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마당에 있는 한옥 별채에서 손님을 맞을 때면 정씨는 한국의 멋이 물씬 풍기는 소반을 사용한다. 서양인들은 이 앙증맞고 고풍스러운 ‘1인용 식탁’에 늘 홀딱 반해 버린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업가(이희상 운산그룹 회장)의 아내이자 요리학교 ‘츠지원’의 원장인 정영화(66)씨는 ‘밥상 차리기의 달인’이다. 특히 여러 사람을 위한 맛있고 큰 밥상이 그의 장기다. 아마도 이건 유산일 게다. 대학 시절 방학 때마다 요리 독선생을 불러 딸들을 가르쳤던 친정아버지, 매일 27명분의 식사를 만들어야 했던 친정어머니, 사업가의 아내로 늘 크고 작은 손님상을 마련했던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맛있는 유산’이다. 정씨는 요즘 시집간 세 딸에게 물려줄 요리법을 정리하고 있다. 아마도 그 첫 번째는 ‘설날 음식’이 아닐까.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대구 일광병원 정덕용 원장)는 음식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여자는 얼굴이 예쁜 것보다 음식을 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늘 말씀하셨죠.”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딸들이 집에 돌아오는 방학 때면 서양 요리 독선생을 구해놓고 기다릴 정도였다. 토스트·케이크·수프·샐러드…. 그날 배운 요리를 그날 만들게 하고 딸들의 솜씨를 평가하는 일을 아버지는 즐기셨다. 아버지는 딸들이 시집가기 전까지 끊임없이 유명 요리학원들에 다니게 했고 호텔의 조리장들을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1 “누군가에게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줄 때 정말 행복하다”는 정영화 원장.
친정은 제사가 참 많았다. 1년에 13번. 식구도 많았다. 형제가 10명(정씨는 그중 여덟째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 식구들이 10명, 집안일을 돕는 이들이 5명. 친정어머니는 매일매일 27인분의 밥상을 차려야 했다. 딸 여섯 중 막내였던 정씨는 특히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때부터 방과 후면 부엌 안팎으로 어머니를 따라다녔죠. 솥뚜껑 뒤집어 고기 굽고 전 부치는 명절날이면 정말 신명 났어요.”
설날 정씨 가족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닭조림’과 ‘상어전’은 친정어머니의 명절 음식들이다. “간장에 닭고기와 물에 불린 명태·다시마·오징어를 함께 넣고 오랫동안 조린 후 간장은 따로 그릇에 담고 고기들은 잘게 찢어 접시에 담아 내죠. 우리 식구들은 이 간장 국물에 다섯 가지 나물을 넣고 밥과 비벼 먹기를 좋아해요. 여기에 시어머니의 보쌈김치까지 더하면 두세 그릇은 쉽게 비우죠.”
충청도가 고향인 시댁 음식은 또 달랐다. ‘톡 쏘는’ 첫맛은 없지만 오래 먹어도 질리지 않는 깔끔한 맛이 정씨의 요리 의욕을 불렀다고 한다. “시어머니(호남제분 이용구 회장의 부인 오차득 여사)는 보쌈김치와 김밥을 참 맛나게 만드셨죠.” ‘시어머니표 김밥’은 가늘게 채 썬 우엉과 유부, 곱게 간 쇠고기를 프라이팬에 함께 볶은 후 길게 잘라낸 오이, 달걀지단과 함께 말아 만든다. 정씨의 집 장독대에는 두 분 어머니가 쓰던 오래된 장항아리들이 나란히 서 있다. 정씨 가족의 명절 식탁 풍경처럼.
2 갈비스테이크 소스는 무·배·양파·마늘·생강즙 섞은 것과 간장을 3대 1의 비율로 섞어 만든다. 3 시어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은 보쌈김치는 담백하고 개운한 맛이 일품이다. 4 정씨는 “수육이 더 맛있어지려면 껍질과 살코기의 비율이 중요하다”며 “살코기 아랫부분을 적절히 잘라내고 직사각형 모양으로 썰면 맛과 보기가 훨씬 좋아진다”고 했다. 5 닭조림을 할 때는 닭을 다른 재료보다 5분 정도 먼저 넣어 익혀내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살코기 속까지 간장 맛과 색이 잘 밴다. 냄비에 간장·참기름을 두르고 닭 껍질이 냄비 바닥에 닿도록 한 다음 익힌다.
딸들에게 식탁 준비, 음식 나르는 일 시켜 손님맞이 교육
남편인 운산그룹 이희상 회장과 정영화 원장은 45년생 닭띠 동갑내기다. 부부는 서서히 닮아간다지만 음식·와인·사람·여행 좋아하는 두 사람의 취향은 처음부터 같았다.
“주말마다 나를 데리고 좋은 식당을 찾아다니는 남편을 보면서 ‘아,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행복해했죠. 그런데 실은 회장님(남편 이희상 회장)한테 속은 것이더라고요. 나보고 그 맛들을 따라 하라는 거였어요.”(웃음)
정씨의 집에는 늘 손님이 많았다. 사업가의 아내였고 정씨 자신도 사람 초대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손님상을 차리는 일이 늘 즐거웠다고 한다. “결혼 초에는 방문하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살짝 놀라긴 했죠. 회장님이 국회의원에라도 출마하려는 줄 알았어요.”(웃음)
이 회장이 와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외국 손님도 많아졌다. (운산그룹 계열사 중에는 와인 관련 업체인 나라셀라, 단하유통, PDP와인이 있다. 이 회장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와이너리를 두고 직접 와인도 만들고 있다.) 손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출장 요리사를 불러본 적 없는 정씨는 서양인을 감동시킬 수 있는 식사가 뭘까 고민하면서 ‘더 예쁘고 더 맛있는 한식’을 생각했다. “친정아버지 덕분에 중국·이탈리아·프랑스 요리 등을 다 할 수 있었지만 우리 집에 찾아온 외국인에게 그들의 음식을 내놓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아이디어 연구도 많이 했다. 한번은 생선전 위에 마당에서 딴 호박꽃을 올려놔 봤다. 자기네도 호박꽃을 음식에 많이 사용한다며 이탈리아 사람들이 좋아했다. 또 시어머니가 물려주신 신선로를 본떠 1인용 신선로 그릇을 제작했더니 프랑스 사람들이 ‘뷰티풀’을 연발했다.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갈비 스테이크도 고안해냈다. 배즙·무즙·양파즙·생강즙을 넣은 양념간장에 고기를 하루 정도 재웠다가 숯불에 살짝 구우면 어린아이 주먹만큼 두꺼운 갈비도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여름이면 별채인 한옥 마루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예쁜 소반들도 모았다.
“손님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딱 한 번 긴장한 적이 있어요. 4년 전 일본의 츠지조 요리학교 교장선생님을 초대했을 때죠. 요리의 대가시니 긴장할 수밖에요.” 츠지 요시키 교장은 음식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가정집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은 처음”이라며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까지 했다.
정씨의 손님맞이는 세 딸의 가정교육으로도 이어졌다. “손님을 위해 식탁을 준비하고 음식을 나르는 일을 모두 아이들에게 시켰죠.” 친구 만나 수다 떨며 놀기 좋은 주말, 정씨의 딸들은 엄마의 심부름을 하며 얼마나 심통이 났을까. “내가 워낙 가정 교육에 엄해서 한 번은 딸들이 그러데요. ‘엄마, 혹시 계모 아니에요?’라고.”(웃음) 정씨는 자신이 부모님께 배운 것을 아이들에게 똑같이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한다. “어른을 모시고 접대하면서 배우는 예절의 중요성을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몰라요. 우리 딸들도 시집을 가서야 ‘엄마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건지 이제 알겠어요’라고 하더군요.”
6 정씨는 디저트용으로 내놓는 5색(치자·와인·비트·쑥으로 물들인) 송편도 집에서 직접 만든다. 7 여름철에 호박꽃을 따서 술을 제거한 후 햇볕에 말렸다가 냉동 보관해두면 여러 종류의 전을 부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다. 8 정씨의 나물 비빔밥은 국 대접만 한 그릇에 담겨 나온다. 앙증맞은 모양과 적은 양 때문에 손님들이 부담 없이 즐기기에 좋다.
딸·사위 집에 오면 “돼지고기배추쌈 먹고 싶어요”
주말에는 가족을 위한 식사를 준비한다. 매주 토요일엔 시집간 딸과 사위·손자들이 오기 때문이다. 사실 가족 식사에선 특별히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자식들이 하는 말은 똑같다. “어머니의 돼지고기배추쌈 먹고 싶어 왔어요.”
잘 익은 배추와 김치 속, 통통한 새우젓, 그리고 돼지고기 수육이 전부이지만 여기에 정씨가 아니면 안 되는 비법이 하나 숨어 있다. 돼지고기 수육의 두께다. 처음 보는 이들은 1㎜ 두께로 얇게 자른 수육을 보고 기계로 썬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정씨의 솜씨다.
“가족들은 고기만 보고도 내가 썰었는지 주방 아주머니가 썰었는지 금방 구별하죠. 이건 손목에 힘을 주면 안 돼요. 어깨 힘으로 해야지.”
일요일은 미혼인 외아들 건훈(31)씨와 부부가 외식을 하는 날이다. 결혼 초부터 부부가 하던 ‘식당 투어’의 연장인데 요즘은 아들이 메뉴를 정할 때가 많다. 얼마 전에는 홍익대 앞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엘 다녀왔다. 정씨는 “젊은 세대의 입맛을 알 수 있어서 재밌다”고 했다. 츠지원에서 요리를 배운 적이 있는 아들은 종종 직접 요리도 한다.
평일에는 아침 식사에 신경 쓴다. 이 회장과 아들은 저녁 약속이 많기 때문이다. 결혼 후 40여 년간 한 번도 거른 적 없는 이 회장의 건강식은 홍삼 달인 물과 해삼이다. 백령도에서 구입한 해삼 600마리를 햇볕에 잘 말린 다음 밀폐 봉지에 담아 냉장보관해 둔다. 매일 아침 한 마리씩 꺼내 물에 불린 다음 한입 크기로 잘라 식초에 찍어 먹는다. 본격적인 식사는 밥·국·김·생선·나물 반찬이 전부다.
남자들이 출근하고 나면 정씨의 일과가 시작된다. 츠지원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주로 음식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콩나물도 직접 키우고 두부도 직접 만든다. 봄에는 쑥을 말리고, 가을에는 무말랭이를 만들고. 굴비·고추·해삼·호박꽃도 볕이 좋을 때 말려둬야 필요할 때 쓸 수 있다. 요즘은 조리법 정리로 하루가 더 바빠졌다.
“시집간 딸들에게 주려고요. 유명하다는 요리학원은 다 다녀봤지만 결국 내 입맛은 엄마의 솜씨를 제일 잘 기억하잖아요. 집집마다 다른 ‘엄마표 된장찌개’만 모아도 훌륭한 요리책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맛에 대한 경험은 어린 시절이 중요하죠. 맛을 보고, 만드는 과정을 보고, 상차림을 보고. 그럼 언제든 따라 할 수 있어요. 가족의 입맛은 엄마가 만들고, 그게 결국은 한식의 전통으로 대물림되는 거잖아요.”
정영화 원장, 요리학교 츠지원 세운 뜻은 …
쌀 씻는 법부터 기록…츠지 철학으로 한식 체계화할 것
츠지원에서 요리사들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는 정영화 원장.
-요리학교를 설립한 이유는.
“2005년 신사동에 ‘와인과 식문화 복합공간’인 포도플라자 빌딩을 짓고 와인바 ‘뱅가’와 와인숍 ‘와인타임’ 운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단순히 먹고 마시는 공간이 되는 건 싫었다. 제대로 된 식문화를 알릴 수 있는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세계의 유명 요리학교를 찾던 중 츠지조를 알고 감동받았다.”
-츠지조 요리학교의 어떤 점에 감동한 건가.
“창업주인 츠지 시즈오(현 츠지 요시키 교장의 아버지)는 일본에 프랑스 요리를 뿌리내리게 한 분이다. 단순히 서양음식을 동양에 알리는 차원이 아니었다. 프랑스 요리의 기본을 철저히 연구해 일본 요리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게 그분의 업적이다. 예를 들어 쌀을 씻는 법, 생선을 다루는 법, 칼을 쓰는 법 등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기본들이 음식의 맛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꼼꼼하게 기록화한 작업이다.”
-츠지원에 아직 한식 과정이 없는 이유는.
“‘음식은 기본이 중요하다’는 츠지조의 철학을 배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는 한식 전문학교가 이미 많다. 하지만 요리를 만드는 것에만 급급하지 체계적인 연구와 기록을 바탕으로 기본부터 가르치는 곳은 흔치 않다. 츠지원은 지금 그 기본을 연구 중이다.”
-수강료가 회당 20만원 정도로, 비싼 편인데.
“일본 츠지조의 강사들이 한국에 머무르는 체재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한 강좌 수강생을 최대 8명으로 제한하는 것도 이유다. 처음에는 요리에 관심이 많은 주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국내 전문 요리사들의 수강신청이 늘고 있다. 그만큼 수준 높은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나.”
-일반인들을 위한 기회를 늘릴 계획은.
“1월부터 지방에 있는 분, 시간이 없는 분들이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요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이쿠킹(www.ecooking.co.kr)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듣고 테스트를 거치면 츠지원의 이쿠킹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향후 목표는.
“음식은 문화다. 매일 쉽게 지나치는 밥상에 우리의 문화와 정서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한식 퓨전 음식을 좋아한다지만 정통 한식이 가진 깊은 맛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뿌리가 튼튼해야 그늘이 커질 수 있다. 나는 집집마다 다른 ‘엄마의 손맛’이 한식의 뿌리라고 믿는다. 그걸 체계화해서 젊은이들에게 대물림하고, 외국인들에겐 한식과 와인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알게 해주는 게 나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