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청룡사

아기 달맞이 2009. 7. 10. 06:32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이르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은평향토사학회 문화유적 답사지에서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28 청룡사

청룡사는 원래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세워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던 곳이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크게 넓히면서 청룡사라 이름을 고쳤는데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으로 꾸몄다.

안성 청룡사와 바우덕이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이곳에는 유명한 사찰과 인물이 있으니 ‘청룡사’와 안성 남사당패의 전설적인 인물 ‘바우덕이’다. 사찰 청룡사는 고려시대 사찰로 1265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해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다. 이후 1364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사찰이름 유래도 의미가 있다. 나옹스님은 불교를 융성시키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전국을 다니다가 서운산 근처 대장암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사찰 소속 여성예인, 조선을 제패하다”
  


  5살때 불당골 들어와 15살때 꼭두쇠 올라

  경복궁 중창 공연서 정3품 ‘옥 관자’ 하사




<사진> 바우덕이가 근거지로 활동했다고 전해지는 안성 청룡사 전경.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이곳에는 유명한 사찰과 인물이 있으니 ‘청룡사’와 안성 남사당패의 전설적인 인물 ‘바우덕이’다. 사찰 청룡사는 고려시대 사찰로 1265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해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다. 이후 1364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사찰이름 유래도 의미가 있다. 나옹스님은 불교를 융성시키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전국을 다니다가 서운산 근처 대장암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이곳에는 유명한 사찰과 인물이 있으니 ‘청룡사’와 안성 남사당패의 전설적인 인물 ‘바우덕이’다. 사찰 청룡사는 고려시대 사찰로 1265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해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다. 이후 1364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사찰이름 유래도 의미가 있다. 나옹스님은 불교를 융성시키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전국을 다니다가 서운산 근처 대장암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이른 새벽 일어나 좌선에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다니는 용들이 보였다. “그래 이곳이야. 저렇게 많은 청룡들이 구름을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이곳에서 불법을 발흥시킬 수 있겠어.”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청룡사는 조선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조선시대는 불교를 배척했던 시기라 크게 사세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청룡사는 지역 주민들을 포용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룡사가 위치한 지역 이름이 ‘불당골’이라 불릴 만큼 사찰 중심의 공동체가 형성됐던 것.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청룡사에는 조선예인 가운데 크게 이름을 날린 인물이 있었으니 ‘바우덕이’다. 그는 안성 남사당패 소속으로 조선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기예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더욱 주변을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여성으로 조선 최고의 남사당 꼭두쇠(우두머리 혹은 상쇠)였다는 사실이다.

바우덕이의 이름은 김암덕(金岩德, 1848~1870)이었다. 한문이름을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다섯 살 때 병든 홀아비를 떠나 안성 청룡리 불당골에 들어왔다. 불당골에는 ‘청룡 남사당패’가 청룡사를 근거지로 전국에 공연을 다니고 있었다. 당시에는 안성에만도 10여 곳의 남사당패가 결성돼 기예를 겨루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고?” “몰라요.” “나이는 몇 살이냐?” “다섯살요.” “이름이 뭐냐?” “바우덕이요.”

어린 덕암은 깡마른 체구였지만 눈매만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반짝였다. “잘 왔다.” 불당골 촌장어른은 바우덕이를 청룡사 주지스님에게 데려 갔다. “스님. 한 식구가 늘었습니다. 오갈데 없는 아이라 저희들이 거두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사진> 청룡마을 사당골의 바우덕이 사당과 동상. 

주지스님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기근으로 식구들조차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사정을 아는 처지라 반길 처지는 못됐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의 딱한 사정이 얼굴에 묻어난 지라 “잘 하셨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불당골은 부처님의 그늘이 아니던가. 주지스님은 말했다.

“겨울이 지나면 공연을 나갈 터이니 신표(信標)를 속히 만드세요. 저번 겨울에는 공연 떠나기 전에 허겁지겁 만들어 보여주기 민망했다는 말들을 하더군요.” “예, 스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청룡사를 내려온 바우덕이는 염불, 소고춤, 풍물, 줄타기를 열심히 배웠다. 날렵한 몸에서 우러나오는 기예는 어떤 사내아이들을 능가했다. 그녀의 기예는 해가 갈수록 출중해 주변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저건 사람의 솜씨가 아니야. 분명 귀신이 조화를 부린거야.”

기예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기예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신들린 듯 나풀거리며 줄을 타는 바우덕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구나 여자의 몸이니 나이가 들수록 여성미를 더하자 그녀의 실력을 따라 올 자가 없었다. 그녀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른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간다.” 사람들은 유행가처럼 바우덕이를 칭송했다.

그녀의 나이 15살이 되자 안성 청룡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었다. 청룡 남사당패는 불당골에 거처하며 주야로 기예를 연습했다. 노숙이 불가한데다 놀이의 허가마저 잘 나지 않는 겨울철에는 아예 청룡사 경내에서 머물며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 댓가로 청룡 사당패들은 공연할 때 청룡사 스님들이 쓴 부적을 팔아 사찰불사에 보태기도 했다. 때는 조선 고종 2년(1865). 나라에서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큰 불사가 진행됐다. 조정에서는 어렵게 공사를 하고 있는 일꾼들을 독려하기 위해 틈틈이 공연을 펼쳤다. 이곳에 청룡 남사당패도 초청됐다.

“이번에 나가 우리 청룡 남사당패의 실력을 보여 줘야 합니다. 경복궁 중건에는 많은 사람들이 노역을 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들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도록 정성껏 공연을 준비합시다.”

꼭두쇠 바우덕이의 의지는 결연했다. 드디어 공연초대를 받은 날 보무도 당당하게 청룡 남사당패도 깃발을 들고 경복궁 공사장 공연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전국에서 이름난 광대패들이 총 집결해 있었다. 바우덕이가 이끄는 풍물패는 ‘돌우물 풍물패’였다. 저마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넘쳤다.

“최고다. 최고. 한번더. 한번더.”

이 자리에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도 자리를 함께 했다. 그는 침체한 조정의 부흥을 기원하며 경복궁 중건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잘했다. 저 풍풀패에 은전 100냥을 포상하라.” 대원군은 심신이 피곤한 사람들을 위해 땀을 마다하지 않는 광대패들을 격려했다. 드디어 바우덕이가 이끄는 ‘돌우물 풍풀패’ 공연 차례가 됐다.

“덩더쿵 얼쑤. 덩더쿵 얼씨구.”

신명나는 풍물공연에 이어 소고춤, 어름(줄타기), 살판(땅재주)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돌우물풍물패에 대중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더구나 꼭두쇠인 바우덕이의 신들린 듯한 기예솜씨는 많은 일꾼들의 혼을 빼고도 남았다.

“역시, 조선 최고의 꼭두쇠 바우덕이구나.” 저마다 이구동성으로 바우덕이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공연을 보고 있던 흥선대원군도 크게 박수를 치며 돌우물풍물패의 기예를 칭찬했다. “과연 조선 최고의 기예단이구나. 여봐라 저기 돌우물풍풀패에게는 정3품 당상관의 옥관자를 내리도록 하여라.”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풍물패가 가는 자리에는 의례껏 다른 풍물패는 깃발을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 일상사가 됐다. 그래서 ‘돌우물풍풀패’를 일컬어 ‘영좌(領座-깃발을 내린다는 의미)풍풀패’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그토록 기예에 뛰어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 23살에 폐병을 얻어 요절하고 말았다. “내가 죽거던 우물가에 묻어주세요.” 그녀의 시신은 그녀를 사모하던 이경화라는 남사당 대원에 의해 불당골 어느 우물가에 묻혔다. 100여 년이 지난 뒤 바우덕이를 추모하는 후세 남사당패 대원들은 그녀의 무덤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현재 서운면 청룡리 산1-1번지에 가묘를 만들어 파란만장하게 한 시대를 살다간 바우덕이를 기리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는 안성시가 매년 10월초에 바우덕이의 뜻을 기리는 ‘바우덕이 축제’도 성대하게 개최하고 있다.

안성=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이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안성나들목에서 나와 서운면으로 들어온다. 면 소재지에 못미쳐 57번 지방도로를 타고 진천방향으로 내려오면 34번 국도와 만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바우덕이 묘가 있고 계속해서 들어오면 좌측에 청룡호수가 보이고 안으로 들어오면 청룡사가 있다. 사찰 아래는 청룡마을이고 좀더 들어가면 사당골에 바우덕이 사당이 있다. 청룡사 (031)672-9103

참고 및 도움: 안성시 문화유산해설사 이기호씨, <문화여행가이드 안성>, 청룡마을 이정자(72)할머니.



이 대웅전은 안쪽에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범종을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과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