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미

들꽃처럼 아름다운 안국동 한옥

아기 달맞이 2009. 10. 7. 19:15

30여 년간의 아파트 생활을 마감하고, 흙 마당에 발 디디며 작은 꽃밭 하나 가꾸며 살고 싶었다. 서울의 한가운데에서 찾은 한옥은 도시 생활의 편리함을 포기하지 않고도 그 작은 바람을 이룰 수 있는 답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좁다란 골목 끝에서 만나는 비밀 정원이라 부른다.
1 빼곡한 한옥 지붕들 사이로 내려다본 모습. 그 길의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속에 숨어 있는 것 같다.
2, 3, 4 지난 수년간 아파트 베란다 정원에서 키워온 야생화와 분재를 안국동 한옥에 옮겨놓았다. 이곳은 화초 가꾸기를 즐기는 양경희 씨에게 원 없이 놀아볼 수 있는 놀이터다.

한옥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고도 재미있다. 인터넷 지도 서비스의 도움을 받고 집주인의 설명을 제아무리 열심히 받아 적어도 그곳에 다다르기까지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골목에서 한 번쯤 길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 미로의 끝에서 숨겨진 보물 같은 집을 만나게 되기에 그 길은 항상 즐겁다.

젊은 시절부터 마냥 한옥이 좋았다는 양경희 씨 . 안국동에 집을 한 채 마련한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지금처럼 한옥이 재조명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지 못하던 시절, 아이들이 모두 출가하면 남편과 단둘이 노년을 즐기며 소박하게 살아갈 요량으로 10여 년 전 미리 마련해두었던 것. 당시는 전원주택 열풍이 불 때라 주변에는 은퇴 후를 생각해서 서울 근교로 눈을 돌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노령이 될수록 교통과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남편의 생각에 따라 그는 오히려 도시 한가운데서 미래의 보금자리를 찾아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제대로 된 한옥을 지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요. 그저 시내도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니 수리만 잘하면 살기에 불편함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한옥을 새로 짓기로 결심한 것은 2년 전. 이제 아이들도 다 키웠고 서서히 노년의 보금자리를 준비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본격적으로 한옥 공부를 시작했다. 서점이나 인터넷 등에서 찾은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고, 짬이 날 때마다 가회동과 안국동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대문을 두드렸다. 한옥을 먼저 지어본 선배들의 성공담과 실패담을 나누며 자신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시켜나갔다. <행복이 가득한 집> 지면을 통해 소개되었던 한옥들도 직접 가보았다며 그 공간에서 찾아낸 그의 생각을 들려준다. 수많은 현장 답사를 통해 그가 얻은 답은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다’였다. 결혼 후 근 30년 동안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부부에게 한옥이 낯설고 불편한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되었기에. 스무 평(약 66㎡) 남짓한 ㄱ자 한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간방 자리에 주방을 배치하고 주방이 있던 자리에 소청마루와 욕실을 둔 것이다. 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서 오른쪽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주방이 나온다. 식료품 등 잡다한 물건이 일상적으로 가장 자주 들고 나는 곳이 주방이므로 대문에서 바로 연결될 수 있도록 했다. 자재는 방문을 제외하면 모두 고재를 사용했다. 비용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공사를 시작하기 전 발품을 팔며 한옥 구경을 다녀보니 어떤 자재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느낌의 차이가 컸다고. 또한 가능한 한 원래 가옥을 이루고 있던 자재를 활용하려 노력했다. 담장에 쌓은 돌이 그 예. 옛집을 철거하면서 나온 구들장 돌을 깨고 모서리를 다듬어 담장을 세웠다.

8개월에 걸친 공사는 대목 김길성 씨가 맡았다. 양경희 씨는 한옥 공사를 맡아줄 대목을 찾기 위해 세 명의 대목을 만났다. 모두들 실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분들이었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일하려면 궁합이 잘 맞는 이가 필요했다. 결국은 사람의 일이라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호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사를 시작한 후 8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사장을 찾았다.


1 아기자기한 꽃무늬 커튼이 한옥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간에 여성스러움을 더한다.
2 마당 귀퉁이마다 물확을 놓고 주변에 다양한 야생화를 심었다.
3 주먹만 한 작은 토기에 키우는 이메리스.
4 지붕을 올리고 남은 기왓장에 흙을 담고 야생화를 심었다.

“우리 딸은 제가 대목님을 너무 귀찮게 했다고 해요. 그래도 김길성 대목님은 제 의견을 가능한 한 받아들여주셨어요. 결국 이 집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은 바로 저니까요.” 담장 높이부터 문틀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양경희 씨의 의견이 녹아 들지 않은 곳이 없다. “집 짓는 내내 어머니는 한옥과 건축에 관련된 책을 한 무더기 이고 사셨어요.”

아파트 공사를 세 번이나 해본 경험이 어디 가겠느냐며 옆에 있던 막내 딸 이주희 씨가 한마디 거든다. 그럼에도 그는 이번 한옥 공사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단다. 제일 아쉬운 점은 화장실에 전통적인 소재나 모티프를 활용하지 못한 것. 집을 완성하고 나서야 놋 세숫대야 등 화장실에 응용할 수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매일 현장에서 의견을 나눠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작업하다 보니 어느새 계절은 봄에서 겨울에 이르러 있었다. 지난 연말에 공사를 마쳤다는데 살림이 너무 간소해 보인다. 남편과 아이들 생활 때문에 앞으로 몇 년간은 살림집을 완전히 옮기지 못할 것 같다고. 어차피 벌어놓은 시간이니 그는 이 소중한 한옥에 더욱더 정성을 들이기로 맘을 먹었다. 한 번에 하나씩 차근차근 집 안을 채워가기로. 다니러 올 때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수년간 키워온 들꽃을 하나 둘 옮겨 심고, 30대 후반부터 수집해온 앤티크 소품을 옮겨놓았다.

 
1 1백 년 이상 묶은 고재로 지은 한옥의 대청마루 풍경. 
2 안주인 양경희 씨와 막내딸 이주희 씨가 마당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집 안을 둘러보니 곳곳에서 안주인의 감각이 드러난다. 프렌치 스타일로 제작한 유리문에는 아기자기한 꽃무늬 커튼이,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에는 유럽풍 앤티크 샹들리에가 달려 있다. 한옥에 어우러진 유럽풍 스타일이 공간에 여성스러움과 잔잔함을 더한다. 사실 양경희 씨가 이 집에서 가장 정성을 들이는 곳은 마당이다. 마당을 둘러싼 작은 들꽃 종류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이고 한편에 터를 잡은 분재 화분은 군락을 이룬다. 대청마루에서 내다보이는 담장 아래에는 아직 초록이 고개를 내밀지 못한 오죽吳竹이 심어져 있고, 언젠가는 달콤한 열매를 선사할 과실 나무도 있다. 마당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이 집이 완성된 지 5개월도 채 안 된 곳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새집인지라 완연한 봄임에도 녹음이 풍성하지는 못하지만, 마당 곳곳에서 느껴지는 그의 손길의 흔적 때문이리라. 지난 3월 유난히 매서웠던 꽃샘추위에 그는 마당에 심어놓은 들꽃의 간밤이 걱정되어 아침마다 이곳을 찾았다고. 들꽃과 마당 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니 다소곳하게 어머니 옆을 지키고 있던 주희 씨도 이야기가 많아진다.


3, 4, 5 집 안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소품은 모두 안주인이 30대 후반부터 모아온 것.

 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슬그머니 양경희 씨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딸 자랑을 한다. 현재 국제대학원을 다니는 주희 씨는 가을이면 프랑스로 꽃을 공부하러 떠난다. 작약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 아가씨는 어머니가 가꾸는 이 마당이 비밀 정원 같단다. 차 한 대 지나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 끝에 숨어 있는 집. 그 안에 들어서면 이곳이 서울 한가운데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있고, 어머니가 아끼는 정원이 있다. 앞으로 몇 년간 이사가 늦춰졌으니 주희 씨 말대로 그는 비밀 정원을 하나 얻은 셈이다. 이 비밀 정원은 볕 좋고 바람 좋은 날 벗들을 초대해 차 한 잔 나누기에도 그만이고, 두 딸과 함께 종일 마당을 맴돌며 들꽃과 놀아보아도 좋으리라.


1 유리창을 단 대청마루와 달리 안방은 한지 문을 달아 아늑함을 주었다.
2 반닫이에 유럽풍 태슬로 변화를 준 안주인의 센스가 돋보인다.


3 알록달록 색감이 아름다운 골무와 실패. 양경희 씨는 들꽃처럼 작고 아기자기한 소품에서 즐거움을 누린다.
4 한옥에 앤티크 샹들리에를 달아 개성과 멋스러움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