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와 宋의 차문화 교류
- 《宣和奉使高麗圖經》을 中心으로
박동춘(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1. 서론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고려도경)》(以下는 《고려도경》이라 약칭함)은 국신사(國信使)로 고려를 예방(禮訪)한 서긍(徐兢)의 견문록이다. 그는 국신 사절로 고려를 다녀간 후, 경과와 견문을 휘종에게 보고했다. 이것은 일종의 사행보고서(使行報告書)로 송(宋)과 고려의 차문화 교류뿐만 아니라 고려의 사회, 문화, 한·중 교류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더구나 《고려도경》의 〈궁전(宮殿)〉과 〈연례(宴禮)〉, 〈관사(館舍)〉, 〈기명(器皿) 삼(三)〉, 〈주즙(舟楫)〉의 자료를 통해 고려의 차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긍이 고려에 파견된 것은 인종(仁宗, 1122~1146)이 즉위한 다음 해이다. 인종의 아버지 예종(睿宗, 1106~1122)은 요(遼)와 금(金)을 적절히 이용하여 국내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북송(北宋)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치(文治)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안정은 고려가 난만(爛漫)한 차문화를 구가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당시 고려의 사찰과 귀족들은 음차(飮茶)가 일상화되었는데, 왕은 공이 있는 관료에게 차를 빈번히 하사하였고, 상거래를 통해 차의 수요를 충당하였다.
서긍이 묵었던 관사(館舍)에는 다구가 구비되었고 하루에도 세 차례나 차를 공여(供與)하였다 하니 고려의 끽다(喫茶)가 귀족층을 중심으로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사절단의 공식적인 의례에 차가 정례화(定例化)된 것은 고려인의 차에 대한 인식 정도와 끽다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고려와 송의 차문화 교류는 구법 수행승, 사행신(使行臣), 그리고 해상 무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구법 수행승들의 역할이다.
나말여초(羅末麗初), 선종의 유입시기에 불법을 구하고자 중국을 내왕하던 구법 수행승들은 선수행 중, 끽다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차와 선종이 함께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고려와 송의 차문화 교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은 수행승이며, 고려의 끽다가 확대된 시점에는 사신으로 내왕했던 견사(遣使)과 해상 무역을 하던 상인들이 차문화 교류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서긍이 고려에 파견될 당시 고려의 끽다층은 귀족을 중심으로 문사들까지 확대되어 차의 수요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차의 수요는 고려에서 이미 생산된 토산차와 사행(使行) 무역이나 사무역을 통해 공급되었다.
더구나 당시 송의 차문화는 어느 시기와도 비견할 수 없는 절정기를 구가했고 대외적으로 차 교역을 확대하여 국가의 재원을 충당하는데 기여하였다. 송이 이러한 차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휘종(徽宗)의 역할이 크다. 실제로 그의 차에 대한 애호(愛好)와 심미안(審美眼)은 차문화를 이끈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대의 고려가 난만(爛漫)한 차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첫째 고려가 사회적으로 안정되었고, 둘째는 송과의 지속적인 차문화의 교류로 인해 새로운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으며, 셋째 고려가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수행 중에 보편화된 끽다 풍속이 귀족층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 소고(小考)에서는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을 통해 고려과 송의 차문화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고려에 어떠한 차문화가 있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2. 《선화봉사고려도경》의 판본과 문헌적 의의
서긍(1101~1153)은 화주(和州) 역양(歷陽) 사람이며, 권문세가 출신으로1) 그의 자(字)는 명숙(明叔)이며, 호(號)는 자신거사(自信居士)이다. 그는 문학지사(文學之士)로 그림과 글씨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정화(政和) 4년(1114)에 장사랑(將仕郞)에 임명되었고 선화(宣和) 5년(1123) 국신사(國信使) 중에 소제할인선예물관(所提轄人船禮物官)으로 고려에 파견되었다.
그가 개경(開京)에 다녀간 경과와 견문을 그림과 함께 엮어 휘종(徽宗, 1100~1125)에게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행보고서(使行報告書)이다.
서긍이 고려에 파견된 것은 인종(仁宗)이 즉위한 다음 해이다. 서긍은 국신소(國信所) 사절단(使節團)의 일환으로 파견되었으나 고려 예종(睿宗)의 서거로 인해 제전(祭奠)과 조위(弔慰)의 임무를 함께 수행(隨行)하였다.
서긍은 개경에 머문 한 달간 공무(公務)와 행동의 제약 속에서도 《고려도경》을 엮어 낼만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소묘(素描)와 비망기(備忘記)를 적어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2)
이 보고서는 서긍이 개경을 다녀간 후, 대략 1년 만인 선화 6년(1124)3)에 완성되었는데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본 휘종이 기뻐하여 서긍의 관직과 지위를 올려 주었다4). 서긍은 처음에 이 책의 부본(副本)을 만들어 집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 서주빈(徐周賓)이 빌려가 정강(靖康)의 난(1126) 때에 유실하고 말았다. 그 후 서천(徐 r)이 아버지를 따라 장시(江西) 홍주(洪州: 지금의 南昌)에 있을 때 북쪽에서 온 상관생(上官生)에게 《고려도경》을 얻었는데 글과 그림이 있는 것은 〈해도(海道)〉 두 권뿐이고 나머지는 글만 남아 있었다. 이것을 건도(乾道) 3년(1167) 에 인화(仁和) 조씨(趙氏) 소산당(小山堂)5)에서 《고려도경》 40권으로 판각하였는데 이것이 송(宋) 건도본(乾道本)이다. 이것은 《고려도경》의 초판본(初版本)으로6) 서긍이 서거한 후, 13년 만에 출판되었다. 청(淸) 건륭(乾隆) 때 궁중의 장서처(藏書處)인 천록림랑전(天祿琳瑯殿)에 보관(保管)되었던 건도본을 중화민국(中華民國) 20년(1931)년에 영인(影印)하였는데 희귀해지자 다시 중화 63년(1974) 3권으로 영인하였다.
혹자는 고려본의 《고려도경》이 원래는 있었다지만 지금까지 이 책의 소재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 한국에서는 타이완에서 영인한 《고려도경》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민족문화추진위원회(民族文化推進委員會)에서 번역하였고 이후 몇 종의 번역서가 출판되기도 하였다.
《고려도경》의 목차는 수장(首章)에 〈건국(建國)〉과 〈세차(世次)〉로 시작하여 고려의 〈건국〉과 〈전세(傳世)〉를 서술하고, 〈성읍(城邑)〉, 〈문궐(門闕)〉에서는 개경의 형세(形勢)와 도성(都城)과 황성(皇城)의 성문(城門), 문궐(門闕), 궁전(宮殿) 등을 설명하였으며 〈기명(器皿)〉에 이어 〈동문(同文)〉 40권으로 이루어졌다.
《고려도경》은 서긍이 한 달간 개경에 머물며 고려의 정치, 경제, 군사, 산천과 인물, 의예, 종교 그리고 교육, 공예, 풍속에 대한 견문을 상술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사회, 문화, 한·중 교류사에 대한 연구에 직접적인 사료(史料)로서 인정받았으며, 특히 송과 고려의 차문화 교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고려 차문화에 관한 것은 《고려도경》의 제6권 〈궁전〉과 제26~27권의 〈연례(燕禮)〉와 〈관사(館舍)〉, 제31~32권 〈기명 Ⅱ, Ⅲ〉과 제33권 〈주즙(舟楫)〉에 있다. 이것을 통해 고려의 차품(茶品)과 끽다 방법, 의례의 절차와 다구 이외에도 고려와 송의 차문화 교류의 형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고려시대의 국제 정세와 해로
고려 전기의 동아시아 정세는 격동의 시대이었다.7) 당말오대(唐末五代)의 혼란은 당말 이전의 중화 중심의 국제질서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북송은 북쪽으로는 요와 금의 압박을 받았으며 서남쪽에서는 서하(西夏)의 독립8)으로 인해 북송의 위세가 약화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 예종은 금과 요를 적절히 이용하여 국내 안정을 꾀했을 뿐 아니라 북송과의 교류를 통해 문치의 터전을 닦았다. 이러한 대외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북송은 고려와의 친교를 굳건히 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절단을 파견한다. 서긍이 고려에 파견된 것도 국신(國信) 사절단의 일환이었으나 마침 예종의 훙거(薨去)로 인해 제전(祭奠)과 조위(弔慰)의 임무(任務)도 함께 수행하였다. 서긍이 사절 선단(船團)을 준비하여 송을 출발하여 고려에 도착한 것은 인종이 즉위한 다음 해(1123)이다.
서긍의 사절단은 선화 5년(1123) 2월부터 사행을 준비하였고 3월 14일 배편으로 변경( u京)을 떠나 5월 4일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특별히 건조된 관선(官船)인 신주(神舟) 2척과 민간(民間) 소유 객주(客舟) 6척으로 선단(船團)을 구성하여 각종 장비와 물품을 싣고 출항을 준비하였다. 고려 사절단의 구성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그리고 상중하 삼절(三節)로 이루어졌고 사무를 관장하는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諸轄官)이 있었으며, 뱃사람까지 합하여 거의 200여명이 넘는 규모이다9).
《고려도경》 〈해로(海路)〉에 의하면 이들이 이용한 해로는 명주를 출발하여 군산도(群山島)에 당도한 후, 다시 예성항(禮成港)에 입항하여 개경으로 들어갔다. 사인(使人)들이 고려에 올 때는 남풍(南風)을 이용하고 귀국할 때는 북풍을 이용하였다. 중국의 동남지역(東南地域)에서 고려로 오는 항해(航海)는 계절풍을 이용하였다. 서긍이 수행한 사절단의 숙소는 순천관(順天館)이며 한 달 동안 대소(大小)의 공식 행사를 수행하였다.
4. 고려와 송의 차문화 교류
고려와 송의 차문화 교류에 주도적인 역할은 구법 수행승과 유학생,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왕래했던 사행공사(使行貢使)가 있고 실제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상인그룹이 있다. 특히 구법 수행승과 사행신(使行臣)은 중국을 내왕하던 지식인으로 차문화 교류에 있어서 직접적인 차문화의 전파자이다.
한편 송의 사행사들의 봉뢰품(奉賚品)인 차가 고려 귀족들에게 공급된 예증10)이 있기 때문에 회사품(回賜品)의 성격을 띤 차문화 교류가 있었다. 《고려도경》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것은 중국의 선원들과 고려인들 간에 이루어졌던 사적인 물물교환의 차 교류가11)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물물 거래는 차의 유통을 통한 소극적인 차문화 교류의 형태이고 상인들의 직접적인 교역을 통한 차 교류가 있다. 고려 때, 차의 상거래가 유행되었다.12) 당시 송은 대외 교역을 통해 차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군비와 재원을 확충하여 각다법( F茶法)을 실시하여 차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에서 통제 관리하였다.
高麗와 宋의 차문화 교류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nd002&logNo=110063966494&beginTime=0&jumpingVid=&from=search&redirect=Log&widgetTypeCall=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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