고도 그의 스승이 또 한 분 있으니 바로 성철 스님이다. 생전의 성철 스님에게 박영숙은 신심 돈독한 ‘경주보살’이었다. 경주는 그의 고향이다.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불국사 근처에서 자개로 장롱과 상을 만드는 신라 공예사를 운영했기에 매운 눈썰미는 내림이고 가풍이었다. 외가는 불국사 안에서 방이 쉰 개가 넘는 여관을 운영했다. 불국사가 그의 놀이터였다. 그랬기에 성철 스님과의 인연은 묵은 옷처럼 자연스러웠다. 스님은 생전에는 도자기를 들고 바깥세상으로 나가라고 용기를 북돋웠고 사후에는 백토를 못 찾아 고민할 때 경주역 근처를 뒤져보라는 현몽도 하셨다.
“달항아리 100개 만들고 나면 난 죽어도 괜찮아요”
내가 그의 성남시 사송동 집에 갔던 날도 그는 한창 달항아리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달항아리 100개를 만들고 나면 나는 죽어도 괜찮아요. 인제 한 2년만 더 하면 100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은 만들면 안 돼. 인제 흙도 더는 구할 수가 없고….”
박영숙 백자 달항아리는 인사동 ‘아틀리에 서울’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남편인 박영무(70) 선생이 아틀리에를 지키고 있고, 뉴욕의 ‘박영숙 요’는 아들이 맡아 경영한다. 대량생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흔한 세일 한 번 하지 않고 박영숙의 고집을 지킬 수 있었던 건 가족의 힘도 크다. “미국에서 수학 천재로 소문난 손자놈이 있어요. 이 녀석이 ‘할머니 제 몫으로 달항아리 열 개만 남겨 주세요. 나중에 꼭 쓸 데가 있어요’ 해서 제일 좋은 건 그놈 몫으로 남길 거야.” 손자 자랑에 얼굴을 빛낼 때 그는 천상 너그러운 할머니다. 그러나 “개가죽 그슬린 것 같은 항아리를 달항아리라고 내놓는 거 보면 내가 참 억장이 무너진다고! 몇 백만원, 몇 천만원에 거래되는 물건과 내것을 비교하는 건 참을 수 없어”라고 말할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까칠하고 도도한 예술가다. 나중에 듣자니 그의 달항아리는 해외 옥션에서 2억원 정도에 거래된다 하고, 버킹엄궁에서는 현재 그의 주전자와 찻잔을 사용 중이라고 한다.
“영국 여왕도 내 작업실 오고 싶어 했죠”
알에서 깬 새가 날개 편 형태
취향·기질 모든 것 담아 지어
박영숙의 작업실 겸 집은 새가 알에서 나와 막 날개를 펼친 형태다. 가운데 둥근 부분은 새의 알이고 앞은 부리다. 나정에서 거대한 알로 발견된 박혁거세의 후손이어서인가. 그는 새와 인연이 깊다. 심지어 스스로 전생이 새라고도 믿는다. “난 암기력이 없어. 머리가 나빠요. 새도 기억력이 꽝이잖아? 나는 조금밖에 못 먹어. 새도 모이주머니가 쪼끄맣잖아요? 그러면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지. 나도 그래! 완전 새야!” 그는 거침없고 활달한가 하면 예민하고 섬세하다. 세상 모든 걸 껴안을 듯 품이 넓으나 그만큼 허허롭고 무상하다. 그 마음이 집에 담길 수 있는가. 어쨌든 그는 집의 형태 안에 자신의 전생·선조·취향·기질을 모조리 담기로 했다.
가운데 알 부분은 전시실이다. 한 층에 둘씩 둥근 창을 뚫고 창호지를 발랐다. 창호지 뒤로는 대나무를 심었다. 볕이 들어와 댓잎을 창호지 위에 그려놓도록 만들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그림이다. 그 댓잎 앞에 늘어놓인 백자 달항아리는 1300도 고열을 견뎌내고 흙에서 보석으로 변한 괄목상대들이다.
집이 놓인 땅의 형세 또한 새가 알을 품는 형국이다. 1997년 한창 집을 짓는 중에 외환위기가 터졌다. “집을 짓는 중에는 돈이 모자라면 안 돼. 집이란 휴식하는 공간인데 짓는 중에 쪼들리면 지어놔도 편치가 않잖아?” 박영숙·박영무 부부는 일찍이 경주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면세점을 운영했다. 그때 불린 자산이 든든해 도자기를 팔지 않고도 집도 짓고 살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땅이 그린벨트여서 전체 면적은 한 5950㎡(1800평) 정도 되지만 대지는 270㎡(82평)밖에 안 돼. 그래서 복도를 둬서 집을 길쭉하게 앉혔어요. 지하엔 작업실, 1·2층은 전시실 겸 생활공간이고 3층엔 침실을 뒀어.” 앉아 있는 새 둥지에 안정감을 더하기 위해 마당에는 신라적 돌우물과 석탑을 앉혔다. 모두 경주에서 날라온 것들이다. 식탁에서 내다보는 뜰엔 늙은 감나무와 참나무들이 음전하고 까치들이 날아와 연신 우짖는다.
“독일의 세계적인 건축가 피터 줌터, 하버드대학 박물관장 프랭크 베일리, 전 도쿄국립박물관장 하야시야 세이조 등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이곳으로 직행했지.” 99년 방한한 엘리자베스 여왕도 이곳 사송동에 오고 싶어 했지만 경호 문제가 복잡해 그냥 인사동만 들러보고 돌아갔단다. 물론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지만 이 집 곳곳에 놓인 돌탑·우물·조선 목가구·창호지문 같은 아름다운 것들이 그들을 끌어당기는 인력으로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박영숙 요(窯)’의 박영숙(66) 대표는 그 유연하고 흔연하고 정결하고 따스한 달항아리에 인생을 걸었다.
“관람객들 발걸음을 달항아리 앞에 딱 붙들려면, 그 앞에서 눈물이 펑 쏟아지게 만들려면 차가운 도자기 안에 내 혼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했다. 18세기의 재현이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창조. 그가 밥 먹는 시간까지 아끼며 몰입하는 작업이다.
영국왕실 V&A 박물관 최고 컬렉션으로 뽑힌 박영숙의 달항아리
“저것 만든 이 누구요?” 이우환 선생과 우연한 만남이 날 일으켜
18세기 달항아리가 조선 여자라면 박영숙 달항아리는 현대 여인이다. 올여름 시드니 비엔날레에 내보내기 위해 방금 구워낸 달항아리를 박영숙 작가가 껴안고 있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영숙은 지금 은둔에 가깝게 경기도 성남시 사송동의 작업실 안에만 칩거한다. 그 흔한 언론 인터뷰조차 죽 거절해 왔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만나더라도 허튼 입은 아예 떼지 않는다. 왜 이렇게 값이 세냐는 사람에게선 아예 등을 돌려버린다. 그래서 손가락질도 꽤 받았지만 그의 칩거는 무슨 귀족주의나 신비주의가 아니다. 기운을 모으려는 것이고 에너지를 아끼려는 것이다. 그렇게 아낀 힘을 오로지 백자 달항아리에만 쏟아붓는다. 고집과 열정! 목표를 향해 맹목으로 치닫게 하는 힘은 타고난 미감이나 솜씨가 아니라 고집과 열정이다. 그 맹목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유일한 것을 창조해 낼 수 없다. 박영숙은 바로 그걸 가진 사람 같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영숙 작가가 초벌구이한 백자 달항아리를 고운 사포로 문지르고 있다. 백자의 살결을 매끄럽게 하고 형태를 다듬는 과정이다.
최근 그를 썩 기쁘게 한 일이 있다. 영국 왕실의 보물창고인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이 소장한 박영숙의 달항아리가 ‘박물관 최고의 컬렉션’으로 꼽혔다는 소식이었다. “영국 저명인사 다섯 명을 선정해 그들로부터 해마다 박물관 최고 컬렉션을 지정하도록 하나 봐. 영화 ‘007시리즈’에 나오는 주디 덴치 기억나요? 그에게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싶은 단 한 가지를 택하라고 했더니 바로 내 달항아리를 꼽더라는 거야.” 달항아리를 꼽은 주디 덴치의 선정 이유는 이랬다.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그 앞에서 내가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지름 2m 백자접시 수많은 실패 끝에 만들어내
박영숙은 정식으로 도자기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동아문화센터에서 취미로 백자를 배웠고, 도자기 사업을 하던 남편의 가게 귀퉁이에 재미삼아 전시해 뒀다. 인사동의 ‘내향’이란 가게였다. 이걸 지나가던 이우환 선생이 발견한다. “내 접시를 콕 집으면서 이걸 만든 사람이 누군지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래.” 그날부터 이우환 선생이 그의 스승이 된다. “도자기를 가르쳐줄 테니 두 가지 약속만 하자고 하시데. TV에 나가지 말 것, 건방지게 굴지 말 것. 그걸 철저히 지켰지.” 그래서 79년 ‘박영숙 요’가 태어났고, 급기야 이우환의 ‘조응’ 모티브가 박영숙 접시 위에 얹히게 된다. 희고 매끄러운 백자 위에 푸른 점 하나, 혹은 둘! 이우환과 박영숙의 우아하고 선(禪)적인 만남이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자신이 만든 백자 접시 위에 앉아 있는 박영숙 작가. 뒤로 그가 만든 달항아리들이 보인다.
그는 도자 역사의 신기록도 세운다. 역시 이우환 선생의 자극 때문이었다. “이우환 선생이 중국에는 지름 2m짜리 접시가 있다는 거야. 그런 크기는 가장자리가 휘어져 내려서 성형이 불가능하거든. 중국에 있다면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냐, 오기가 생기데!” 갖은 실패 끝에 그는 기어이 지름 2m의 대형 접시를 만들어낸다. 그 기술이 밑바탕이 되어 그는 백자 달항아리의 키를 조선 때보다 20㎝나 늘려놓는다. 1㎝만 커져도 가마 속에서 흘러내릴 확률이 몇 배로 늘어나는 모험이었건만! 국보급 조선 달항아리는 키가 가장 큰 것이 48㎝ 정도인데 박영숙이 만든 항아리는 대개 60㎝를 넘는다. 66.5㎝에 이르는 놈도 있다. 실패할 확률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몰아붙였고, 기어이 그 덩실한 높이와 크기를 이뤄냈다.
달항아리 이전 그는 주전자의 달인이었다. 박영숙 주전자는 특별했다. 물을 따르고 나면 마지막 한 방울이 끝내 떨어지지 않고 주둥이 끝에 정확하게 매달렸다. “비결이 뭐지요? 주둥이의 각도? 길이? 혹은 흙의 두께입니까? ” 박영숙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더니 “사실 잘 모르겠어. 그냥 손으로 만져가며 대중해서 만들어. 그런데 저절로 이렇게 되더라고!” 한다.
수년간 지켜만 봤던 달항아리, 쉰 중반부터 도전
1 박영숙 주전자. 몸통과 주둥이가 만나는 부분에 골프공만 한 원형 볼이 들어 있다. 2 이우환의 푸른 점 모티브를 찍은 백자 찻잔. 3 주전자 주둥이. 물을 따르고 나면 마지막 한 방울이 마치 보석처럼 매달려 있다. 4 작업실 건물 바깥에 놓아둔 달항아리. 하얀 벽과 백자의 조화가 아름답다.
그는 새롭게 백토를 구하고 유약을 연구하고 그릇의 형태를 가늠하면서 달항아리 만들기에 돌입했다. 달항아리를 만들면서 그는 가위 침식을 잊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고구마로 때웠고, 흙을 만지다 눈을 들면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있었다. 항아리는 수도 없이 터지고 무너져내렸다. 달항아리는 사발 형태 둘을 맞엎어서 만드는데 굽기 전부터 위·아래가 붙지 않거나 겨우 붙더라도 구워낸 뒤 폭삭 주저앉기 일쑤였다. 두 개의 반구(半球)를 이어붙여 높이 50㎝ 안팎의 항아리를 만들고 표면의 질감을 만들어내기까지 거의 4년이 걸렸다. 2004년 첫 완성작이 나오기 시작했고 2006년에 현대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아래·위 사발이 가마 속에서 터지거나 깨지지 않고 서로를 꽉 껴안는 걸 보면 흡사 부부 같아. 자기를 허물고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온전히 하나가 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달항아리는 도량이 바다 같지.”
그의 하루는 눈뜨자마자 부처님 앞에 올리는 삼배로부터 시작된다. 절하면서 마음을 텅텅 비운다. 이우환·정양모 선생 말고도 그의 스승이 또 한 분 있으니 바로 성철 스님이다. 생전의 성철 스님에게 박영숙은 신심 돈독한 ‘경주보살’이었다. 경주는 그의 고향이다.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불국사 근처에서 자개로 장롱과 상을 만드는 신라 공예사를 운영했기에 매운 눈썰미는 내림이고 가풍이었다. 외가는 불국사 안에서 방이 쉰 개가 넘는 여관을 운영했다. 불국사가 그의 놀이터였다. 그랬기에 성철 스님과의 인연은 묵은 옷처럼 자연스러웠다. 스님은 생전에는 도자기를 들고 바깥세상으로 나가라고 용기를 북돋웠고 사후에는 백토를 못 찾아 고민할 때 경주역 근처를 뒤져보라는 현몽도 하셨다.
“달항아리 100개 만들고 나면 난 죽어도 괜찮아요”
내가 그의 성남시 사송동 집에 갔던 날도 그는 한창 달항아리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달항아리 100개를 만들고 나면 나는 죽어도 괜찮아요. 인제 한 2년만 더 하면 100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은 만들면 안 돼. 인제 흙도 더는 구할 수가 없고….”
박영숙 백자 달항아리는 인사동 ‘아틀리에 서울’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남편인 박영무(70) 선생이 아틀리에를 지키고 있고, 뉴욕의 ‘박영숙 요’는 아들이 맡아 경영한다. 대량생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흔한 세일 한 번 하지 않고 박영숙의 고집을 지킬 수 있었던 건 가족의 힘도 크다. “미국에서 수학 천재로 소문난 손자놈이 있어요. 이 녀석이 ‘할머니 제 몫으로 달항아리 열 개만 남겨 주세요. 나중에 꼭 쓸 데가 있어요’ 해서 제일 좋은 건 그놈 몫으로 남길 거야.” 손자 자랑에 얼굴을 빛낼 때 그는 천상 너그러운 할머니다. 그러나 “개가죽 그슬린 것 같은 항아리를 달항아리라고 내놓는 거 보면 내가 참 억장이 무너진다고! 몇 백만원, 몇 천만원에 거래되는 물건과 내것을 비교하는 건 참을 수 없어”라고 말할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까칠하고 도도한 예술가다. 나중에 듣자니 그의 달항아리는 해외 옥션에서 2억원 정도에 거래된다 하고, 버킹엄궁에서는 현재 그의 주전자와 찻잔을 사용 중이라고 한다.
“영국 여왕도 내 작업실 오고 싶어 했죠”
알에서 깬 새가 날개 편 형태
취향·기질 모든 것 담아 지어
5 집의 외양은 알에서 깨어나는 새를 형상화했다. 가운데 둥근 부분이 알, 오른쪽 길쭉한 부분은 날개, 왼쪽 부분은 부리 모양이라고 한다. 6 99년 방한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울 인사동 ‘박영숙 요’에 들러 박 작가와 함께 주전자를 보고 있다.
가운데 알 부분은 전시실이다. 한 층에 둘씩 둥근 창을 뚫고 창호지를 발랐다. 창호지 뒤로는 대나무를 심었다. 볕이 들어와 댓잎을 창호지 위에 그려놓도록 만들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그림이다. 그 댓잎 앞에 늘어놓인 백자 달항아리는 1300도 고열을 견뎌내고 흙에서 보석으로 변한 괄목상대들이다.
집이 놓인 땅의 형세 또한 새가 알을 품는 형국이다. 1997년 한창 집을 짓는 중에 외환위기가 터졌다. “집을 짓는 중에는 돈이 모자라면 안 돼. 집이란 휴식하는 공간인데 짓는 중에 쪼들리면 지어놔도 편치가 않잖아?” 박영숙·박영무 부부는 일찍이 경주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면세점을 운영했다. 그때 불린 자산이 든든해 도자기를 팔지 않고도 집도 짓고 살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땅이 그린벨트여서 전체 면적은 한 5950㎡(1800평) 정도 되지만 대지는 270㎡(82평)밖에 안 돼. 그래서 복도를 둬서 집을 길쭉하게 앉혔어요. 지하엔 작업실, 1·2층은 전시실 겸 생활공간이고 3층엔 침실을 뒀어.” 앉아 있는 새 둥지에 안정감을 더하기 위해 마당에는 신라적 돌우물과 석탑을 앉혔다. 모두 경주에서 날라온 것들이다. 식탁에서 내다보는 뜰엔 늙은 감나무와 참나무들이 음전하고 까치들이 날아와 연신 우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