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설동 ‘풍물시장’에 가면 건질 수 있다
서울풍물시장 1층 초록동은 온갖 진기한 물건들이 즐비하다. 추억을 부르는 것부터 호기심을 간질이는 것까지 가게마다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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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을 맞아 준비한 옛날 과자점(4일자 food&), 과거로의 여행(7일자 week&)에 이어 추억을 찾아가는 시리즈는 계속된다. 이번엔 ‘추억쇼핑’이다. 황학동 시장을 기억할 거다. 청계천8가에 자리 잡은 옛날 물건부터 진기한 물건까지 없는 게 없었던 시장. 이 시장에선 탱크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없는 거 빼놓고는 다 있는’ 시장이었다. 청계천 공사가 시작되면서 떠돌던 이 시장은 2년 전 신설동 2층짜리 건물에 ‘서울풍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예전 황학동 난전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엔 추억의 더미만큼은 넘쳐나고 있다. 이틀 동안 돌아다녔지만 돌 때마다 ‘새로운’ 낡은 것들이 불쑥불쑥 눈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낡은 것 하나를 장만하고 싶다면 가봐야 할 곳이다.
글=이정봉 기자
시장을 돌기 전에 일단 이 시장의 구획을 알아야 한다. 1층엔 주황동(의류)·노랑동(생활잡화)·초록동(공예·골동품), 2층엔 파랑동(의류)·남색동(생활잡화)·보라동(취미용품)이 있다. 각각 100~200개의 점포가 모여 있고 점포마다 고유번호가 있다. 식당(빨강동)은 1·2층에 모두 있다. 쇠고기국밥·빈대떡 등 장터 음식을 판다. 그런데 때로는 노랑동에서도 골동품 상점을 만나는 등 엄격하게 구획 지어진 것은 아니다.
골동품 모아 둔 초록동, 물어가며 즐겨야
정문으로 들어서 오른편에 있는 초록동은 볼거리가 가장 풍성하다. ‘뭐에 쓰는 물건인고’ 하고 물어봐야 할 정도로 짐작은 가나 잘 알지는 못하는 물건들이 즐비하다. 못난이 삼형제 인형부터 1950년대 시발택시 번호판, 축음기, 제니스 진공관 라디오에다 6·25 당시 낙동강전투 전사자의 총알 구멍 난 철모까지 판다.
서울풍물시장 초록동에 진열된 먼지 앉은 옛 물건들이 외국인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곳의 물건들은 전시된 게 다가 아니다. 창고에 틀어박혀 있는 물건도 많기 때문이다. 월남전 훈장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 등도 그런 창고 물건 목록에 있다. 그래서 점포 주인들에게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는 게 좋다. 또 구하고 싶은 물건을 주인에게 물으면 수소문해 구해주기도 한다. 이런저런 것을 묻다 보면 평범한 물건들도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주황동엔 샤넬·구찌·버버리도 있네
왼편 주황동의 볼거리는 구제 명품 점포들이다. 샤넬·구찌·페라가모 등 명품 중고 가방 점포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간혹 새것이나 다름없는 중고품이 나오는데 이럴 때는 인터넷 쇼핑몰이나 의류 소매점 상인들이 발 빠르게 찾아와 사가는 경우가 많다. 모두 구형 명품이지만 이곳 상인들이 수선하고 다듬어서 ‘구제’하기 때문에 모양새는 그럴 듯하다. 1만원부터 30만~40만원짜리까지 다양하다. 명품 중고 구두점(62호)도 있다. 뒷굽이 닳아서 수선된 것도 있지만, 얼마 안 신고 버려 밑창의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경우도 꽤 있다. 페라가모·발리·아테스토니 등 꽤 알려진 브랜드가 수두룩하다. 구두의 상태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만 10만원 정도면 괜찮은 구두를 장만할 수 있다. 버버리·닥스 등의 옛 트렌치 코트(40호)를 팔기도 한다. 버버리 코트는 5만원 정도.
1층 주황동 40호에 걸려 있는 트렌치코트. 버버리·닥스 등 구제품이 5만원 정도에 나와 있다.
의외의 물건이 툭툭 튀어나오는 노랑동
지갑·선글라스·식기 등 생활잡화를 파는 노랑동에도 희한한 옛 물건들은 툭툭 튀어나온다. 58호에는 50년대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사용했던 손풍로, 전쟁 전후 피피선(군용 야전전화선)을 엮어 만든 장바구니를 판다. 가격은 5만원 정도. 모두 이곳 주인이 땅끝마을부터 강원도 산골까지 트럭을 타고 다니며 수집한 것이다.
레포츠용품·액세서리·군용물자 등 생활잡화를 파는 1층 노랑동과 2층 남색동, 취미용품을 파는 보라동도 샅샅이 훑다 보면 의외의 곳에서 구경거리가 나타난다. 500만원짜리 호랑이 가죽이 떡 하니 걸려 있기도 하고, 진주를 품은 조개 껍데기가 나오기도 한다. 도자기를 취급하는 곳에서 예스러운 카메라를 팔기도 하고 악기들이 잔뜩 늘어서 있는 곳에 커다란 검이 걸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둘러볼 때는 호시우보의 자세가 좋다. 탁자 위에 있는 것보다 구석에 처박힌 게 더 값진 경우가 많다. 정성태 상인 회장은 “얼마 전에는 조선 숙종임금의 친필이 들어왔었는데 구석에 걸어놨는데도 이를 알아보는 손님이 있더라”고 했다.
서울풍물시장에 가려면
서울풍물시장은 큰 도로에서 골목을 따라 300여m 들어가야 한다. 지하철 2호선 신설동역 9번 출구나 10번 출구에서 5분 거리다. 가는 길목에 표지판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는 있다. 120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는데, 물건을 살 경우 1시간30분간 무료다. 10분당 300원. 오전 10시에 열어 오후 8시(동절기는 오후 7시)에 문을 닫는다. 하지만 정오가 지나 문을 여는 가게가 꽤 있어 점심을 먹고 느긋이 나가 둘러보는 게 좋다. 매달 둘째·넷째 화요일은 쉰다.
견학 프로그램, 인터넷 방송 … 풍물시장의 새 풍물
● 서울풍물시장엔 방송이 있다. 수·토요일 오후 2시부터 한 시간 동안 상인들이 PD부터 DJ까지 맡아 진행한다.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star.afreeca.com)에서도 들을 수 있다.
● ‘추억의 풍물기행’이라는 견학 프로그램이 매주 목·금요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있다. 어린이·청소년 단체나 가족 단위로 신청하면 풍물문화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시장을 돌아볼 수 있다. 해설사가 옛날 레코드를 파는 가게(보라동 133호), 1960·70년대 물건을 파는 ‘추억의 보물상자’(파랑동 62호) 등을 들러 옛 물건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울풍물시장 홈페이지(pungmul.seoul.go.kr)에서 견학신청서를 내려받은 후 팩스(02-2232-3360)나 e-메일(miracleu@hanmail.net)로 신청하면 된다.
● 부채·전등갓·하회탈·한지 상자 등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전통문화체험관도 있다. 야외 공간에 부스 4개와 의자 24개를 놓아 공예품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작품을 다 만들 때까지 직원들이 돕고 준비물도 간단해 만들기 어렵지 않다. 참가비는 2000원이지만 선거가 끝나는 6월 3일부터는 무료로 제공된다.
● 상인회는 현재 SK텔레콤에 의뢰해 시장 내에 와이파이(WiFi)를 설치하고 있다. 한 달 뒤면 시장 내에서 무선 인터넷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진공관 라디오, 책가방 … 눈에 꽂히네요
서울풍물시장을 세 번째 돌고 난 뒤에야 상점 귀퉁이나 진열장 저 위쪽에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물건들은 화려하지 않았고, 낡아서 낭만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꽂히는 물건들이 있었으니….
1950년대엔 쌀 50가마니를 주고도 사기 힘들었다는 제니스 라디오. 그중에서 이 라디오는 진공관으로 52년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뒤 급속히 사라졌던 모델이다. 옛날 라디오만 모아서 파는 75호에서도 가장 오래된 물건이라고 했다. 주인 최태진(60)씨는 “가장 오래됐지만 여전히 잘 돌아간다”고 보증했다. 25만원.
2 PP선(군용 야전전화선) 장바구니(노랑동 58호)
지금 들고 다니기는 좀 쑥스럽다. 하지만 물자가 귀했던 시절, PP선을 엮어 장바구니로 사용했단다. 과일이나 잡동사니를 담아 벽에 걸어두면 인테리어 용품으로도 꽤 근사할 듯했다. 문득 전선이나 호스를 꼬아 가구를 만드는 작가 이광호 작품의 모티브처럼 느껴졌다. 2만원.
3 SP플레이어(초록동 109호)
흔히 레코드판으로 알고 있는 LP판의 이전 모델로 크기가 조금 작다. 그 위에 놓인 레코드판은 50년대 인기가수였던 백설희·방운아의 음반. 전기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태엽을 감아 돌린다. SP 플레이어가 60만원, SP판이 7만원.
4 추억의 책가방과 도시락통(중앙계단)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선물로 그럴 듯하다. 레코드 판이나 흑백TV도 좋지만, 학창시절 감상에 젖게 하는 그런 물건 말이다. 책가방이 8만원, 도시락통이 1만원.
5 국수 뽑는 나무틀(초록동 16호)
70~80년 됐다고 하는데 손때가 많이 타 나무가 반질반질하다. 세우면 어른 키만 할 정도로 크기도 우람하다.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함지박·떡메 같은 옛 물건을 구경하기 쉬워졌지만, 이 나무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신기했다. 1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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