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일대. 조선시대에서 현대까지 중요한 인물들 중에 북촌에 살지 않는 이를 찾는 게 더 빠를 만큼 북촌은 우리의 600년 역사와 문화가 그대로 농축되어 있는 곳이다. 요즘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도 데이트 장소로 혹은 사진찍기 좋은 곳으로 북촌을 많이들 찾는다.
그 중에서도 조금이라도 이름이 알려진 식당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가 많은 곳이 삼청동. 그러나 삼청동에서 한 블록만 넘어가면 사정이 다르다. 눈에 띄게 인적이 드물고 오래된 한옥들이 언덕배기까지 빽빽하게 자리한 곳. 아는 사람만 안다는, 알고 보면 알짜배기인 이곳, 가회동에 다녀왔다.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재동초등학교 사거리까지는 재동길. 그로부터 쭉 직진해 언덕 꼭대기 감사원까지 그 길이 바로 가회로다. ‘기쁘고 즐거운 모임’이란 뜻을 가진 이 길을 걷기 시작하자, 어쩐지 정말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었다. 천연기념물 8호인 600년이 넘은 그 유명한 재동 백송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라 더욱 흰 빛을 띠기도 한다는 이 백송나무의 좋은 기운을 받아 기분 좋게 취재를 시작했다.
이번 취재 장소를 가회동으로 정한 것은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다. 이 곳에는 숨겨진 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가회로부터 가회동 11번지와 31번지 골목마다, 그냥 지나칠 만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혼자 알기는 너무 아까운 곳, 바로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들을 지키고 알리려는 작지만 큰 뜻을 품은 소규모 박물관들이다.
북촌미술관, 명인박물관, 원앤제이갤러리, 동림매듭박물관
첫 번째로 발길이 닿은 곳은 북촌 미술관. 공교롭게도 취재날이 바로 2월 28일이었는데, 이 곳은 그 옛날의 3.1운동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식의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최종 모임을 가졌던 곳으로 유명한 손병희 선생의 집터였던 곳으로 의미가 깊다. 지금은 신태수 그림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전시 제목은 '진경산묵'. 조선 후기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진경산수 혹은 실경산수화라고 하는데 종래의 형식화된 창작태도의 한계를 깨고 좀 더 발전된 화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 조상들의 화풍을 이어오고 계신 신태수 화백의 그림전은 3월 12일까지 계속된다.
북촌 미술관 바로 건너편에 언뜻 보면 카페인지 박물관인지 모를 ‘명인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1층에서는 한쪽에 고미술품을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으며 한쪽에서는 페르소나라는 카페도 운영하고 있는데 페르소나라는 이름에서도 암시하듯 사실 명인박물관은 ‘탈’ 박물관으로서 건물 지하로 내려가면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탈 500여 점을 관람할 수 있다.
명인박물관을 시작으로 가회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리모델링한 한옥이 보이는데, ‘원 앤 제이 갤러리’다. 한옥의 여러 방들을 돌며 현대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곳인데, 재미있는 것은 사랑채 앞에 있는 ‘쿵후 벤치’. 중국 영화에서 싸울 때 무기로 쓰는 의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원 앤 제이 갤러리가 있는 코너를 돌아 골목을 올라가면 거기부터가 가회동 11번지. 31번지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개인 박물관이 많은 한옥촌이다. 대표적인 개인 박물관 세 곳 중 하나인 동림 매듭박물관은 한국 매듭연합회장인 심영미의 한옥공방으로 노리개, 허리띠, 주머니, 선추, 유소 등 매듭을 이용한 작품을 볼 수 있고 열쇠고리 같은 간단한 작품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
좀 더 올라간 후 왼쪽으로 코너를 돌면 가회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역시 한옥 자체를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겉보기엔 허름한 한옥이지만 마당입구에서부터 민화와 주술신앙이 반영된 벽사그림과 부적 등 민화와 민속자료 총 1,5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그 길로 쭉 올라가면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인 자수장 한상수 선생의 자수박물관이 있는데 지금은 내부사정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자수박물관 옆 2층 일본식 가옥을 리모델링한 ‘문화공간 향나무’에서 전통차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해보았다.
서울 닭 문화관, 북촌초고공방 고드랫돌, 우리빛깔공방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옥촌의 골목들을 다시 내려오면 가회로 길가에서 만날 수 있는 ‘서울 닭 문화관’은 취재 전부터 꼭 들러보고 싶던 곳이었다. 들어서자마자 김초강 관장은 전시품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담한 2층 건물로 이루어진 닭 문화관의 1층에는 전세계에서 수집한 닭 모양의 온갖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은 우리 조상들의 삶과 죽음까지 함께 하는 닭을 소중한 문화유품으로서 기리고자 하는 닭 문화관의 취지가 담긴 전시장이다.
상여의 네 귀퉁이를 장식하던 닭 모양의 장식품을 일컫는 꼭두닭은 우리나라 순수 민간 공예품이자 우리 조상들의 삶을 그대로 모여주는 것인데, 김관장은 이러한 우리나라 꼭두닭을 알리기 위해 책을 펴냈고 이 문화관도 개관하게 됐다고 한다. 심청이가 팔려가기 전날 부른 노래에 '닭아 울지마라, 너 울면 나 죽는다'라는 구절이 있다며 친히 불러주신 김관장의 열정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홈페이지에 미리 신청하면 직접 닭을 주제로 한 전통 공예체험도 할 수 있다고 하니 아이들과 함께 들리기에도 아주 좋은 곳인 듯하다.
다시 가회로를 건너 돈미약국 골목을 들어가면 가회 31번지. 거의 모든 건물들이 한옥을 유지하고 있다. 이준구 가옥, 김형태 가옥 등 오래전 유명 인사들의 가옥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이 곳에는 오래도록 전통방식을 지켜오고 있는 공방들이 숨어 있다.
공예 분야의 무형문화재인 한순자 선생의 공방인 ‘북촌초고공방 고드랫돌’은 우리 전통 민속 공예품인 화문석, 방석 등으로 유명하다. 이 곳에 가면 꽃돗자리 체험을 할 수 있다. 그 외에 ‘우리빛깔 공방’은 전통 규방 공예를 되살리는 바느질 공방이며 역시 전시와 교육을 하고 있다.
삼청동에 있는 갤러리들은 이미 웬만한 사람들은 일상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지만, 가회동의 박물관들은 그에 비하면 여전히 찬밥신세인 편이다. 하루에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듯했다. 재작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종로구청의 이미경 씨가 적극적으로 이를 검토한 덕분에 ‘북촌 박물관 자유이용권’이라는 제도도 생겨났지만, '서울 문화의 밤' 행사 때를 제외하면 이용객은 그리 많지 않다고. 재미있는 박물관이나 카페는 다른 곳에도 많이 있지만, 우리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의 소망이 작지만 옹기종기 따스하게 모여 있는 곳, 그냥 두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가회로가 외국의 박물관 거리처럼 좀 더 활기를 띄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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