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본 연극 영화

나야 할머니

아기 달맞이 2011. 12. 17. 16:26

일요드라마극장 "나야 할머니"
장르
: 단막극
배우 : 나문희, 남지현,이아현
회차 : 일요드라마극장 2회
방영일자 : 2010. 09. 26

실컷 각잡고 자려고 누워있는데 머리를 때리듯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휘청거리며 거실로 나가보면 어김없이 한국말이 다소 서툰 왠 조선족 여성이 "우체국입니다" 라고 헛소리를 지껄여댄다. 이런 전화에 짜증이 나서 욕을 한껏 퍼붓고 수화기가 깨져라 전화를 닫아버린 경험은 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이른바 보이스피싱. 목소리로 사람을 낚는거다.

그래도 우체국 운운하는 정석적인 메뉴얼의 사기는 그나마 양호하다. 귀가 어두운 노인들을 속여 손자, 손녀를 위장하며 돈도 뺏고 마음에 생채기까지 내버리는 같은 인간으로 엮고싶지 않은 부류까지 건재하고있으니. 예전 상담원 일을 했던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유달리 정이 그립고 사람이 그리운 노인들에게는 이런 보이스피싱마저 사람의 애정으로 느껴 한없이 전화를 붙잡고 자신의 얘기를 하려고하는 분들도 많다고한다. 내 얘기를 누가 좀 들어줬으면. 누가 내게 얘기를 좀 해줬으면.


일요 드라마극장 "나야, 할머니"는 이런 보이스피싱을 하나의 감성적인 에피소드로 풀어놓아 눈길을 끌었다. 개 길러줄 사람 구합니다라는 팻말을 대문 앞에 달아놓은 할머니가 앉은 자리 위에 말기암 환자를 위한 카달로그가 이리저리 널려있다. 그리고 할머니가 손을 집어 들어 쓴 볼펜의 뒷자국엔 "유서" 라는 글씨가 처연하게 새겨진다. 할머니가 선택할 단호한 결말이 짐작이 되는 와중에 갑자기 이 집과 어울리지않는 존재인 전화기가 따르릉하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수화기를 집어든 할머니에게 어린 목소리의 소녀가 이렇게 외친다. "나야, 할머니!" 라고.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못하고 더듬더듬하는 소녀에게 진한 사기의 향기가 풍기는데도 할머니는 그 전화기를 부여잡고 목놓아 울음을 터뜨린다. 꼬깃꼬깃해진 손녀딸의 사진을 떠올리며. 애정이 결핍된 사람들에게는 때론 일반인이 이해할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동도 용인이 되나보다. 이미 보이스피싱을 알아차렸음에도 할머니는 가짜 손녀를 받아들인다. 지윤이가 아닌 박은하라는 생소한 이름의 소녀에게 이미 떠나버린 손녀의 생일상을 대신해서 차려준다. 가짜 할머니에게 사기를 쳐서 받은 돈을 또 감사하다고 전화를 하는 이 이상한 손녀딸은 또 어떻고. 미역국 제대로 먹으라고 야단치는 할머니에게서 슬핏 웃음을 터뜨리는 은하 아니 지연의 모습이 정말 손녀와 할머니 같다.


드라마의 완성도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베스트극장의 위력을 자신하듯 상당히 뛰어난 만듦새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선덕여왕등으로 완벽한 캐릭터 해석력과 뛰어난 존재감을 보여주며 성인연기자와 별 다를 것이 없는 위상을 떨치는 남지현의 양심있는 사기 소녀 연기는 특유의 악바리 같은 그녀의 이미지와 그림처럼 꼭 들어맞았다.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보는 이질감 없는 사투리 연기의 나문희씨는 또 어떠하고. 공간 하나하나 섬세하게 지목하여 연출했을 빛이 들어오는 툇마루의 아름다운 한옥집과 쫓기는 위치의 조카의 상황을 보여주듯 전화기를 몇개나 갖고있는 모습등이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드라마왕국이라는 타이틀과 걸맞지않게 최근 흔들리기만하는 엠비씨 드라마에서 오랜만에 드라마다운 드라마를 보는듯해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예전 엠비씨의 단막극 무대였던 베스트극장은 신인 작가와 신인 감독 그리고 다양한 배우들의 신선한 모습을 볼수있었던 등단입문서였다. 단순히 시청률로 평가할수있는 그런 작품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물론 상업 방송국으로서의 시청률과 수익 추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때론 전국민에게 전파를 선도하는 방송국이라면 이런 양질의 드라마를 시청자들이 즐길수있는 기회 역시 선사해야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