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취 두릅 누리대 산마늘…, 봄을 낳은 산
곰배령 가는 숲길엔 들꽃이 별처럼 ‘총총’
최상의 여행 시기는 언제인가? 두말 할 겨를이 없다. 지금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국토는 어딜 가도 덜 붐비고, 더 아름답다. 오뉴월 산과 들엔 오감을 두루 만족시켜주는 풍경이 널렸다. 빛깔도 소리도, 향기도 입맛도 촉감도 남다른 때다. 비 와도 좋고 바람 불어도 좋다. 내릴수록 싱그럽고 불수록 향기로워진다. 나그네의 눈을 더 부시게 하는 것은 꽃보다 잎이다. 백 가지 나무에 백 가지 빛깔의 새잎들이 구름처럼 우거졌다.
숨어 살기 알맞은 외딴 산골 ‘삼둔 사가리’
새로 돋아난 잎사귀들 향기 진동하는 강원도 산골 진동계곡으로 간다.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의 청정 계곡이다. 점봉산에서 발원해, 눈이 많기로 이름난 설피밭마을 지나 갈터마을에 이르는 약 20㎞ 길이의 깨끗한 골짜기다. 숨어 살기 알맞은 외딴 산골을 말할 때 흔히 나오는 ‘삼둔 사가리’(생둔·월둔·달둔·아침가리·연가리·적가리·명지가리)의 연가리·아침가리·적가리가 이 물길에 딸린 골짜기다.
계곡 하류쪽 진동1리는 갈터(추대)·꿩밭(꽁바치·치전)·안말·두무터(두무대)·진흑동(진흙리) 등 다섯 마을로 이뤄졌다. 산 좋고 물 좋으니 마을마다 펜션·민박집들이 들어섰다. 89가구 중 귀농인 등 외지인 가구가 40%를 넘어선다. 골짜기마다 물소리에 새소리·꿀벌소리 소란하고, 한꺼번에 터져나온 매화·산벚꽃·돌배나무꽃 향기가 어지럽다.
그중에서도 진하고 오래 여운을 남기는 향기가 있다. 오월 산골 여행길에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조상 대대로 뜯어먹고 솎아먹어 온 연초록 새순들의 향기다. 풋풋하고 부드럽고 텁텁하고 쌉싸름한 갖가지 산나물들이, 맑은 물길과 총천연색 산길을 거느리고, 입맛·살맛 떨어진 도시민들을 기다린다.
봄이면 진동리 일대 야산은 두릅·누리대·곰취·나물취·산마늘 등 야생 나물밭이 된다. 특히 곰취는 발에 밟힐 정도라고 한다(물론 야생 산나물밭의 외부인 출입은 금지된다). 산도 나물밭이요, 들도 나물밭이다. 주민들 대부분이 비닐집과 노지 밭에서 나물을 키운다. 올해는 이상기온으로 산나물 제철이 보름 정도 늦어졌다. 예년이면 4월 말이면 끝났을 얼레지와 두릅이 아직도 취나물류와 함께 쏟아져나오고 있다.
산비탈과 들판의 어지간한 밭들은 다 주민들이 약 치지 않고 기르는 나물밭이다. 비닐집 나물밭도 있고 노지 나물밭도 있다. 웃꿩밭·아랫꿩밭·두무터·안말 일대에 재배 나물밭이 들어서 있다. 원주민도 기르고, 귀농인도 길러 짭짤한 소득을 거둔다. 곰취가 가장 많고 산마늘·나물취·누리대·두릅·곤달비가 뒤를 잇는다.
축제 첫날 1천만원 어치 산나물이 동이나 멱살 잡히기도
산과 들이 나물밭으로 바뀐 것은 최근 2~3년 사이. 이전까지 진동리는 오염되지 않은 청정 골짜기의 마을, 야생화 깔린 숲길이 눈부신 점봉산 곰배령 들머리, 눈이 많아 겨울엔 드나들기 어려운 오지마을 등으로만 인식돼 왔다. 주민들이 산나물 판로에 변화를 꾀하면서, 이 마을은 봄이면 도시민들이 나물 향기를 찾아 몰려드는 청정 산채마을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8년 전 최성규(38·진동산채영농조합 대표)씨가 서울에서 진동1리로 귀농하면서 마을에 변화가 생겼다. 최씨는 주민들이 채취한 산나물이 면 소재지의 약초상 대여섯 군데로 값싸게 넘겨지는 것을 보고 판로를 다양화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중간상들은 4㎏에 1만2000~1만5000원에 사들여 관광객들이나 주민들에게 3만~4만원씩에 되팔더군요.” 주민들을 설득해 먹을거리·볼거리·즐길거리를 묶어 도시민들을 위한 산채체험마을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하고 일을 벌였다고 한다. 곰취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산나물축제를 열기로 했다.
처음, 마을 어르신들은 “제 장삿속이나 챙기려는 속셈일 것”이라며 반대했다. 마을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도 없이 설득해봤지만 “외지 젊은 친구가 들어와서 뭘 안다고 축제를 열겠다는 거냐”며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6년 전 벌인 첫 축제 첫날, 애써 준비해둔 산나물 1000만원어치가 다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르신들 생각이 바뀌어갔다. “이 마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와 산나물 사가는 모습은 처음 봤다”며 한분 두분 나서 일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이틀간 마련한 축제는 순탄치 않았다. 최씨가 말했다. “준비한 산나물이 첫날 다 팔려나가버려, 이튿날이 문제였어요. 늦게 찾아온 손님들이 ‘축제 한다면서 왜 산나물이 하나도 없냐’며 거세게 항의를 해왔어요. 산나물을 내놓든지 기름값을 내놓든지 하라고 아우성이었지요. 멱살 잡혀 끌려다니기까지 했죠.” 집으로 택배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원하는 47명의 주소를 받아뒀다가 며칠 뒤 채취한 나물을 보내주고서야 매듭됐다.
곰취 농장 분양…산촌문화관 공사 한창
이젠 해마다 늘어나는 방문객을 맞기 위해 귀농인·원주민 가리지 않고 일손과 아이디어를 보탠다. 지난해부턴 방문객들에게 ‘곰취 농장’ 분양도 시작했다. 어린 곰취 100포기 모판을 나눠줘 산자락에 심게 한 뒤, 해마다 자유롭게 채취해 가도록 한 것이다. 폐교를 이용해 식당·체험관·숙박시설도 만들고 각종 산나물장아찌와 곰취찐빵·오미자액·복분자액 등을 만드는 산나물 가공공장까지 마련했다. 특산물판매장·식당·민박시설이 들어설 산촌문화관 공사도 짓고 있다.
경로당에 모여 앉아 돼지고기뼈감자탕에 소주를 자시던 어르신들 말씀이 한결같다. 15년 전 귀농한 강이형(80)씨, 10년 전 들어온 이종기(87)씨, 그리고 4대 선조 때부터 꿩밭·갈터에서 살아오고 있다는 엄준수(79)씨가 고기를 향긋한 곰취에 싸들고 잔을 높이 들었다. “원래 살던 주민이구, 귀농인이구 간에 다 힘을 보태야 마을이 잘되는 거여. 건배!” 마을 남녀 어르신들은 행사가 벌어지면 공예품 만들기, 음식 장만하기 등에 참여해 일손을 돕는다. 마을의 유일한 가게인 갈터쉼터 아주머니도, 두무대 할머니들도 불 담당, 음식장만 담당 등으로 돌아가며 참가한다.
두무대(두무터) 뒷산의 전망 좋은 산자락에 대규모 노지 산나물밭이 있다. 약을 치거나 비료를 주지 않고 수시로 김을 매주며 곰취·나물취·곤달비·산마늘을 기른다. 비탈밭에서 곰취를 뜯던 이봉섭(60)·이만섭(56) 형제가 산 능선에 깔린 밭을 가리켰다.
“저기 밭들이 다 곰취밭이여, 남들이 곰취는 노지에서 안된다구들 그렇게 얘기하드만, 여길 봐요, 얼매나 잘 자라나.” 비닐집 재배만 해오다가, 옛날 밭에 곰취를 심었던 기억을 떠올려 대량 노지재배를 해 성공했다고 한다.
옛 두무터 일대 곰취밭들은 60년대까지 화전민 20여가구가 밭을 일구고 살던 곳이다. 이곳 풍경은 조만간 다시 바뀔 전망이다. 진동계곡 주변을 지나는 춘천~양양 고속도로 터널공사 때 나오는 돌과 흙을 버리는 사토장이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진동계곡으로 흘러드는 작지만 깨끗한 골짜기도, 주민들이 해마다 마을의 안녕을 빌며 제를 올려오고 있는 계곡 물가의 제당도, 옛 마을터의 500살 소나무도 사라질 위기다. 최성규씨는 “군유지에 사토장이 들어서는 걸 대놓고 반대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라며 “매립한 뒤 계단식 밭이 만들어지면 다시 산나물을 재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톡 쏘는 방동약수 한 잔에 온몸이 부르르
진동계곡 여행길에 아름다운 곰배령 가는 숲길을 걸어볼 만하다. 강선마을에서 곰배령에 이르는 5㎞의 울창한 숲길이다. 진동계곡 최상류다. 우거진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숲길을 따라 늦봄부터 가을까지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별처럼 뿌려진다. 압권은 고개 위의 널찍한 초원이다. 거센 바람이 나그네들을 휘감는 곳이다. 이 초원에 둥근이질풀꽃·동자꽃·노루오줌꽃 등이 피어나 장관을 이루는 시기는 7~8월이다.
그러나 이 일대는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이어서 탐방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다. 국유림관리소 기린경영팀(033-463-8166)에 전날까지 탐방 신청을 해야 하고, 하루 인원도 50명으로 제한한다. 수~일요일에만 허용하고 단체탐방은 안 받는다. 주말의 경우 이미 6월까지 예약이 끝났다. 7월 예약은 6월20일부터 받는다(주말 탐방은 예약이 금세 끝나므로 서둘러야 한다). 미리 연락해 평일 중 여분이 있는 날을 골라 탐방에 나서는 게 좋다. 곰배령으로 오르는 숲길 들머리에 안내소가 있다. 3명의 등산안내인이 대기한다. 주중엔 오전 9시·10시 2회, 토·일·공휴일엔 8시·9시·11시 3회 탐방객을 인솔해 숲길 탐방에 나선다. 월·화요일은 입산 금지다.
진동리 들머리 방동리엔 방태산휴양림과 톡 쏘는 물맛을 자랑하는 방동약수가 있다. 갈터마을 진동산채 옆 도로 가에 작은 빗돌을 보호하는 비각이 있다. 빗돌은 한 주민의 공덕을 칭송하는 공덕비다.
200년전, 나라에서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거둬 이곳 주민들이 갈수록 살기 어려워졌다. 잡은 물고기에도 세금을 매겼는데, 물고기의 사투리 명칭에도 세금이 붙어 이중삼중으로 세금을 착취해갔다. 엄경홍 등 12명이 나라에 세금 감면을 촉구하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 그러나 가는 도중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고 한양에 도착하니 엄경홍 혼자 남았다고 한다. 엄경홍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관리들을 상대로 끝까지 꿋꿋하게 세금 감면 촉구 주장을 펼쳐, 결국 세금을 절반으로 줄여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공적을 기려 이곳에 공덕비를 세웠다. 글씨는 마모돼 잘 알아볼 수 없다. 마을엔 지금도 엄경홍 선생의 증손 엄만수(79)씨 등 엄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올해 진동계곡 산나물축제는 22~23일 갈터마을 농촌체험장에서 열린다. 산채비빔밥 만들어 먹기, 취떡 떡메치기, 통나무 멀리 던지기, 산나물 채취 산행, 경품 추첨 등이 진행된다.
인제/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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