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춘 /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1. 차나무의 특징과 종류
차나무는 동백과에 속하는 다년생 상록 관목으로 종자식물이며 반음반양에서 잘 자라는 음성 식물이다. 초의 스님은 동다송에서 爛石과 계곡에서 자란 차가 가장 좋다고 하였다. 차나무는 9~11월에 흰색의 꽃이 피며 실상화(實相花)라 하여 꽃과 열매를 함께 볼 수 있다. 지구상에는 대략 600종의 차나무가 있다. 열대‧ 아열대‧ 난대‧ 온대지방에 고루 분포 되어 있으며 아시아에는 대략 10종이 분포 되어 있고 우리나라에는 대략 6종이 자라고 있다. 주로 온대지역에서 자라는 소엽종과 열대지방에 널리 분포 되어 있은 대엽종으로 나눌 수 있다. 잎이 작은 소엽종은 주로 녹차을 만드는데 쓰이고 잎이 큰 대엽종은 오룡차나 보이차 혹은 홍차용 등 발효차를 만드는데 이용된다. 우리나라의 차 수종은 대개 소엽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개량한 야부기다종이 보성, 강진 광주 지역에 심어졌으며 보성일원의 다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차나무의 북방한계는 북위 33゚~35゚ 전라북도 김제 남원이며 제주도에까지 넓게 분포 되어 있으며 차의 주요 생산지는 보성을 비롯하여 강진 광양 구례 해남 하동 산청 등 여러 지역에 고루 퍼져 있다.
2. 차의 분류
차는 차나무에서 채취한 어린잎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써 음료의 총칭이다. 차 잎의 채취시기에 따라 우전차, 곡우차 또는 명전차라 하며, 조차, 만차 , 첫물차 ,두물차 ,세물차 혹은 봄차 여름차 가을차라고도 한다. 또한 차 잎의 크기에 따라서 세작 ,중작, 대작 등으로 분류하며, 차나무의 생육 환경과 방법에 따라 죽로차, 암차, 야생차, 재배차등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것은 차품을 나타내는 차의 별칭일 뿐이다. 차 품의 분류는 제다의 방법에 따라 불 발효인 녹차가 있고 차잎의 살청 방법에 따라 덖은차 찐차로 분류하며, 반 발효차인 오룡차 계열과 완전 발효 형태인 홍차 ,보이차, 흑차가 있으며 차 품의 형태에 따라 덩어리로 된 단차, 각차와 잎차 형태로 된 산차가 있고 가루로 된 말차가 있다.
3. 한국차문화의 특성
1) 한국 차의 기원
차는 물에서 연유되었으며 사람들의 인지가 점점 발달 되면서 몸에 이로운 물질을 첨가하여 식물의 잎이나 꽃, 열매, 뿌리를 이용하여 약과 식음료로 이용하였다. 단군시대 토민들 사이에서 백두산 산정에서 자생하는 석남과 철쭉 종류을 이용하여 백산차를 만들어 마셨다는 것은 초기 차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원료의 변천에 따라 송차, 구기자차, 당귀차, 쑥차 등 여러 형태로 변형 되었다. 원래 다양한 형태의 마실 거리를 즐겼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종류의 차를 응용, 발전시켜 나아갔을 것이며 차나무의 어린잎을 채취하여 차로 응용한 시기는 삼국시대 이후라 할 수 있다.
2) 한국 차 문화의 전래
문명은 자생성과 모방이라는 고유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생성과 발달에 타 문명의 교류를 수반하며 상호 전파와 수용을 통해 그 민족의 풍토성과 기호성이 함의된 개별요소로써의 문화적인 양태로 점진적인 발전과 고유성을 찾아 간다. 따라서 한국 차의 발달에는 타 지역의 문화적인 모방과 교류를 통하여 토착적인 문화와 융화 되면서 한국적인 특성과 고유색을 가진 차 문화를 이룩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음차 문화는 고대로부터 일정한 형식이 있었을 것이며 차나무를 이용한 음다의 풍속은 토착적인 차와 전래차가 있었다. 문화의 속성상 다른 문화를 흡수하여 우수한 문화로 점진적인 발전을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차 문화 전래설은 인도로부터 유입되었다는 설과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이다. 인도로부터의 유입설은 가야국 수로왕 때 남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 왕후가 불상과 불경 차를 가지고 왔다는 설로 김해 지역에 차와 관련된 지명과 아샘종 차나무가 널리 분포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개연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3) 한국 차 문화의 전개
단군시대의 백산차는 단순한 음료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가락국 거등(199) 때부터 제물로 차가 사용되었으며 신라에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다하고 신문왕(681~692)때 설총이 지은 화왕계에
....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한다.
膏 粱 以 充 腸 茶 酒 以 淸 神...
라 하였고 경덕왕(742~765) 때 충담선사가 중삼 중구일(삼월삼일, 구월구일 )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들은 차가 신에게 올리는 귀중한 제물이었으며 정신을 맑게하는 물질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덕왕19년(760)월명대사가 도솔가를 지어서 두 해가 나타나는 괴변을 물리친 것을 가상하게 여겨 품차 일습을 하사 했던 기록으로 보아 차가 왕의 귀중한 하사품이었고 삼국사기 탑상조 대산오만진신에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이 보천암과 암자를 짓고 골짜기 물을 길어 차를 다려 마셨다하며 조선시대 이곡의 동유기에
경포대를 올라가니 대는 옛날 그대로인데 정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근래의 호사가들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옛 신선의 석조가 있는데 대개 차를 다리던 도구이다. 한송정은 사선이 놀던 곳으로 석조와 석지가 우물곁에 있는데 또한 사선의 다구이다.
라 하니 차가 수행에 혼운을 깨게 하고 신선들의 양생에 이용되었으며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면서 차를 마셨다는 방증기록이다. 백제는 신라보다 일찍 불교를 받아 드렸으며 일찍이 양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하였기 때문에 차 문화의 유입이 다른 나라에 비해 빨랐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와 교류했던 양나라는 차가 나는 지역으로 4세기경 파, 촉 지역에 이미 음다 풍속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차를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차의 유입시기를 알 수 있는 문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조에 의하면
흥덕왕3년(828) 12월 겨울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받치니 문종이 인덕전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차등을 두었다. 입당사인 대렴이 차씨를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興德王立.....三年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鱗德殿 宴賜有差 入唐 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이라 하였다.
당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차의 유입에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는 기록이다. 그 당시는 이미 귀족층이나 수행승 사이에 음다 풍속이 널리 퍼져있어서 대렴이 차씨를 가져 올 수 있을 만큼 차사는 큰 관심 거리였다. 이 시기는 초기 선종의 유입 시기와 맞물려 있고 신라 말 많은 수행승과 유학생이 당에 가서 선진문물을 받아 들였던 시기이다. 8세기 육우의 다경이 저술된 이 후 난만한 차 문화가 꽃피우던 시기로 선종에서는 제다가 선 수행의 한 방편으로 인식되었다. 구산선문을 개창했던 도당 수행승의 대부분이 양자강 이남 지역에 집중해 있어서 선종의 차풍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귀국 하면서 차를 함께 가지고 왔던 것이다. 신라 말 수행승이 강남지역에 집중되었던 이유는 마조도일의 주석지가 강서이었으며 그의 제자 서당 지장이 선풍을 날렸던 지역도 강서 남창이었다. 따라서 선종의 유입과 관련하여 본다면 한국 차가 가장 영향을 받은 지역은 강서지역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이미 왕실에서 귀족층의 음다 풍속이 만연하여 있었으며 불교의식인 팔관회나 수륙제에 차가 공양되었고 송의 무역상선이 이시기에 맞추어 배를 출항시킬 만큼 국가적인 행사였다. 고려 성종 원년에 최승노가 올린 상소에 '공덕제에 즈음하여 왕이 친히 차와 보리를 갈으시니 심히 성체가 피로할까 염려 된다.' 고 하였고 송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1123)에 '무릇 연회에는 조정에서 차를 다린다. 은하로써 덮고 천천히 걸어서 차를 올린다. 차가 다 돌려졌다고 하면 마실 수 있는데 차가 식어서 마실 수 없었다.' 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다사가 이미 성행하여 국빈이 왔을 때 차를 대접하는 의식이 구체화되었다.
또한 왕의 하사품에 납면차와 용봉단차를 하사한 기록이 많으므로 이미 차가 귀중품으로 인식되었다. 고려 때는 이미 차가 만들어져서 유차, 납면차, 조아차, 노아차 등이 생산되었고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묘지명에
'요나라 천우황제가 경전과, 차, 향, 비단을 보내서 결연의 증표로 삼았다.(大遼 天佑皇帝 再宇經籍茶香金帛 以結信緣)'고 하였으니 차가 결연의 증표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는 송의 차문화가 극도로 발전했던 시기였고 고려 또한 화려하고 의식적인 차 문화를 구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차 문화는 불교와 함께 외형적으로는 쇠퇴 되어서 음다 풍속이 점점 줄어들었고 기피하는 양상을 띠기도 하였으나 궁중에서는 차시같은 제도가 남아 있어서 차를 마시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상곡 이상선이 고공도공을 시켜서 창 밖에서 차를 달이라 하였다. 찻물이 새어 나아가서 다시 다른 물을 첨가하였다. 이공이 맛을 보고 이 차에 너는 두 가지 생수를 첨가 했구나.라고 했듯이 한국 사람은 차를 다루는 일에 정밀성과 치밀한 차 맛을 알 수 있을 만큼 차에 대한 인식이 높았다. 후대로 오면서 차를 마시는 계층이 문사이거나 연경을 내왕했던 계층 산간 수행자들로 점점 범위가 줄어들었다. 차가 나는 산간지역에서는 감기약, 이질 등 병을 치료하는 약품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격조와 아취는 상대적으로 높은 경지를 가지고 있었다. 김시습, 서거정, 김수온, 김종직 등 많은 조선 초기 문사들은 고상한 아취로 차를 마셨고 차를 고아한 벗으로 인식하였다. 조선 후기 일부 실학파들에 의해 차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었으며 청대의 걸출한 학자였던 완원의 태화쌍비관에서 용봉승설을 대접받고 차의 깊은 이치를 깨달은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별호를 승설도인이라 칭할 만큼 차의 높은 인식자요 감식자였다. 일찍이 추사는 추사체를 완성할 만큼 조선후기 대학자이며 예술가였다.
초의 의순은 조선후기 선승으로 선과 시 그림에 능했던 대 선승이었으며 정조의 부마인 홍석주의 요청에 의해 쓰여진 동다송은 한국차의 우수성과 특성을 칭송하였고 한국차가 맑고 시원한 차품으로 발전시켰다. 초의 의순은 자신이 직접 차를 만들고 물을 감별하였으며 수행과 일치된 정신세계의 차문화를 이룩하여 한국 차문화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하였다. 초의 의순에 의해 한국의 차문화는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하였다. 강진에 유배 되었던 다산 정약용은 아암 혜장과의 교류로 인하여 차를 알게 되었고 초의 의순이 흠모하는 대학자로 강진을 떠나면서 후학들과 다신계를 맺어 차에 대한 깊은 인식과 연구를 지속했던 실천가요 조선후기 실학자였다. 이러한 차에 대한 인식자들에 의해 한국의 차 문화는 다시 꽃피울 자양분을 길러내었다.
4) 음다와 제다법의 변천
신라시대의 음다법으로 진감국사 대공탑비에 '당나라 명차로써 공양하는 자가 있으면 섶으로 돌솥에 물을 끓여 가루를 내지 않고 다린다. (有以漢茗 爲供者則以薪爨石釜不爲屑而煮之)' 라하여 이 당시 음다법은 단차를 불에 구어 가루로 만들어 죽처럼 끓이는 방법이었으나 수행자였던 진감국사는 번거로움을 피해 덩이차를 끓은 물에 넣어 다려 마셨다는 것이며 충담사가 경덕왕에게 차를 받쳤을 때 앵통에 다구가 가득했다는 기록은 이동할 수 있는 형태의 용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당시에 음다 풍속은 시문에 나타나 있는데 돌솥에 차를 다린다는 표현이 많고 점다, 팽다, 자다, 철음 등 여러 가지 차를 마신 흔적이 많고 고려 성종 원년 최승노의 상소에 차와 보리를 직접 왕이 갈았다는 표현에서 고려의 음다는 차에 보리를 섞어 마셨다.
익제난고에 송광화상이 신차를 보냈기에 시를 보낸다는 시에
솔바람 부는 듯 돌솥에 물 끓는 소리
자기 잔에 맴도는 무늬 꽃망울을 토하는 듯....하다 하였으며
이자의 파한집에
가는 조명은 난봉의 그림자를 머금었고
이향 나는 새로 간 차 말은 자고새의 무늬...
라고 표현한 것은 모두 단차를 갈았을 때의 모습과 차 말을 뜨거운 물에 넣고 저을 때 유색의 꽃 같은 포말이 일어남을 표현한 것이다. 육우 다경의 차를 마시는 법에서 '뜨거운 상태에서 이어 마셔야한다. 무거운 것은 아래에 엉기고 정영한 것이 위에 뜬다. 만약 차가워지면 정영한 기운이 내려가서 없어진다.'라는 음다법이 있으므로 차의 온도는 뜨거운 차를 마셨을 것이다. 동국이상국집에 운봉에 머무르는 노규선사가 조아차를 얻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라는 시에 '수고롭게 차를 따서 단차를 만들어 남보다 먼저 임금께 올리네' 라 한 것을 보면 승려들이 단차를 만들어 조공품으로 받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차를 만들고 있었다. 고려도경에 토산차는 쓰고 떫어서 입에 댈 수가 없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맑은 차를 마셨던 조선에서는 산차류인 잎차를 마셨으며 탕법도 전대와 다른 양상을 띄고 있었다. 산차의 제다법은 차잎을 따서 솥에 덖어서 다시 비비어 다시 은근한 솥에 말려서 수분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끓는 물에 차잎을 넣고 우려 마시는 방법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렇게 덖어서 만든 차에 끓은 물을 부어 우려지면 잔에 고루 따라 마시는 방법이었다. 물자가 귀했던 산간 지역 사찰이나 민가에서 차잎을 쪄서 단차처럼 만들어 벽에 걸어 두었다가 감기에 걸리면 생강을 넣고 끓여 마셨다.
5) 한국 차문화의 특성
한국은 유구한 차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사람이 지향했던 가치인 맑고 담백한 차품과 격조를 가진 차 문화를 가지고 있다. 순수한 정신을 지향했던 민족답게 지형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성보다는 단일성을 고수하여 궁구한 내면의 가치를 지닌 고유성을 가진 차 문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차 문화가 지향한 가치는 궁극적으로 예술이나 정신수양의 지향점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으며 차가 단순한 물질에 불과하지만 차의 덕성이 검박한 군자와 같다고 인식하였다. 한국인의 기질이 담박한 것을 좋아하여 차품에 있어서도 시원하고 정갈하고 담백한 것을 즐겼다. 문화의 고유성은 그 민족이 처한 자연 환경을 닮아서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풍토성에서 칼칼한 차색과 맛, 기운을 중시하였다. 차는 처음에 인간의 생활에 약용과 음료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나 사람들이 지향하는 높은 이상의 고 가치에 차가 하나의 맑은 덕성을 인간에게 주는 물질로 인식하였으며 차의 생리 중에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덕성을 귀하게 여겼다. 선종과 결합된 차는 더욱 더 차가 맑은 기운을 주는 물질로써 차가 선미와 같다고 여겨 다선일미라는 최고의 가치에 두었다. 따라서 한국의 차는 풍토에 알맞은 뜨거운 차를 선호하였고 차빛에 있어서도 너무 넘치지 않는 담황색에 녹빛이 은근히 감도는 탕색을 최고의 차색으로 여겼다.
탕법에 있어서도 간결하고 아취 있는 담박한 찻 자리를 귀히 여겨 동다송에서
명월로 촛불을 삼고 벗을 삼아서
백운을 자리로 삼고 병풍도 만든다.
대나무 소나무 소리 모두 서늘하다.
맑고 서늘한 기운 몸을 맑게 하고 마음을 깨우는 구나
오직 백운과 명월 두 객만을 허락하니
도인의 고상한 자리 이것이 최고로구나
라고 하여 최고의 격조 있는 자리와 벗을 자연에 두었다. 이는 물아가 일체되는 아름다운 목표였다. 초의 의순에 의해 구현된 한국 차의 전형은 녹차를 선호하지만 녹색을 최대한 제거하여 맑고 시원하며 기미가 있는 제다법이였으며 온난 다습한 기후에 알맞게 뜨거운 물에 차를 우려도 차의 향과 빛 ,맛과 기운에 손상이 없는 황녹색의 차품을 전해 주었다. 초의의 다법은 응송 박영희에 의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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