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21화

아기 달맞이 2012. 10. 5. 22:15

강경서 우리가 하루 늦게 떠났는데 논산에서부터 공주로 가는 길에는 농민군이 하얗게 깔렸더라고요. 오가는 말을 들으니 저어 경기도 어름에서부터 본진의 한양 입성을 위하여 요소마다 천지도의 농민군이 일어났는데 삼남의 군세까지 합치면 이십 여만이 넘는다구 합디다. 충청도에서 보은 옥천 거쳐서 온 손봉두라는 대장의 군사와 전라도에서 전주와 삼례 거쳐서 논산에 이른 군사를 합치니 그 수가 사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무튼 호호탕탕 짓쳐 나가는데 각 지방의 두레패에서 뽑았다는 길 군악패가 태평소를 불고 사물을 두드리며 행군하니 천지가 진동하여 암것도 모르는 저도 가슴이 터질 듯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공주 감영을 점령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라고 모두들 껄껄 웃으며 얘기했지요. 이 서방의 말을 들으니 충청 감사에게 항복하거나 동족을 치려 하지 말고 힘을 합쳐 왜병을 몰아내자는 편지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고 합니다. 노성에서 진을 나누기로 하여 일대는 서쪽으로 나아가 이인 역으로 진격하고 남쪽에서는 경천을 지나 널 고개를 향하여 나아갔지요. 이 서방이 북쪽을 염탐하고 돌아와 홍성과 유구 방면에서도 농민군이 공주를 공격하고 있으니 감영은 포위되어 보자기 속에 든 거와 같다고 하더군요.









 

널 고개로 오르기 전에 이 서방이 제게 이르기를 노성의 후진에 남아 있으라 하거늘, 내 비록 촌부라 할지라도 온가족이 의탁한 주인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으니 당신 옆을 따라다니겠노라 하였지요. 이 서방은 제가 들고 있던 창을 내놓으라면서 그런 사사로운 의리로 목숨을 걸도록 할 수는 없다고 그럽디다. 그래서 얼른 저도 깃발에 써 있는 대로 제폭구민(除暴救民)과 척양척왜(斥洋斥倭)한다는 천지도의 뜻에 따르겠노라 했더니, 그제야 행군에 끼워주었습니다. 십일월 여드레 날인가 그랬는데, 사방에서 일시에 폭풍처럼 몰아치며 올라가니 관군들은 우금치의 좌우 등성이로 물러나 진을 쳤지요. 우금치 고갯마루를 차지하면 한눈에 공주 성내가 내려다보이는 고로 그곳만 빼앗으면 금강 이남은 모두 무너지는 판이랍디다. 듣자 하니 한양에서 내려온 군사가 삼천 명에 일본군은 이백여 명이라 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양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관군 출신의 민병에게서 들으니 양총은 장약과 연환과 화승이 탄환으로 일체화되어 방아쇠만 당기면 폭발하여 총알이 나간다는데, 저들이 열 발을 쏠 동안 우리네 화승총으로는 한 발을 쏘기도 어렵다고 합디다. 화약 넣고, 총구에 연환 재고, 불 댕긴 노끈 물린 공이로 쳐야만 터지면서 총알이 나가거든요. 양총은 가히 천 보 가까이 나가는데 화승총은 겨우 백 보쯤 나가고 백오십 보에 이르면 맞지도 않는다구 하데요. 행수 몇 사람이 가지고 있던 천보총도 지방 관아를 칠 때 빼앗은 것들인데 비록 양총만큼은 나가도 별 수 없이 화승총의 일종이랍디다. 우리 총은 날 궂은 날은 물론이요, 습한 이른 새벽과 밤에는 화약이 잘 터지질 않는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징에 꽹과리에 북을 장하게 짓치면서 고개를 향하여 돌격을 했지요. 따다닥 따다닥 하는 폭죽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탄환이 날아오는 게 무슨 벌레 소리 같습디다.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지요. 맨 앞에 화승총 가진 대열이 나아가면서 일제히 총을 놓았지만 거리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뛰어나갔는데 가을 추수에 볏단 넘어가듯 대열이 일제히 쓰러지곤 했습니다. 행수가 명하여 자세를 낮추고 맨땅을 기어오르며 보니, 관군과 일본군은 열을 지어 앞 열이 쏘고 뒤로 빠지면, 뒤에 있던 열이 앞으로 나와 쏘고, 다시 그 뒤 열이 자리를 바꾸는 모양이었지요.

저는 고개의 중간쯤 얼어붙은 땅 위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 서방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른풀 사이로 올려다보니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고갯마루에 하얗게 쓰러져 있습디다. 그 중에는 저처럼 총알을 피하여 시체들 사이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부상을 당하여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주저앉아 우는 사람도 보입디다. 다시 아래에서 영이 내렸는지 수천의 농민군이 함성과 북을 울리며 돌격해 올라왔고 엎드려 있는 저를 지나 위로 전진했지요. 저도 이 서방을 찾겠다고 일어나 대열에 섞여서 위로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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