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 여섯암자순례 & 토끼비리 |
# 수행의 맑은 정신으로 가득한 절집 문경이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새재 옛길이 세상을 잇는 ‘소통의 길’이라면, 산북면에 이웃한 유서 깊은 대승사와 김룡사, 이 두 절집이 품고 있는 산자락 곳곳의 암자로 드는 산중 오솔길은 번잡한 세상을 버리고 내부를 향하는 고립의 길이자, 침잠의 길이다. 우람한 숲에 고요히 잠겨 있는 절집은 지금 청명한 기운과 고즈넉한 침묵의 아름다움으로 그득하다. 대승사와 김룡사가 매력적인 것은 절집을 둘러친 아름드리 전나무와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서어나무가 이뤄낸 극상의 숲이 뿜어내는 향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두 절집을 더 특별하게 하는 것은 이곳이 신도들의 욕망과 기원이 넘쳐나는 곳이 아니라, 맑은 얼굴의 스님들이 고립을 자처하며 불법을 닦거나 수도를 하는 ‘용맹정진’의 도량이기 때문이다. 대승사와 김룡사는 서슬퍼런 가풍으로 고려 나옹선사부터 근대 불교의 고승들이 끊임없이 배출된 곳이다. 경허, 청담, 성철, 우봉, 서암, 자운, 법전…. 이루 손꼽기가 벅찰 정도로 내로라하는 한국 불교사의 기둥들이 이 두 절집에서 수행을 하고, 법문을 했다. 먼저 사불산 자락의 대승사. 신라 진평왕때인 서기 587년에 창건된 고찰로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사불바위)가 산꼭대기에 내려앉자 왕이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대승사는 혹독한 수행법으로 유명한 대승선원을 품고 있는 서슬퍼런 가풍의 절집이다. 산철 결제때면 선원의 스님들은 자신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내모는 극한 수행으로 용맹정진한다. 대승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운달산 자락의 김룡사의 내력도 그에 못지않다. 김룡사는 대승사가 지어진 이듬해인 588년 운달조사가 창건했으며 당초 운봉사라 했으나, 훗날 지극한 정성으로 불심을 잃지 않던 김룡이란 사람의 이름을 따서 절집 이름을 김룡사로 고쳐 붙였다. 한자로 ‘金龍’이라 쓰니 ‘금룡’이라 읽을 법한데, 김룡사라 부르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지금이야 직지사의 말사지만, 한때 33교구의 하나로 48개 말사를 거느렸던 대찰이었다. 성철스님이 대구 파계사 성전암의 문을 열고 나서 대중에게 최초의 법문을 한 곳도 바로 이곳 김룡사였다. #‘모습’과 ‘정신’이 아름다운 산중 암자 대승사와 김룡사는 빼어난 산중 암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세속과 인연을 끊고 산중에 들어선 암자는 그곳으로 드는 길은 풍광만으로도 무릎을 꿇고 싶어질 정도로 매혹적이다.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전나무와 활엽수들이 한데 뒤섞여 도열한 길에는 낙엽들이 푹신하게 깔려 있고, 길은 유연하게 굽어지며 산자락을 타고 돈다. 산중 암자를 제대로 보겠다면 이 두 절집이 품은 6개 암자를 골라 돌아보는 게 좋겠다. ‘걸을 수 있음’이 행복해지는 길. 그 길에 ‘6암자 순례길’이란 이름을 붙여본다. 대승사는 여러 암자를 거느리고 있지만, 그중 윤필암과 묘적암이 가장 빼어나다. 윤필암은 차로 가닿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대승사 접견실 뒤편으로 난 숲길을 따라 걷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산길 중간쯤에는 사불바위로 오르는 길이 나있다. 사불바위는 빼놓지 말고 들러야 할 곳. 바위 위에 서면 발 아래는 윤필암이, 건너편 산자락에는 묘적암이 건너다 보인다. 윤필암을 지나 묘적암으로 오르는 산길은 암자길의 백미다. 융단처럼 낙엽들이 깔려 있고, 주위로는 우람한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특히 마애석불로 오르는 계단길은 늦가을 정취의 극치를 보여준다. 묘적암 툇마루에는 ‘일묵여뢰(一默如雷)’란 편액이 걸려 있다. 유마경에 나오는 ‘침묵이 곧 우레와 같다’는 뜻. 그래서 암자를 홀로 지키는 스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김룡사는 4개의 산중 암자를 품고 있으니 대성암, 양진암, 화장암, 금선대가 그것이다. 운달계곡을 끼고 하나하나 순서대로 암자를 짚어간다. 김룡사 최고의 암자라면 단연 금선대다. 사실 김룡사가 운봉사란 이름을 달고 처음 창건된 것이 바로 금선대다. 금선대는 운달산(1097m) 정상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으니 찾아가기가 만만찮다. 갈 지(之)자의 좁디좁은 산중 오솔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낙엽으로 덮인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면 제법 너른 터에 1400여년의 시간을 건너온 암자가 앉아 있다. 휴대전화도 불통이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 홀로 정진 중인 스님은 숨을 고르는 길손에게 찬물 한바가지를 떠 주고는 곧 두손을 모았다. “물을 다 드셨으면 그만 내려가시지요.” # 발길과 시간이 만든 유리알 같은 바위 문경에서 새재 옛길을 찾는 사람들은 차 한대쯤은 넉넉히 다닐 수 있는 너른 흙길이 옛 선비들이 걷던 그 길이라고 믿어버리지만, 사실 영남대로 옛길은 좁디좁은 오솔길에 가까웠다.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고,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다’는 근대 건축가 김수근의 말대로라면 지금의 새재 옛길은 ‘좋은 길’이지만, 넓어서 ‘덜 좋은 길’이다. 문경에는 새재와 이어지는 영남대로 중에 ‘좁아서 더 좋은’ 옛길도 남아 있다. 영남대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고모산성 부근의 ‘토끼비리’가 바로 그곳이다. ‘비리’란 물을 끼고 있는 벼랑을 뜻하는 말인 ‘벼루’의 영남 사투리. 조선시대 ‘여지도서’에서는 토끼비리 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산이 거듭되고 첩첩이 산봉우리가 쌓여 천개의 이빨 같이 서로 제압하는데다, 돌벼랑 사다리길로 통행에 조심해야 한다. 무릇 하늘이 만든 험한 곳이다.” 길이 열렸던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토끼비리 길은 아슬아슬 위태롭다. 가파른 산비탈의 허리를 잘라 길을 냈는데, 발아래로 까마득히 영강이 흐르는데다 좁은 구간은 길의 너비가 채 두뼘이 되지 않을 정도다. 토끼비리에서 시선을 붙잡는 것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닳은 바위들.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아 반질거리는 석회암 바위에서 시간의 깊이와 옛 사람의 체온을 느껴볼 수 있다. 토끼비리에 들어서면 이처럼 미끄러운 바위에 낙엽까지 쌓여 발이 죽죽 미끄러져 간이 콩알만해진다. 굳이 길을 다 걷기보다는 옛길의 맛만 보고 적당한 지점에서 되돌아 나오는 편이 좋겠다. # 문경새재 옛길을 제대로 걷는 법 문경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새재 옛길’이 명소로 꼽힌다. 그러나 문경새재를 그저 걷기만 한다면 무심한 단순 보행일 뿐이다. 옛길에서는 모름지기 오랜 시간의 저편에서 그 길을 밟았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이 순서다. 옛사람들이 이 길을 왜 걸었는지, 어떻게 걸었는지에 시선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옛길이 품고 있는 향기란 그래야 비로소 맡아지는 법이다. 문경새재는 ‘청운의 뜻을 품은 선비들의 과거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건 새재 길이 가진 절반의 해석일 뿐이다. 새재는 걷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된다. 새재를 넘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향하는 선비들에게는 야망의 길이었겠으나, 반대 방향의 길은 과거에서 낙방해 돌아가는 좌절과 실의의 길이었고, 정쟁에 휘말려 천리 먼 길로 유배를 떠나는 길이었다. 간혹 벼슬에 올라 임지로 가거나 금의환향하는 길이기도 했겠지만 길 위에는 과거에 급제한 이들보다 낙방한 이들이 더 많았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새재에 세워진 문에는 남쪽 문경부터 북쪽 충주 쪽으로 올라가며 순서대로 1관문, 2관문, 3관문으로 이름이 붙여져 있다. 만일 한양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관문의 숫자는 바꿔 붙여져야 옳다. 영남에서 올라가는 순서가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가는 순서에 따라 숫자가 매겨져야 했다는 것이다. 서울을 국토의 중심으로 여기는 이즈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을 터다. 고속도로나 국도에 놓인 허다한 터널들이 죄다 서울 쪽에서 출발하는 것을 순서로 1, 2, 3터널의 이름이 붙여지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똑같은 길을 걷더라도 오를 때와 내릴 때의 풍경은 사뭇 다른 법. 그렇다면 문경새재에서는 두 방향 모두를 걸어보거나, 자주 뒤를 돌아다보면서 걷는 것이 요령이겠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실 청운의 꿈을 안고 걷던 길보다 옛 선비들의 실의와 좌절의 길이 오히려 더 깊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문경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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