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작가가 전북 김제시에 개관한 `아리랑문학마을`의 이민자 가옥 앞에서 당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해냄출판사]
여문 벼의 물결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버스는 조정래(70)의 소설 『아리랑』(해냄·1995)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김제평야는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조 작가는 소설 속에서 이 땅을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가장 먼저 일제의 수탈이 시작됐고, 최후까지도 착취의 대상이 됐던 곳. 『아리랑』의 배경은 김제가 돼야만 했다.
4일 작가와 함께 전북 김제시 죽산면에 개관한 ‘아리랑 문학마을’을 찾았다. 부지 2만 9316㎡(약 8868평)에 들어선 문학마을은 김제시가 지난 2003년 ‘아리랑 문학관’을 세운 후 10년 만에 조성한 테마 마을이다. 따사로운 가을볕 아래 상상 속에 존재했던 『아리랑』의 풍광이 펼쳐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감골댁, 송수익, 지삼출 등이 살았던 내촌·외리 마을. 일제의 수탈 속에서도 독립의 염원을 품고 살았던 우리 민초들의 삶이 당시 고증을 거쳐 재현돼 있었다.
조씨가 가장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춘 곳은 갈대로 만든 ‘이민자가옥’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조국에서 살지 못한 사람들이 만주 등지로 이주해 터를 잡은 곳이다. 발을 뻗으면 벽이 닿을 만한 좁은 방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는 “이런 곳에서 자면서 풍찬노숙했으니 얼마나 추웠겠는가. 이들의 피로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이니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원고지 2만 매에 달하는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중국, 러시아 등 이민자들이 머물던 곳으로 일일이 취재 여행을 떠났다. 그러니 더 애틋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착취의 전진기지였던 면사무소·주재소·우체국 등의 근대 기관도 볼거리였다. 실내로 들어서면 소설 속에서 각 기관을 묘사했던 대목이 삽화와 함께 한쪽 벽에 새겨 있었다. 미선소(米選所)에서 십장에게 몸수색을 당하며 울고 있는 소녀의 그림은 유독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몸 조사는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의 내용이 그 장소와 겹쳐지며 수난의 역사를 되새김했다.
하얼빈 역사를 60% 크기로 축소 재현한 장소도 이색적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철로 앞에서 작가는 “역사를 망각하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문학마을이 역사를 환기하고 내일을 사는, 미래를 여는 나침반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관람료 무료. 063-540-2929.
김제=김효은 기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