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1918~2013년)은 5일(현지시간) 95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평생 인종차별 해소와 화합을 위해 살아온 인물이다.
27년 간 옥살이를 한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평생을 인종차별과 싸운 투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 에이즈 퇴치 자선 운동, 아파르트헤이트(예전 남아공의 인종 차별정책) 종식 등 알려진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개인적인 발렌타인데이 에피소드, 잔혹한 면 등 일반적으로 모르고 있는 만델라에 대해서 알아봤다.
▲ 국가의 아버지
남아공 지폐(10·20·50·100·200랜드)에는 모두 만델라의 얼굴이 들어갔다.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오랜 수감 생활을 했던 만델라가 석방된 지 22주년이 되는 지난해 11월11일 새 지폐에 대해 "남아공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작은 표시"라고 밝힌 바 있다. 남아프리카항공은 자사의 항공기에 만델라의 이미지를 새겨 넣기도 했다.
▲ 발렌타인 데이
만델라는 70대가 넘어서 발렌타인 데이 선물을 받기 시작했다. 한 기자는 1995년 만델라 대통령에게 발렌타인데이를 지키는지 질문했고, 그는 그가 살아온 배경과 감옥에서 석방된 후에야 비로소 발렌타이데이를 제대로 보낼 수 있었다고 편지를 보냈다.
▲ 두 개의 국가(國歌)
만델라 대통령은 취임식 때 남아공의 기독교학교 교사였던 '에녹 손통가'가 작곡한 '주여 아프리카를 구원하소서(Nkosi Sikelel' iAfrika)'와 옛 국가인 남아프리카의 소리(Die Stem) 등 두 개의 국가를 불렀다.
▲ 새로운 인생
만델라는 27년 간을 교도소에서 보낸 뒤 73세의 노인이 돼서 자유를 얻었다. 그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에는 "감옥을 나와 게이트를 통과할 때에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느꼈다"고 밝혔다.
▲ 월드컵
만델라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월드컵 개막일인 6월12일에는 바로 전날 증손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해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남아공에서는 월드컵을 유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가 과연 월드컵 기간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만델라는 결승전과 폐막식에 부인 그라사 마셀 여사의 부축을 받아 참석했다.
▲ 화합의 상징
넬슨 만델라는 1918년 트란스케이의 수도 움타타의 한 작은 마을에서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델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영국식 이름인 '넬슨'과 그의 부친이 지어준 아프리카 이름인 '롤리흘라흘라'다. 남아공 국민은 만델라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뜻으로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가문 이름을 따 '마디바'로 부른다.
▲ 이중인격의 만델라? 그의 '잔혹한 면'
성자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만델라는 쓴 소리로 유명하다. 그는 1990년 당시 남아공의 드 클레르크 대통령이 무능력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데 이어 아라파트를 포함, 쿠바의 카스트로, 리비아의 카다피가 ANC(아프라키민족회의)의 투쟁을 끝까지 지원해준데 대해 고마음을 표시하며 "자신의 지원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만델라는 '폭력의 옹호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에이즈와의 사투
만델라는 4년의 재임 기간이 끝난 1999년 대통령직을 자신이 점찍은 후임에게 넘겨주고 당시 남아공의 가장 큰 문제였던 에이즈와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만델라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자선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2005년에는 비밀로 부쳐졌던 장남 마가토 만델라의 죽음의 원인이 에이즈라고 밝히면서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 "민주주의·모든 국민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는 화합을 이루는 사회를 위해"
남아공 정부가 무자비한 폭력으로 흑인들을 탄압하자 사보타주(Sabotage·태업)로 맞서며 저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프리토리아에서 열린 재판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감과 인종차별 통치를 종식시키기 위한 의지를 드러냈다.
만델라는 1964년 열린 재판에서 "나는 지금까지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투쟁해 왔다"며 "나는 백인만을 위한 통치뿐만 아니라 흑인만을 위한 통치도 반대한다. 나는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모든 국민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는 화합을 이루는 사회를 꿈꾼다. 이것은 내가 꿈꾸는 사회로 달성하고 싶은 목표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목표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2개월 후 만델라와 7명의 피고인들은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럭비로 하나가 되다
만델라는 1995년 남아공의 상징인 초록 유니폼을 입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다. 당시까지 럭비는 백인들의 스포츠였고 초록 유니폼은 흑인들에게는 증오의 상징이었지만 만델라는 이런 편견을 깼다.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에 모인 6만 명의 관중들은 일제히 "넬슨! 넬슨! 넬슨!"을 외쳤다. 만델라는 뉴질랜드를 제압한 남아공 선수들을 격려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배우 겸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빅터스(Invictus)'라는 영화에서 백인과 흑인들이 스포츠로 하나가 되는 장면을 담았다.
▲ '두 번 다시는...'
만델라는 1994년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남아공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역사적인 그의 취임식에는 여러 국가의 지도자들과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다. 만델라는 취임 연설에서 "앞으로 더 이상은 이 아름다운 땅에서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탄압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 죄수번호 46664
숫자 '46664'는 만델라가 남아공 로벤섬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죄수번호다. 그는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위치한 교도소에서 환갑을 지내는 등 18년의 옥고를 치렀다. 1964년에 로벤섬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뜻이다. 남아공 탄압의 표상이던 이 숫자는 이제 인간 구원의 상징이 됐다.
▲ "네 자신을 봐라"
만델라가 남긴 많은 말들은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업적으로 서로 평가를 하려곤 한다"며 "감옥은 정직, 진실, 소박함, 겸손, 너그러움 등 많은 부재를 채워준다.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넬슨과 위니
만델라의 두 번째 부인인 위니는 그와 결혼해 3년을 같이 살았다. 이후 만델라가 27년 수감 생활을 하게 됐으며 석방 후 얼마 되지 않아 이혼했다. 그녀는 만델라의 수감 시절 나름대로 흑인 민권 운동에서 이름을 얻었으나 이후 흑인 정치 세력을 이용한 전횡과 폭력조직을 거느리며 사람들을 위해한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만델라는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세 번째 부인 그라사 마셸(67)과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다 임종했다. 마셸 여사는 사모라 마셸 전 모잠비크 대통령의 부인이었다.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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