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연극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9월 1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어느 날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그냥 길을 나서는 데이지의 뒤를 호크가 쫓아간다. 데이지는 결국 호크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올라탄다. 데이지는 호크의 인간적인 모습에 점차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두 사람은 친구로 남게 된다. 두 주인공의 다른 피부색으로 직감하듯 연극의 주제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지속되는 1948년부터 73년까지 25년간의 시간여행이 펼쳐진다. ‘노인들의 세상은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연극에서 신구와 손숙 두 노역 배우의 하모니는 인상적이다.
우리에게 흑백 간 인종차별 문제는 경험 밖의 일이어서 언뜻 ‘남의 일’ 같지만 이해와 관용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 본다면 연극은 큰 울림을 준다. 노년 연기의 느린 템포나 어쿠스틱한 소박한 음악, 전환 없는 무대 등 연극은 아날로그적이다. 1시간40분의 러닝타임이 마치 어느 순간 정지된 화석의 시간으로 묶여 있는 것 같다. 연극은 희곡 텍스트를 충실히 무대에 재현한다. 시간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영화 줄거리의 전개 방식과 똑같다. 연출(윤호진)은 인물과 내용에 대한 해석은 배제하고 정공법을 택했다. 흑인 분장을 한 신구는 말투와 몸짓까지 흑인 흉내를 낸다. 괴팍하고 깐깐하며 도도한 유대인 백인 할머니 손숙도 마찬가지다.
이런 외적 모습은 TV 드라마와 연극, CF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중후한 스타로 각인된 그들의 이미지와 대비돼 순간 헛웃음을 줬다. 하지만 대가다운 순발력은 연극이 진행되면서 관객을 몰입시키는 저력으로 살아났다. 둘 사이 자잘한 갈등을 보면서 관객을 시종 미소 짓게 하는 것은 순전히 두 사람의 공이었다.
연극의 배경은 1940~70년대 미국 남부 조지아주다. 여전히 흑백 인종차별이 상존하던 시대요, 지역이다. 기본적으로 흑인 호크에 대한 데이지의 차별이 바탕이지만 연극에서는 데이지 할머니가 겪는 차별도 도드라지게 처리했다. 데이지 또한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차별의 대상인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호크의 처지와 닮은꼴이다.
데이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고 부자이면서도 아닌 척 애를 쓴다.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은 병적일 정도로 강하다. 30센트짜리 통조림이 없어졌다고 호크를 의심하고 닦달하는 그녀다. 이처럼 사소한 듯이 툭툭 건드리는 설정이지만 데이지는 차별에 민감한 유대인의 심성을 드러낸다. 극 중 유대인 교회가 백인결사체(KKK)에 공격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극 중 인종차별에 대한 묘사는 중층적이다. 한쪽은 흑백 차별, 다른 한쪽은 백인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차별이다.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호크를 도둑으로 몰거나 바보 같은 어린애로 취급하는 데이지의 심리는 주류 백인사회에 편입하지도 못하는 비주류 유대인의 한계를 대변한다.
사회로부터 겪는 이런 공통의 상실감이 결국은 호크와 데이지를 진심으로 만나게 한다. 호크의 인간적이고 성실한 모습을 보고 데이지는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까막눈인 호크를 위해 글을 배울 수 있는 책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면서 “난 크리스마스 선물은 안 해요. 아이들 가르치다 남은 책이 있어 주는 것 뿐이에요”라면서 짐짓 냉정한 척하지만 이미 속마음은 그게 아니다.
극 중에서는 데이지의 이런 심적 변화를 극명하게 대변하는 인물로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한 마틴 루서 킹이 등장한다. 작품의 배경과 동시대적 인물인 킹 목사의 만찬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데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야!”
연극에서 이런 ‘마음의 변화’ 못지않게 주인공 신구와 손숙의 연기 변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월에 따라 고개와 허리는 차츰 땅바닥을 향하고, 발걸음은 아장아장 아기를 닮아 간다. 목소리도 점차 힘이 빠져 간다.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영화 속 명연기의 주인공 모건 프리먼과 제시카 탠디의 한국판으로 손색없다고 할까. 둘의 연기에 20여 년에 걸친 세월의 흐름이 오밀조밀하게 박혔다.
손숙은 호크에게 겉으론 차갑지만 속은 안 그런 연약한 데이지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호크 역의 신구는 데이지의 까칠함을 넉살 좋은 웃음으로 받아넘기는 넉넉함으로 무대를 감쌌다. 호크가 치매에 걸린 데이지를 찾아가 케이크를 손수 떠먹여 주는 장면은 극장 전체를 따뜻한 온기로 채워 주는 피날레의 백미다. 연극은 20여 년의 시간 흐름 효과를 암전으로 처리했다. 9월 1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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