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초록 눈물’ 일렁이는 ‘토지’의 고향

아기 달맞이 2009. 3. 18. 00:29

경남 하동 평사리 악양 들판은 지금 서럽도록 청초하다. 이곳의 산과 들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다. 5일 선생을 떠나보낸 슬픔에 너른 들판엔 ‘초록 눈물’이 가득하다.


서희와 길상을 닮은 소나무

악양 들판은 지리산 남부능선 끝단 형제봉(1115m) 치맛자락에 안겨 있다. 동쪽으론 칠성봉·구제봉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고, 남쪽엔 전남 광양 백운산(1218m)이 섬진강 푸른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면적은 2.7㎢. 예전엔 드넓은 모래톱과 척박한 논밭이 전부였다. 밀물 때 강물이 역류하고 여름엔 홍수마저 잦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둑을 쌓으면서 만석지기 서넛은 나올 만한 옥답으로 바뀌었다. 흙먼지 풀풀 날리던 둑길도 벚꽃 명소가 됐다.

소설 속 공간을 재현한 아흔아홉 칸 최참판댁은 평사리 상평마을의 언덕배기에 있다. 돌담이 멋스러운 고샅을 사이에 두고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과 실제 마을 사람들의 집이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다. 가상의 공간인 동시에 현실의 공간이다. 둘의 조화는 최참판 댁에서 절정을 이룬다. 소설이 시작되고 소설이 끝나는 공간인 별당을 비롯해 조경수 하나하나까지 소설에서 묘사된 그대로 꾸며졌다. 방문객을 맞는 나이 지긋한 ‘명예 최참판’도 있다. 고즈넉한 별당 마루에 서면 누구나 소설 속 서희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솟을대문 밖에는 악양 들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두 그루 소나무가 서로를 벗해 서 있다.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했던 소설 속 서희와 길상처럼….

시 같은, 그림 같은, 연극 같은

형제봉 한산사에 올라 악양 들판을 바라본다. 한 편의 시를 닮았다. 반듯반듯한 보리밭·밀밭 사이로 농로가 빨랫줄처럼 뻗어 있고, 섬진강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감아 내려간다. 꿈 많은 문학소녀 시절 평사리를 방문했던 박경리 선생이 훗날 ‘토지’의 배경으로 악양 들판을 선택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다시 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 같다. 한겨울 혹한을 이겨낸 밀과 보리가 무릎 높이로 자라면 19번 국도의 벚꽃이 한바탕 꽃잔치를 벌인다. 이어 누렇게 익은 밀과 보리 수확이 끝나면 다시 푸른 못자리로 변신한다.

내 평생을 바친 연극무대 같기도 하다. 초록과 황갈색이 뒤섞인 밀밭·보리밭이 무대, 밭두렁을 연보라색으로 수놓는 앙증맞은 자운영은 소품이다. 주연배우가 우아한 날갯짓의 백로라면, 조연은 꽃을 찾아 날아드는 벌과 나비다.

악양 벌판이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어둠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이다. 멀리 칠성봉 위로 태양이 고개를 내미는 바로 그때.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들어 낸 안개는 화염처럼 활활 타오르다 순식간에 스러진다. 이어 산바람·강바람이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빗질하기 시작한다. 서로 부대끼며 술렁대는 밀과 보리 이삭. 모내기를 앞둔 무논에선 백로 무리가 너울너울 날아오른다.

침략과 전쟁, 역사가 남긴 상처

악양 들판의 원래 이름은 ‘악양 무딤이들’이었다.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한 소정방이, 땅 모양이 중국 악양을 닮았다고 이런 이름을 붙였단다. 평사리 강변 모래밭은 금방, 모래톱 안에 있던 호수는 동정호로 명명했다. 악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소상팔경(瀟湘八景)도 중국에서 유래됐다. 후난(湖南)성의 소(溯)강과 샹(湘)강이 합류하는 동정호의 정경을 읊은 시가 악양의 경치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평사리 외둔 마을 앞에 위치한 동정호는 둑이 생기면서 바싹 말라 흔적조차 사라졌다. 새들의 보금자리였던 호수는 버드나무가 무성한 숲으로 변했다.

박경리 선생이 평사리 땅을 밟기 400여 년 전 이순신 장군도 이곳을 찾았다.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당한 뒤 백의종군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을 떠난 지 두 달 만인 1597년 5월 중순. 장군은 구례를 거쳐 평사리의 이정란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지금 이정란의 집은 흔적조차 없지만 평사리 입구에는 충무공 백의종군로 표지석이 세워져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지리산 일대에서 가장 넓은 곡창이 악양 들판이다. 빨치산들은 추수철 즈음 일주일 동안 악양을 장악했다. 당시 수많은 농민이 강압에 의해 쌀가마를 등에 지고 입산했다가 좌파로 내몰려 수난을 겪기도 했다.



Tip
■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19번 국도로 갈아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최참판댁과 평사리 악양 들판이 나온다. 서울∼하동 직행버스는 4시간30분. 하동읍내에서 평사리까지 버스가 다닌다.

■ 하동의 별미는 재첩국. ‘보리누름엔 하동 재첩이 최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5∼6월 섬진강에서 잡은 재첩은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하동읍 목도리의 하동원조할매재첩식당(055-884-1034)은 정정순 할머니의 ‘손맛’으로 유명한 곳. 재첩정식 7000원, 참게정식은 1만원이다.

■ 화개면 부춘리의 전원민박농원(055-883-7468)은 농협 지정 팜스테이 농가. 두릅·비비추·죽순·곰치 등 지리산 자락에서 나는 산채로 조리한 산채정식이 맛깔스럽다. 두 시간 전에 예약해야 맛볼 수 있다. 1인분 8000∼1만5000원.

■ 하동은 야생차의 고장이다. 쌍계천 상류의 명원다도예절문화원 하동지부(055-883-2001)는 찻잎 따기, 차 만들기, 다도 예절 등 다도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참가비 1만원. 체험객이 예약하면 무료 숙박도 가능하다. 21∼25일에는 제13회 하동야생차문화축제도 열린다. 김덕수 사물놀이(21일)를 시작으로 가수 정태춘과 시인 정호승 등이 출연하는 차와 시, 그리고 다악 콘서트(22일), 쌍계사 산사음악회(23일) 등이 열린다. 하동군 문화관광과 055-880-2375.



■박정자씨는=1942년 인천 출생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 중 한 사람이다. ‘대머리 여가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신의 아그네스’ ‘햄릿’ ‘테레사의 꿈’ ‘19 그리고 80’ 등 150여 편의 연극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14편의 영화에 출연. 현재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과 한국영상자료원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문화훈장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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