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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북면 은지리 박문수家

아기 달맞이 2009. 12. 29. 07:25

암행어사 출두요~” 탐관오리 무릎 꿇린 감찰관의 표상

박용기(왼쪽)고령박씨대종회 상임부회장이 천안 북면 은지리 재실 앞에서 조카 박양원씨와 함께 사랑채에 걸린 현판 ‘시서일가(詩書一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짓기와 글쓰기가 모두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뜻. [조영회 기자]
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를 말한다.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해 본다.

글=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천안박물관에 전시 중인 보물1189호 박문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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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천안 북면 은지리에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그의 무덤이 있는 은석산 아래 재실(齋室) 옆이다. 재실은 묘 제사 준비를 위한 집이다.

고령 박씨 종중과 ‘영성군신도비건립추진위원회’는 지역 인사·주민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제막식을 가졌다.

박문수 신도비는 박 어사 후손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신도비 글은 있으나 비를 세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후손들이 세우게 된 것이다.

재실에서 만난 박용기(77) 고령박씨대종회 상임부회장은 “이곳은 원래부터 재실이 아니었다”며 “나는 1940년대까지 이곳에 살며 인근 천북초교(현재 위례초교)를 다녔다”고 말했다.

은지리 일대는 박문수 어사가 조선조 영조로부터 받은 사패지(賜牌地·공신에게 준 땅)다. 고령 박씨는 그후 이곳에 대대로 살았다. 박 부회장 가족은 한말 고위직에 있던 증조부가 한일합방 후 천안으로 낙향해 이곳에 정착한 후 해방 직전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후 이 집은 재실로 사용되게 된 것.

현재 이 일대에 사는 고령박씨 일가는 없다. 박씨 문중에선 박문수 영정 등 재실 옆 기념관에 보관하던 보물급 유물을 모두 지난해 개관한 천안박물관에 기증했다.

암행어사의 상징이 된 박문수

“박문수가 암행어사 직책을 수행한 기간은 1·2차 모두 합해 실제로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1200여 명이나 되는데도 박문수만이 암행어사의 대명사와 같은 상징성을 갖게 됐다.” 고령박씨 종중에서 신도비 건립과 함께 펴낸 『박물전 약전(略傳)』(박용무 지음)속 내용이다.

11월 27일 제막식을 가진 재실 옆의 박문수 신도비.
박문수(朴文秀,1691~1756)는 영조 재위기간(1724~1776) 크게 활동한 관료다. 1723년(경종3년) 문과에 급제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종사관(군영 수장 보좌 직책)으로 토벌의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며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이때 북면 은지리 일대 많은 땅을 나라로부터 받은 것이다. ‘영성’은 천안의 옛 이름. 이후 경상도관찰사로 발탁돼 승승장구한다. 대사간·대사성·도승지를 거쳐 두 차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741년 함경도진휼사로서 경상도 곡식 1만섬을 실어다가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 후일 함흥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균역법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고 군정을 맡는 병조판서와 정승을 보좌하는 우참찬을 지냈다.

이런 그가 암행어사로만 유명해진 까닭은 뭘까. 그는 1727년(36세), 1731년(40세) 두 번 암행어사에 임명된다. 처음엔 영남, 두 번째는 충청도로 파견됐다.

약전에선 “후일 경상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시절 적시에 행하는 정책으로 백성들에게 지지와 존경을 받게 된 것이 암행어사로서의 행적과 중첩돼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그것은 민초들이 불만을 푸는 카타르시스적 효과가 있어 김시습·곽재우·김덕령·이항복·김병연(김삿갓) 등과 함께 민간설화의 주인공으로 널리 전승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조실록(1727년 9월 25일)에 따르면 좌의정 조태억이 영남에 흉년이 들어 어사를 보내 백성들을 편안히 해야 한다며 박문수를 어사(別遣御史·암행어사를 뜻함)로 천거한다. 그러나 영조는 그가 나이가 젊고 경험이 적어 어렵다고 여겼다.

실록엔 “재차 박문수가 사무에 두루 통달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드디어 어사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박문수의 외삼촌 이태좌가 호조판서로 같은 소론이던 조태억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이때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장악한 때였다.

해학이 넘치고 곧았던 박문수

“연석(筵席·임금과 신하가 모인 자리)에서 때때로 골계(滑稽·해학섞인 말)를 하는 거칠고 조잡한 병통이 있었다” 박문수가 죽었을때 영조실록에 실린 그에 관한 기록 중 일부다. 때로는 과격하고 비속한 표현을 즐겨 사용해 주위로부터 비난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에 고개를 숙이거나 눈치를 보는 이는 아니었다. 당시 열세였던 소론에 속한 그를 영조는 득세한 노론의 견제 속에서도 중용했다.

박문수가 영조7년(1731년) 형조참판이 돼 왕을 가까이 모실 때, 하루는 좌의정과 우의정이 박문수를 꾸짖었다.

“상감마마 앞에서 무엄하게도 어떻게 고개를 들고 말하시오? 고개를 숙이지 않고 허리만 구부리는 불손함이 어디 또 있겠소?”

그러자 박문수는 영조에게 또 다시 허리만 굽히고 고개를 든 채 “전하, 임금과 신하가 마주보고 이야기하면 한결 부드럽고 거리감 없어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사옵니다. 간신이나 고개를 숙이는 법이옵니다”라고 말했다. 영조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부터 신하들은 고개를 들고 말하라”고 지시했다.

외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

박문수는 경기도 평택 진위면 봉남리 경주 이씨 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임진왜란 공신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다섯살 때 서울로 올라왔으나 할아버지·큰아버지·아버지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다시 외가에 내려온다. 외삼촌 이태좌(후일 좌의정) 아래서 한 살 밑인 외사촌 동생 이종성(후일 영의정)과 공부를 했다.

이종성(1692~1759)은 암행어사와 이조·예조·형조 판서를 역임했고 후일 영의정까지 지낸다. 그의 부친 이태좌(1660~1739)도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호조·이조·병조 판서를 거쳐 강화유수·좌의정을 지낸다. 암행어사 집안이었던 셈이다.

영의정에 추증된 증조부

박문수의 증조부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은 강원도관찰사·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형조·예조·이조 등 4개 판서를 역임했다.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홍문관·예문관 제학도 지냈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다. 조부는 진사시에 합격한 후 김제군수·여산현감을 지냈다. 33살에 요절한 큰아버지는 별시문과 급제한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아버지(박문수 부친 32세 사망)와 함께 소론의 거두 명재(明齋) 윤증(1629~1714)의 문인으로 지냈다.

은석산 정상에 있는 박문수 묘

은석산 정상에 있는 박문수 묘.
왜 박문수 어사 묘는 은석산 정상(455m)에 있을까? “산 꼭대기에 묘가 있어 후손들이 성묘하기 힘들겠어요”하고 묻자 박 부회장은 “요즘은 은석사 인근까지 승용차가 올라가 성묘하는 게 힘들지 않다”고 답했다.

박 부회장에 따르면 박문수 집안은 원래 황해도 장단에 살았다고 한다. 이후 박 어사가 공신전으로 천안 북면 일대 땅을 받게 돼 이 곳에 그의 묘가 들어서게 된 것. 당초 높지 않은 인근 ‘샘터’라는 곳에 자신의 묘를 쓰려고 했는데 한 측근이 “대감마님께서 이렇게 낮은 곳에 묘소를 써서야 되겠냐며 높은 곳에 묘자리 잡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 샘터 자리는 그 측근의 차지가 됐다.



■ 암행어사는…

암행어사를 처음 파견한 것은 중종4년(1509)이었다. 그 후 400년 남짓 수많은 암행어사가 임명돼 지방수령들의 부정 행위를 방지하다 고종29년(1892)에 전라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이면상을 끝으로 사라진다.

암행어사는 국왕이 극비로 단독 임명했었으나 영조 11년(1735)부터 암행어사 추천제가 병행됐다. 국왕은 암행어사로 선정한 자를 은밀히 어전으로 불러 관할할 구역을 통보한다. 그리고 국왕은 임무·암행조건, 관할구역을 쓴 밀봉 문서(봉서)와 마패와 유척을 건넨다.

암행어사의 증표로는 마패와 유척이 있다. 마패(사진)는 말을 빌리는 증표다. 당시 교통 기관으로 지역 요지만다 역(驛)이란 관청이 있었는데 여기서 공무수행자에게 말을 빌려줬다. 어사는 소지한 마패에 조각된 말의 수량 만큼 역마를 빌릴 수 있다. 1마패, 2마패, 3마패 등이 있었다. 유척(鍮尺)은 놋쇠로 만든 표준 자로 검시(檢屍) 등에 사용했다.

암행어사는 임명과 동시에 출발하는데, 보통 봉서 내용은 서울을 벗어난 후 볼 수 있도록 해 암행 지역과 임무가 사전 누설되지 않도록 했다.

암행어사는 임무가 끝나면 사안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서면으로 보고한다. 암행어사의 주된 임무는 지방수령 주요 임무(농사·양잠 증진, 호구 증대, 학교 건립, 군정 수립, 부역 균정, 소송 등) 감찰이다. 부정의 증거가 명백한 자는 가두고, 신문할 수 있을 정도로 어사 권한은 강력했다.

암행어사의 임무는 점차 구체화됐다. 조선 후기에는 3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과 관리들 근무 실태 등 구체적 항목을 살피게 했다. 동시에 암행어사가 권한을 남용하는 행위도 엄격히 규제했다.

암행어사는 신분을 감추고 변장해 백성들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수집한다. 관리의 비리 사실이 발견되면 신분을 밝히고 직무를 개시한다.

어사가 군청에 출두할 때는 역졸을 지휘해 “암행어사 출두”를 외친다. 군청에서는 수령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예를 갖춘 후 동헌(수령이 업무를 보는 자리)을 내놓는다. 수령을 벌할 필요가 없는 때는 수령에게 직무수행을 위해 동헌을 사용하겠다고 통지한 후 아무도 모르게 동헌을 사용한다.

암행어사 임무를 마치면 서계와 별단을 작성해 왕에게 보고한다. ‘서계’에는 현·전직의 관찰사, 수령의 비리 행위와 치적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별단’에는 자기가 살핀 민정·군정의 실정과 숨은 미담이나 열녀, 효자의 행적 등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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