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다 같이 돌자 서울성곽 한 바퀴

아기 달맞이 2009. 11. 9. 03:58

18.2km 길은 끊어져도, 역사는 흐른다

 

 

오랜 세월 무허가 건물 등에 가려 잊혀졌던 서울 성곽이 최근 복원 공사를 거쳐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낙산 정상에서 혜화문으로 가는 구간의 성곽.

10여 일 전, 서울 한복판에서 흙 묻은 등산화를 신고 숭례문 복원공사장을 보며 눈물 흘리던 여자를 본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접니다. 그날 서울성곽 트레킹을 막 끝낸 참이었습니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이었습니다. 그 여정이 끝나는 숭례문 쪽을 보니 감정이 벅차오르더군요. 이제 눈물을 쏟으며 끝낸 ‘나의 성곽 취재기’를 시작합니다.

서울 성곽은 옛 조선의 수도 한양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였습니다. 그 안은 서울이고, 그 밖은 서울이 아니었지요. 성곽의 총길이는 18.2㎞. 그다지 길지 않은 길이어서 하룻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곽을 10여 년간 답사한, 또 이번 답사에 길잡이를 해준 유근표(60) 성곽답사전문가는 사흘길이라 하더군요. “남산·낙산·북악산·인왕산 등 서울의 내사산을 잇는 구간이어서 그리 수월치 않다”면서요. 그래서 세 구간으로 나눠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 무허가 건물 등에 가려 잊혀졌던 서울 성곽이 최근 복원 공사를 거쳐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낙산 정상에서 혜화문으로 가는 구간의 성곽.
성곽을 걷는 일은, 시작할 땐 ‘트레킹’인 줄 알았습니다. 한데 해보니 ‘어드벤처’더군요.

서울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밀림’을 헤치고,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며 가느라 무수히 나뭇가지에 찔렸습니다. 그래도 답사에 나섰던 우리 일행은 모두 성곽에 홀려버렸습니다. 답사가 끝나면 빨리 다음 코스를 보고 싶어 안달이었죠. 취재기자는 둘째 날 코스 끝무렵에 다리를 다쳤고, 성곽에 홀린 사진기자는 다리 다친 기자를 기다리지 못해 혼자서 성곽에 올랐다 굴러 귀가 찢어졌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때문에 답사는 한 달이나 걸렸죠.

답사 전 유 선생은 기자들에게 등산화를 신고 오라고 했습니다. 한데 듣지 않았어요. 서울시가 조성해 놓은 ‘성곽탐방로’를 아는데, 등산화 신고 유난을 떨 곳은 아니죠. 그 결과 첫날 남산에서 호되게 당했습니다. 기존의 성곽탐방로는 성곽 안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곽은 야트막한 담장입니다. 한데 우리는 성곽 바깥쪽인 외성을 돌았습니다. 밖에서 보니 성곽은 기단부터 꼭대기 옥개석까지 6m에 달하는 거대한 벽이었습니다. 그곳엔 길이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찔리며 길을 내야 했죠. 남산의 숲이 이리 깊은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숲을 헤치고 성곽을 따라 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곳이 바로 우리 동네 옆이었고 늘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스쳐봤던 축대가 성곽이었음을 알았을 땐 전율을 느꼈습니다. 성곽에 빨리 가고 싶어 발목이 다 나았다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답사를 끝냈습니다. 지금은 또 발목이 시큰거리는군요. 물리치료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 순간, 눈앞엔 성곽이 어른거립니다.

글=한은화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남산 성곽의 진짜 모습은 탐방로 밖에서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우거진 숲 속에 가려진 6m 높이의 성곽이 처연해 보인다.
성곽 답사 코스의 정답은 없다. 어디서든 시작해도 좋다. 이번에 나눈 세 구간은 저마다 특색이 있다. 1구간(숭례문~흥인지문)에서는 남산을 재발견할 수 있고, 2구간(흥인지문~창의문)에서는 그동안 북악산이 폐쇄된 덕에 잘 보존돼 있는 성곽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3구간(창의문~숭례문)의 코스에서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또 하나 성곽은 바로 우리 생활공간 안에 있다. 공사장 옆에 버려진 돌무더기로, 낙산 빈민가의 담벼락으로, 빌딩을 이고 있는 축대로, 그렇게 오늘도 버티고 있다. 일제시대와 서울의 팽창기를 거치며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알면 보이지만 모르면 보이지 않는 게 우리의 서울 성곽이다. 그래서인지 서울 성곽을 따라다닌 길은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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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서는 길 벗어나야 잘 보여

1구간
숭례문 ⇒ 안중근의사기념관 ⇒ 팔각정·N서울타워 ⇒ 타워호텔 ⇒ 신라호텔 담장 ⇒ 천주교신당동교회 ⇒ 광희문 ⇒ 동대문디자인프라자파크 ⇒ 오간수교 ⇒ 흥인지문

이 구간의 백미는 ‘남산’이다. 숭례문~남산 회현자락의 성곽은 대부분 소실됐다. 옛 남산식물원 터를 지나서야 성곽이 나타난다. 성곽을 제대로 보려면 기존의 탐방로를 벗어나야 한다. 성곽의 바깥쪽으로 가면 이끼가 잔뜩 뒤덮여 푸른빛이 나는 성곽과 함께 남산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해발 262m에 불과한 남산의 속살은 의외로 깊고 험하다. 가파른 비탈길에 가시나무·소나무가 한데 우거져 있어, 마치 오랜 시간 사람이 찾지 않은 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조선시대, 남산은 한양의 랜드마크였다. 태조는 남산을 안산(案山)으로 삼아 도성의 형태를 가다듬었다.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산으로 국사당을 설치해 제사를 지냈다. 일제시대, 남산은 주요 표적물이었다. 일제는 남산의 성곽을 부수고, 조선신궁을 세워 참배를 강요했다.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1960년대의 남산에는 중앙정보부 건물이 들어섰다. 남산의 역사는 곧 서울과 한국의 역사였다.

현재 남산에서 성곽이 소실된 구간은 일제시대 조선신궁이 들어섰던 회현자락, 정상을 지나 남산순환도로 쪽으로 펼쳐져 있는 미군부대, 공사 중인 타워호텔 등이다. 회현자락 쪽 성곽은 복원공사 중이고, 미군부대 쪽은 상태를 확인할 수 없다. 그저 부대의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샌가 나타난 성곽과 마주할 수 있다.

이 구간에서 성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타워호텔을 지나 신라호텔을 좌측으로 끼고 장충체육관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후부터 흥인지문까지 대부분의 성곽은 헐려 없어졌다. 장충체육관 건너 주택가를 걷다 보면 드문드문 낡은 집을 이고 있는 성곽을 볼 수 있다. 광희문 인근의 성곽은 복원됐다. 현재 공사 중인 동대문 디자인 프라자 파크에서 발견된 성곽 터는 최근 개방했다.

●답사 팁 남산을 벗어나기 전까지 점심 먹을 곳이 없다. 오전에 답사를 시작했다면 도시락을 준비해서 남산 팔각정에서 먹는 것이 좋다. 인근의 봉수대에서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1시30분부터 1시간 동안 봉수거화의식을 진행하니 점심을 먹으면서 구경하기 좋다. ●인근 유적지 사대부부터 서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 우리나라 고유 소나무 약 5만 그루가 심어져 있는 ‘남산 고유 소나무 탐방로’, 4대문과 4소문에 속하진 않지만 그래도 남소문으로 불렸던 터가 있다. 이 문은 한강에서 도성 안으로 가기 좋은 길이지만 기운이 좋지 않다 해서 폐쇄됐다.

공사 책임자 이름 돌에 새겨

2구간
흥인지문 ⇒ 낙산공원 ⇒ 혜화문 ⇒ 서울시장 공관 담장⇒ 경신중·고등학교 담장 ⇒ 서울과학고등학교 ⇒ 와룡공원 쉼터 ⇒ 말바위 쉼터 ⇒ 숙정문 ⇒ 촛대바위 ⇒ 북악산 곡장 ⇒ 창의문

성곽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구간이다. 혜화문을 지나 서울 과학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200m 정도 성곽이 끊긴 것 외에 대부분 복원됐다. 2007년 개방한 북악산 탐방로에선 기단부터 옥개석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성곽을 볼 수 있다. 산줄기를 타고 끝없이 이어져 있는 성곽을 보며 성곽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과거의 역사도 볼 수 있지만 근·현대 질곡의 역사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이 구간이다.

일제시대, 각종 도로 공사로 헐리고 도로 한가운데 덩그마니 남아 있는 흥인지문. 현대화된 서울의 서민 동네 무허가 주택의 담장 구실로 전락한 낙산 쪽 성곽. 성곽에 지어졌다 복원사업이 시작되며 송사에 휘말린 동대문교회 성곽터…. 이 구간의 성곽은 확장된 도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성곽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흥인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쪽의 성곽에는 ‘각자’가 유난히 많다. 이는 성곽 축조 당시 ‘공사실명제’를 했다는 증거다. 공사 당시 성곽을 총 97개의 구간으로 나눠 ‘이 구간은 어디 지방 사람 누가 와서 쌓았다’는 사실을 돌에 새겼다. 그리고 성곽이 무너지면 책임자를 불러 다시 쌓게 했다. 이 구간의 탐방로는 잘 조성돼 있지만, 탐방로에서는 성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아쉽다. 성곽과 탐방로 사이에 있는 축대와 잡풀 때문이다.

답사구간 내에 있는 혜화문은 조선시대에 북쪽으로 통하는 주요 출구였다. 실제 북대문인 숙정문과 북소문인 창의문은 풍수지리상 늘 닫아뒀기 때문이다. 북한산 탐방로 안에 있는 숙정문은 “처녀가 이곳에 세 번만 찾아오면 시집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의 기가 강한 장소로 당시 알려졌다.

●답사 팁 북악산 탐방로를 답사하려면 현장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해 신분증과 함께 내야 한다. 탐방로의 사진촬영은 제한된 구간에서만 허락되니 유의해야 한다. 탐방로 입장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고, 월요일은 입산금지다. 창의문 쪽 탐방로의 계단이 가파르니 내려갈 때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발목을 접질려 셋째 코스를 답사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인근 유적지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등의 조선시대 궁과 유적지가 많다. 성북동 일대에는 만해 한용운이 지어 살던 심우장,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가 궁에서 쫓겨나 옷감에 염색하며 지낼 때 빨래를 했다는 자주동샘, 법정 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1년에 두 번 국보급 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돈의문터~숭례문 ‘퍼즐 맞추기’

3구간


창의문 ⇒ 인왕산 ⇒ 월암공원 ⇒ 돈의문 터 ⇒ 중국복음선교회 ⇒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 이화여고등학교 정문 ⇒ 정동길 ⇒ 서소문 터 ⇒ 대한상공회의소 ⇒ 숭례문

인왕산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성곽은 소멸됐다. 인왕산에선 서울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성곽이 잘 보이고, 도심 전망이 좋다. 기차바위·책 바위·모자 바위 등 기기묘묘하게 생긴 인왕산의 바위마다 전해오는 얘기도 많다. 중종반정 이후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가 궁에서 잘 보이도록 치마를 깔고 앉아 있었다는 치마바위도 있다. 인왕산 정상을 지나면 스님이 장삼을 입은 모습과 닮은 ‘선바위’가 있다. 이를 놓고 성곽의 위치를 정할 당시 격론이 벌어졌다. 바위를 성곽 안에 둘 것인지, 바깥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서다. 태조가 결정을 못 내리다 눈이 많이 내린 다음날 눈이 녹은 선을 따라 성곽의 위치를 정했고, 선바위는 성곽 바깥쪽에 놓이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돈의문터에서 숭례문에 이르기까지의 구간에서는 그야말로 ‘보물찾기’를 하듯 성곽의 흔적을 쫓아야 한다. 그 자리마다 구구절절한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 서울의 지난 역사가 하나로 꿰어 맞춰진다.

월암공원 인근에 있는 ‘홍난파의 집’에선 홍난파가 작사·작곡한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라 불리는 홍난파 선생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실내악단 창시자이며 음악평론가였다. 강북삼성병원 내에는 김구 선생이 집무실·숙소로 사용한 ‘경교장’이 있다. 이곳에는 암살자 안두희가 김구 선생에게 쏜 총알 자국이 아직도 창에 남아 있다.

돈의문터를 지나 정동으로 오면 성곽을 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중국복음선교회 옆의 건물 공사터에 있는 성곽은 아무렇게나 방치된 상태다. 문화일보 뒷길, 창덕여중 담장의 기단이 바로 성곽이다. 서소문터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정동 일대는 근·현대사의 보고다.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증명전, 아관파천의 역사가 서린 옛 러시아공사관 터,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정동교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현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등이 있다.

●답사 팁 인왕산은 월요일 입산금지다. 그 외엔 24시간 개방돼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와 월암공원에 이르기 전에 있는 주택가에서도 성곽을 볼 수 있다. 홍파동 2-1 홍파빌라의 1층 주차장에 들어가서 창문을 열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이 빌라의 담장이자 축대로 쓰이고 있는 게 바로 성곽이다.



동행한 ‘전문가’ 유근표씨 “성곽 복원, 재빨리보다 제대로”

이번 성곽 취재는 유근표(60·사진)씨의 안내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을 ‘성곽연구가’라고 소개했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10년간을 성곽의 흔적을 찾아다녔으니 그리 불러도 어색하지 않았다. 지난해 30년간 철도공무원 생활을 접고 은퇴한 그는 더욱 성곽에 매달려 있다.

그는 답사 내내 잘 닦인 탐방로를 두고, 굳이 가시덤불로 뛰어들었다. ‘접근 금지’라는 미군부대의 경고 글도, 공사장도 아예 못 본 척했다. 그러곤 잘라 말했다.

성곽은 일제시대와 서울의 팽창기를 겪으며 많이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옛서울''을 둘러싸고 있다. 성곽을 알면 가는 곳마다 성곽이 보이지만 대부분은 성곽 바로 옆을 지나면서도 그것이 성곽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 길로 안 가면 의미가 없다니까요.” 실제로 그 길은 험했지만, 성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유씨는 “성곽을 끼고 돌에 새겨진 ‘각자’를 하나씩 찾아가며 하는 답사가 진짜”라고 했다.

유씨가 처음 성곽을 알게 된 건 2000년이었다. 북한산 등반을 하다 서울 성곽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길로 성곽을 찾아 나섰다. 당시 집 근처였던 동대문 인근을 마구 헤매다 낙산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성곽을 발견했다. 그 방치된 성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계적인 보물을 이렇게 방치해선 안 된다 싶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간 날 때마다 성곽을 찾는다. 2007년 개방한 북악산만 60번 넘게 올랐다. 성곽과 관련한 모든 책을 찾아 읽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그간의 답사를 바탕으로 『성곽답사와 국토기행』(범우사)을 썼다.

‘두드리면 열린다’. 이건 그가 말한 ‘성곽 찾기의 기본정신’이다. 성곽 소실 구간에선 어느 집 축대로, 어느 집 담벼락으로라도 존재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가며 그 흔적을 찾았다. 한겨울엔 ‘아이젠’을 차고 달동네 골목길을 누비며 성곽의 흔적을 더듬었다. 그래서 어느 집 담벼락이 성곽인지도 꿰고 있었다.

유씨는 “호기심이 많아서 끝까지 가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요즘 성곽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구간별로 복원 방향을 조목조목 쓴 건의서를 관련 기관에 꾸준히 보내고 있다. “빨리 복원하는 것보다 제대로 복원했으면 좋겠어요.” 이게 그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한은화 기자

동글동글, 직사각형, 정사각형  축조 시기마다 다른 돌 모양

서울성곽은 1396년 태조 5년 때 축조됐다. 이때 두 번에 걸친 공사로 3분의 2가 토성이고 나머지가 석성인 서울 성곽이 완성된다. 이후 세종 때 보수공사를 통해 모든 성곽이 석성으로 바뀌었다. 숙종 때에도 6년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됐다. 시대마다 사용한 돌의 형태가 달라 돌의 모양만으로도 시대를 판별할 수 있어 재미있다. 태조 때는 동글동글한 작은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고, 세종 때는 널찍한 직사각형의 돌, 숙종 때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돌을 쌓았다.

이렇게 세 명의 왕이 쌓아 올린 성곽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헐리고 훼손됐다. 1890년대엔 전차길을 낸다며 돈의문과 흥인지문 부근의 성곽이 헐렸고 1910년대엔 도로를 낸다며 숭례문 양측을 절개했고 남소문터의 성벽이 철거됐다. 서소문과 그 부근의 성벽은 총독부 관사를 세우기 위해 헐렸고 돈의문이 철거되는 등 1930년대 말기까지 많은 구간이 훼손됐다.

해방 후 서울 성곽은 다시 보수되고 복원되기 시작했지만 일제가 흐트러뜨린 성곽은 쉽게 복원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 서울시가 9월 초 유네스코의 자문기구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코모스(ICOMOS: 국제 기념물·유적협의회) 해외 전문가를 초청해 서울 성곽 답사를 했다. “복원 의지와 진정성이 있다면 문화유산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서울시는 성곽을 원위치·원형 그대로 복원해 북한산성·탕춘대성과 함께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할 예정이다. 지금 서울 성곽의 곳곳은 복원 공사 중이다.



이런 게 아쉬웠습니다

● 남산 구간 탐방로는 성곽 안쪽에만 있다. 여기선 성곽이 그저 야트막한 담장으로만 보인다.

● 흥인지문~낙산공원 탐방로는 성곽과 탐방로 사이에 높은 축대가 있고 그 위로 잡풀이 우거져 성곽이 보이지 않았다.

● 정동길 중국복음선교회 옆 공사장에 방치된 성곽은 공사가 끝날 즈음이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 기존에 복원했다는 성곽에선 시멘트로 대충 덧바르고, 총 구멍(총완)의 크기가 제각각인 경우가 많았다.

● 복원된 성곽의 돌 모양은 모두 숙종 때 쓰인 정사각형이 주종이다. 태조·세종 때의 돌 모양은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