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소소한 여행 이야기 선운산 봄마중

아기 달맞이 2014. 2. 28. 08:48

이른 봄은 발견의 환희로 가득하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처럼 신비롭고 오묘한 자연의 탄생과 마주할 수 있다. 화사한 봄날, 강렬한 여름, 오색찬란한 가을과 새하얀 겨울, 사계절 모두를 기대하고 상상할 수 있는, 지금은 이른 봄이다. 두근두근. 반가운 만남 앞에는 늘 설렘이 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서둘러 배낭을 꾸린다. 봄을 마중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 야영장 내 봄꽃, 봄 새싹

서둘지 않아도 '때'는 도래한다

[선운사부터 도솔암까지의 길]

봄맞이 대청소하듯 캠퍼의 배낭도 재정비에 들어간다. 겨울용 장비들을 배낭에서 빼내고 가벼운 계절에 필요한 것들로 다시 채웠다. 야영을 시작한지 한 해가 더 늘어났고, 배낭의 무게는 2kg이 줄었다. 절대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진 배낭 무게는 11kg. 옷차림마저 가벼워지니 발걸음도 사뿐하다. 두리번거리는 이방인을 구경하는 지역민들 사이, 고창 버스터미널에서 선운사행 버스를 기다렸다. 서울 교통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외에 변한 것 없는 농어촌 시내버스를 타고, 30여 분 후 선운사 입구에 도착했다. 정류장 옆 관광지도를 확인하고 선운산도립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공원 안에는 선운사 대웅전을 비롯한 지장보살좌상, 도솔암 마애불과 같은 문화재와 장사송, 동백나무숲 등의 천연기념물이 여럿이다. 입구에서 얼마 걷지 않아 그 중 가장 먼저 송악(두릅나무과의 덩굴식물)과 마주했다. 오래전부터 조금씩 쌓여진 자연의 모습은 늘 경이롭다. 선운사 방향 오른쪽으로 조성된 생태숲을 따라 길을 이어가면 아담하고 소박한 선운사 일주문에 도달한다. 야영장에 터를 잡기 전 도솔암까지 다녀오려 서둘렀지만, 회색빛 어둠은 산 너머로 이미 몰려오고 있었다. 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검표소까지 환한 미소를 입에 걸치고 걸었다. "배낭을 두고 도솔암까지 다녀와도 될까요?" 안내소에 배낭을 맡기는 것은 이제 꽤나 익숙하다. 홀로 여행객의 최대 장점이자 무기로 때에 따라 잘 활용하는 것이 좋다.

이파리 나부끼는 소리조차 없이, 저녁으로 향하는 선운사 경내는 조용했다. 조심조심 숨 죽이며 셔터를 찰칵거린 후 이내 도솔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솔쉼터에서부터 도솔암까지는 약 2.5km. 차가 다니는 임도와 사람이 다니는 숲길로 이어져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바닥을 보며 걸었다. 낙엽들 사이로 연둣빛 어린잎들이 꼼지락거렸다. 어둠이 짙어지기 전 도솔암에 도착해 마애불상까지 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약간의 오르막길과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소리 끝에 도솔암과 마주했다. 태양은 이미 산 너머로 내려가 붉은 여운만을 남기고 있었다. 저녁 공양 전 경내를 돌며 불경을 읖조리는 스님과 조용히 눈인사를 나누었다. 심장박동은 차분해지고 봄을 서둘던 마음은 가라앉았다. 도솔암 위 커다란 바위 벽에 새겨진 마애불상을 바라보았다. 특정한 신을 향하지도 않고, 특별한 바람도 없이, 그저 경건하게 기도했다. 나와 세상과 우주에 대해. 언제 내 뒤를 따랐는지 알 수 없는 어느 여인 하나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 역시 마애불상과 마주했다.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 위에는 내원궁(도솔암 지장보살상이 있는 불당)이 자리한다. 기다랗고 좁다란 돌계단을 올랐다. 끝없을 듯 이어진 길은 언제나 그렇듯 끝이 난다.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천마봉이 맞은편에 우뚝 솟아 있다. 내원궁에서 바라보는 천마봉은 원숭이를 연상케 했다. 암자 지킴이도 내려간 시각, 내원궁 한 바퀴를 둘러보고 다시 아래로 향했다. 도솔암 300m 아래 자리한 장사송(약 600살 반송)과 진흥굴(진흥왕이 수도했던 동굴)을 구경하고 나니, 숲은 낮보다 순수한 밤을 맞이했다. 나의 서두름과 상관없이, 밤은 자신의 시간에 맞게 땅으로 내려왔다.

↑ (위)내원궁 가는 계단, (아래)도솔암 가는 길 도솔암찻집

↑ (위)산악회 시산제, (아래) 마애불상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야영장에서 만난 시산제]

밤공기가 언제 이렇게 따뜻해진 것인가? 봄은 공기에서 그 시작을 먼저 알렸다. 침낭 안에 누워 텐트 입구를 활짝 열어놓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쌀쌀하긴 해도 춥지 않은 이른 봄이다. 구름이 많은 탓에 띄엄띄엄 보이는 별들이 더욱 환하게 반짝였다. 차가운 공기에 흠칫 놀랐다. 깜빡 잠이 든 것이었다. 비몽사몽으로 텐트 입구를 닫고 깊은 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에 약간의 놀라움과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무료 야영장, 혹은 유명한 캠핑장에서 가끔 만나는 아침 소리이다. '왜 펜션에 놀러온 것처럼 떠드는지 모르겠어!'라는 구시렁과 함께 텐트 문을 열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봄을 마중 나온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몇 몇의 사람들, 그들이 내거는 현수막. 광주 지역의 한 산악회에서 시산제를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시산제는 산악인들이 연초에 단 한 번, 산신령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산꾼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자연 보호를 약속하는, 그들만의 봄맞이 행사이다. 시산제 풍경은 처음이었다. 이날의 여행 계획을 급 변경했다. 여행은 늘 그렇다. 이런 기막힌 우연은 반드시 인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시산제에 참여하고 싶어요." 봄바람이 살랑, 나와 그들 사이에 흘렀다.

산악회원들은 선운산 등산로 들머리에서 각자의 산행을 위해 흩어졌다가, 시산제를 위해 야영장에 하나 둘 모이고 있었다. 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등산을 하고 선운산관광호텔에 있는 사우나에서 몸을 씻어냈다. 그리고 오후 1시, 시산제가 시작되었다. 절차에 따라 산악인에 대한 묵념 후, '산악인의 선서'가 야영장 내에 강인하게 울려 퍼졌다.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 노산 이은상-

↑ (위)선운사 버스정류장, (아래)시산제 음식

어디 산악인에게만 이를 말이랴. 자연을 떠도는 여행객 모두에게, 아니, 이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약속이리라. 15분 가량의 제사가 진행되고 함께 모여 제사 음식을 나누었다. 과일을 제외한 모든 음식은 몇몇 회원이 집에서 정성껏 준비해 온 것들이었다. 막걸리, 모주 등과 같은 직접 담근 술들과 광주 묵은지, 삭힌 홍어전, 삼색 나물과 삼색 묵 등 소박하지만 푸짐한 한 상을 함께 했다.

함께 밥을 나누는 것이 식구라 한다. 자연 속을 돌아다닌다는 공통 주제 덕분일지도 모른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들과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숙하고 편안해졌다. 얼마 후, 솔로캠퍼인 나는 야영장에 남아 길을 이어가기로 하고, 회원들을 실은 버스는 야영장을 떠났다. 서로의 연락처는 나누지 않았다. 그저 언제고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또 한 번의 우연을 기다린다. 영원한 헤어짐도 만남도 없다. 떠도는 여행자의 작은 깨우침이다. 그래서 모든 인연에 감사하고 또 행복할 수 있다. 수천만년 전부터 자연히 찾아오는 봄을 해마다 감탄하고 기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야영장을 떠나기 직전, 작은 보라색 들꽃을 발견하고 봄처럼 환하게 웃음지었다.

고창터미널을 출발한 고속버스는 정확히 3시간 15분을 내달려 서울에 도착했다. 어둠이 내려 앉은 서울의 밤, 포근한 공기가 감돌았다. 내 손을 꼭 잡고, 봄이 따라왔다. '어서와, 봄'.

선운산 등산로

1코스 (4.7㎞, 왕복 3시간)

관리사무소-선운사-장사송·진흥굴-도솔암-마애불상-용문굴-낙조대-천마봉2코스 (6.1㎞, 왕복 5시간)관리사무소-일주문-석상암-마이재-도솔산-참당암-소리재-낙조대-천마봉3코스 (10.8㎞, 왕복 8시간)관리사무소-경수산-마이재-도솔산-견치산-소리재-낙조대-천마봉4코스 (8.3㎞, 왕복 10시간)관리사무소-도솔재-투구바위-사자암-쥐바위-청룡산-배맨바위-낙조대 *2월15일~4월 15일, 11월 15일~12월 15일 일부 구간 입산통제Info선운산도립공원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선운산 혹은 도솔산이라고도 불리며 두 이름 모두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뜻을 지닌다. 지정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을 비롯해 야영장, 생태숲, 선운초서문화관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에는 숙박업소와 음식점, 수퍼 등이 있다. 벚꽃과 계곡, 단풍과 설경으로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선운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연못인 도솔제는 많은 사진사들의 촬영 포인트로 유명하다. 동백 또는 춘백를 감상하려면 3월~4월에, 동백과 함께 청보리밭을 걷고싶다면 4월~5월에 찾아가는 것이 좋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250 선운사 •063-560-8681 / http://culture.gochang.go.kr •공원 입장료 무료(선운사 입장시 문화재관람료 3000원/성인) •고창버스터미널-선운산행 시내버스 (30분 소요/2500원) / 06:45~19:55, 14회(운행간격 30분~1시간) •선운산관광호텔 / 063-561-3377 / www.sushotel.com / 요금 8만~25만원 [글·사진 김애진(사진가, 여행작가) 동백 사진 고창군청]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417호(14.03.04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