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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겨울 나그네’의 고독과 몽환적 아름다움

아기 달맞이 2011. 12. 27. 19:49





슈베르트빈에 있는 슈베르트 동상


사랑에 실패한 젊은이가 추운 겨울, 연인과 이별하고 눈 덮인 들판으로 떠납니다. 때때로 꿈같은 환상을 보지만, 이후에 밀려드는 쓰디쓴 현실의 절망감. 현재는 암울하고 미래는 불안한 젊은이의 방황이 남의 얘기같이 보이지 않네요. 우리와 닮아있는 이 사람은 슈베르트 가곡 ‘겨울 나그네’ 속 주인공입니다.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이 가곡집은 슈베르트가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썼지만 32세에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로서는 말년의 작품입니다. 이 무렵 슈베르트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뮐러의 시는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눈 속을 헤매는 나그네에 자신을 투영한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 슈베르트는 죽음을 예감하며 극도의 가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실 슈베르트의 짧은 생애는 그다지 빛난 적이 없습니다. 152cm의 작은 키, 뚱보에 수다쟁이, 음악 가정교사도 몇 년 하다 그만두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그렇다고 생전에 음악가로 큰 성공을 거두지도 못한 힘든 삶이었습니다. 결혼은커녕 여성을 제대로 사귀어보지 못한 채 매독에 걸려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 친구들 사이에서도 외로웠던 그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고귀한 음악을 꽃피웠습니다.


‘겨울 나그네’ 속 젊은이의 가슴시린 방황


사람의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하죠? 안개가 짙게 끼어 있는 바다를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왠지 그의 심리상태를 알 것같습니다. 인간의 고독감을 담담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독일 낭만주의 최고의 풍경화가로 꼽히는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입니다. 저렇게 근사하게 차려입고 높은 봉우리까지 오르진 못했을 테고, 아마도 인간의 고독을 자연 속에서 방랑하는 모습으로 그려냈나 봅니다.



▲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 캔버스에 유채, 95x75cm, 함브르크미술관)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속 주인공도 그림 속 이 남자처럼 허무함과 쓸쓸함에 젖어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난다.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하고 길은 눈으로 덮여 버렸네”로 시작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보리수’도 다섯번째 곡으로 나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적인 ‘겨울 나그네’ 중에서 유일하게 몽환적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는 곡이죠.
이어서 “서리가 내 머리에 흠뻑 내려 백발을 만들었다”며 나이들어감과 죽음에 대해 노래하는 ‘백발’, 길을 걷다 무덤을 발견하고 그곳이 숙소라고 생각한 청년이 “나는 지쳐 쓰러져 죽을 지경이건만 이곳에도 남은 방이 없단 말인가?” 하며 탄식하는 ‘숙소’ 등 ‘겨울 나그네’는 총 24곡으로 채워집니다. 이처럼 겨울 나그네는 춥고 배고프고 가슴까지 시린 젊은이의 방황을 통해 우리를 깊은 겨울 속 고독한 곳으로 던져 놓습니다.


프리드리히 ‘겨울 풍경’…‘겨울 나그네’ 앨범 표지로

예나 지금이나 겨울은 몸과 마음이 추운 사람들에게 더더욱 상실감을 주는 계절입니다. 프리드리히는 겨울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 ‘겨울 풍경’을 보시죠. 멀찌감치 성당이 보이고, 눈으로 뒤덮인 벌판에는 푸르른 소나무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소나무 앞 바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남자가 있고, 그 앞에는 나무를 하는 장비가 팽개쳐 있습니다. 아마도 이 남자는 이 추운 날, 눈에 푹푹 빠지며 나무를 하러 왔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소나무에는 십자가가 매달려 있네요. 이렇게 적막한 숲 속에서 십자가를 보며 소망을 빌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잠시 쉬었다가 땔감을 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마음이 풍족해졌겠죠?
눈 덮인 풍경을 통해 절망과 희망, 차가움과 따스함을 표현한 프리드리히는 영원한 겨울 나그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앨범 표지에 프리드리히의 ‘겨울풍경’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 프리드리히 ‘겨울 풍경’ (1811년, 캔버스에 유채, 32x45cm, 런던내셔널갤러리)

눈으로 덮여 본질을 감추고 있는 설경은 눈 덮인 길을 가는 ‘겨울 나그네’ 속 청년의 마음처럼 고독합니다. 섬세하고 상처받은 사람을 위한 음악 ‘겨울 나그네’는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적이지만, 듣다 보면 이상하게도 현실에 대한 절망이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겨울 한 가운데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 그렇게 끝없는 방황을 하며 휴식처를 찾는 것이 이 땅에서 영원한 나그네인 우리들 모습이 아닐까요?


글·이지현(‘예술에 주술을 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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