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괄한 서귀포 아줌마 바느질에 꽃히다 | |
10년전 인사동서 모시 조각 보고 홀딱 반해 만들기 시작 하와이서 전시까지 했지만 작가 꿈꾸지 않는다 그저 좋아서 만들고 나누어 준다 이것이 문화 아니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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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앉자 미처 끄지 않은 전화기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입춘대박(立春大舶)이란다. 마침 입춘 날이긴 했지만 대길(大吉)도 아닌 대박이라는 생뚱한 춘첩(春帖)이 마뜩치는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휴대폰을 가지고 난 다음부터 막을 수 없는 것이 문자메시지요, 줄임말이자 촌철살인 같은 이모티콘의 범람인 것을. 거기에 더해 습관성 문자라고 할 수 있는 ^^나 ㅋㅋ 혹은 ㅎㅎ와 같은 것들이 곁들여지지 않은 표준적인 문자를 사용하여 보내면 자칫 고리타분한 신세를 면하지 못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상대방에게 더듬더듬 입춘소박(立春素樸)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금세, 하필이면 왜 소박이며 도대체 그 뜻이 무엇이냐고 답이 왔지만 못 본 체 전화기를 꺼버렸다. 공항에 내리자 서귀포에 사는 오애경(38)씨 부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작은 자판을 누르며 쏜살같이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손놀림을 뽐내듯이 오애경씨 또한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다. 그렇다고 재빠른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니의 손놀림은 어눌하고 느려 터졌을지라도 마음이 매섭고 다부지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손놀림은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려니, 그니는 그 마음으로 낱낱의 천 조각을 이어 붙이곤 한다. 흔히 조각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그니의 직업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주부로서의 그니가 지닌 여러 가지 일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그니는 작가가 아니다. 말했듯이 그저 아이를 키우며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주부이다. 우리네 살림살이들이 팍팍 했을 때는 옷을 만들고 남은 허드레 천 조각 하나까지도 버리는 법이 없었다. 갖은 색깔과 모양의 천 조각들을 모아 이리 꿰고 저리 붙여서라도 보자기를 만들어 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조각보가 지닌 색이나 낱낱의 천 조각들이 지닌 모양은 의도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바늘에 실을 꿰어 꼼꼼히 잇대어 붙이는 일을 하던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닌 우리들의 할머니나 어머니들이었을 뿐이었다.
자투리 천조각 재활용하기
나의 어머니 또한 그랬다. 집에는 언제나 자투리로 남은 천 조각들이 수두룩했으며 조각보뿐 아니라 양말에 구멍이 나거나 내복이 닳아 무릎이 터지기라도 하면 천 보따리를 꺼내 놓고는 당신의 깜냥으로 알맞은 모양과 색을 골라 꿰매곤 했다. 때로는 발칙한 색깔의 천으로 뒤꿈치를 꿰맨 양말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골목길에서 놀다가 들어가면 가장 먼저 들춰보던 밥상 위의 조각보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멋을 부린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 보여주려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 당신의 안목으로 가족들을 위한 밥상에 먼지가 내려앉는 것을 막으려 만든 것일 뿐이었다. 그동안 별러오던 입춘굿을 보려는 욕심이 컸지만 구태여 먼 제주도까지 가서 그니를 만난 까닭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니의 조각보는 누구에게 보여주려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만드는 것이다. 내 보기에 그것은 아름다운 행동이다. 흔해빠진 전시장에서 전시만 하면 모두 작가랍시고 허세를 떨고 다니는 시대에 보기 드문 일인 셈이다. 사실 그니도 전시를 하기는 했다. 2003년, 미국의 하와이 대학 박물관에서 주최한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 전시에 초청을 받아 스무 점의 보자기를 내 걸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니는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지 않는다. 더구나 작가로서의 꿈도 꾸지 않는다. 나는 그 생각 버리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 스스로 지닌 솜씨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 위해 솜씨 발휘하는 기쁨
나 또한 그니를 만날 때마다 그저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어느 유명한 사람들의 바느질을 흉내내거나 몬드리안의 그것처럼 세련된 구도나 면 분할에 신경쓰지 말라고 말이다. 그저 나의 어머니나 당신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이다. 내가 그니를 만난 즈음은 사라져가는 규방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을 무렵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그니가 처음 내 앞에 내밀었던 조각보가 비록 투박하고 세련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나는 그니가 만든 결과물에 천착하지 않고 사람을 보려 애를 쓰곤 했다. 그니를 보기 시작한 지 겨우 4년 남짓하지만 사실 조마조마 하기도 했다. 혹시나 손을 놓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규방문화를 순 우리말로 바꾸면 이새 정도가 되지 싶다. 이새란 바느질을 포함한 여성들의 집안일을 일컫는 말이니까 말이다. 지금과는 달리 농경사회에서는 일이 곧 문화였다. 그 이새의 장점이란 큰 틀에서 보면 같아 보일지라도 각항으로 들어가면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장맛이 서로 다르듯이 안방에서 발생되는 문화들 또한 다르기 마련이라야 한다. 의도적으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야 있겠느냐마는 사람이라는 것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들이 내 놓는 문화 또한 같을 수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적어도 내가 본 그니는 그랬다. 눈을 뜨면 속도만이 살아남을 길이라는 광고가 난무하고 하루가 다르게 첨단 IT(정보기술)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이지만 그니의 바늘은 어김없이 한 땀 한 땀 거르지 않고 바늘땀을 채워야 한다. 힘겨운 집안 일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반짇고리를 앞에 끌어다 놓아야 하니 무에 그리 흥겨울까마는 그니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원숙해져가고 있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각보 하나를 만드는데 야무진 그니의 손으로도 서너 달이 걸린다고 하니 더디기는 한량없다. 그래도 그 일에서 손을 놓지 않는 그니는 왜 그 일을 하는 것일까. 대답은 그저 좋다는 것이다. 그뿐이었다. 한때는 만들어서 팔아 볼까도 생각했지만 이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마음 맞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집안 꾸미는 데 쓸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흥겹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조각보를 포함한 규방문화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저 자신이 지닌 깜냥대로 만들고 그것을 나누며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이 문화가 아니고 무엇일까. 전통문화라는 것들이 무대로 혹은 전시장 안으로만 들어가서야 그것을 어찌 온전한 문화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적어도 전통문화라는 것은 무대 위에서 정형화 되거나 액자 속에서 박제되기보다 오히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펄펄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활속에 살아있는 전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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