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황석영 연재소설]

[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7화

아기 달맞이 2012. 8. 22. 08:56

며칠 지나서 동지 댁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비장이 미리 귀띔을 해주었던 모양인지, 혼수품을 말 짐에 실어서 보냈다. 홍단 청단은 물론이오, 여러 필의 비단 옷감과, 초피 배자며, 여우목도리에, 가락지 노리개 등속의 방물에다 말굽은에 개금패까지 들어 있는 함이었다. 엄마는 입이 딱 벌어졌다. 엄마는 누런 담비 털을 댄 배자를 입고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아이구, 따뜻해라. 우리 연옥이 덕 볼 날두 있구나.

엄마 좋아?

내가 시무룩해서 물었더니 그녀는 멈칫 했다가 내 앞에 주저앉았다.

그럼, 너는 안 좋냐?

나 시집가면 부탁이 있어.









 

엄마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색주가 인제 그만둬요.

글쎄 누군 이 장살 하구 싶겠냐? 딱히 벌어먹구 살길이 없어서 그랬지. 가만있어라…… 성내에 큰 집 사서 여각이나 객점을 하면 어떨까?

고을 수리의 선산 일로 이 서방이 다시 술집을 찾은 것은 섣달그믐 바로 전날이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초라니 박돌과 서 지사는 없고 이 서방 혼자 나타났다. 엄마와 나는 구면에다 어쩐지 이 서방에게는 서먹서먹한 느낌이 없어서 저녁 밥상을 건넌방으로 들여가서 함께 둘러앉았다. 엄마가 그의 앞에 놓인 밥사발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식구끼리 먹는 상이라 반찬이 보잘것없우. 어째 오늘은 끈 떨어진 가오리연 신세유. 혼자 객지에서 뭘 하슈?

모두들 설 지나구 움직인다는데, 수리 어른은 오늘까지 음택 자리를 확정 짓는다구 해서요.

통성을 하여 이 서방인 줄은 알겠는데, 고향이 어딘지 이름이 뭔지두 모르네요.

난 데는 충청도 보은이고 이름은 신통이라 하우.

나는 얼른 엄마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다 얹히겠네. 밥상머리서 통성명 할라우?

왜 어때서 그러냐? 봉놋방에 가봐라. 길 가다 만난 사람들두 밥상머리에서 인사 튼다구. 나는 구례댁이구 얘는 연옥이라오.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그는 마치 친척붙이처럼 되어버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본 이름은 이신(晨)이었는데 사람들이 그의 재담과 익살하는 재간을 보고 별명을 붙여 신통이라고도 하고 방통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을 이방이 다녀간 뒤에 이신통이 그날 밤을 우리집에서 묵어가게 되었는데, 남은 술상을 마주하고 우리 모녀와 그가 얘기를 나누던 중에 엄마가 색주가를 접는다는 말이 나왔다.

객점이나 여각이 어떤가 모르겠네. 이 서방은 사방 천지를 돌아다녔으니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겠수.

여각은 집도 커야 하고 밑천도 많이 들 테구요, 객점두 여기가 감영이라 이름난 장하고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차라리 전주를 떠나지 그러세요?

내 여기 말고는 아는 이도 없고 살아본 적두 없으니……

다른 일을 하자 해도 구례댁 아주머니가 관기를 하였으니, 늘 풍악 잡혀 놀자구만 할 거 아니우. 예서 가까운 강경 장이 어떠세요? 거기서 보행객주를 하면 장사도 하고 장꾼도 손님으로 받으면 되겠지요.

강경이 좋단 말은 풍편에만 들었는데.

거기야말로 동네 삽사리도 쇠푼을 물고 다닌다는 고장이우. 일 원산, 이 강경, 삼 포주, 사 법성이 조선 팔도에서 유명짜한 장시인데, 그중에서도 물산이 많고 사람 많이 모여들기로는 강경이 제일이라오.

엄마가 갑자기 옷고름을 들어 눈시울을 닦았고 신통은 나와 엄마를 번갈아 멀뚱하니 쳐다보다가 물었다.

아주머니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두 있으시오?

엄마가 곰방대에 담배를 찬찬히 담아 퍽퍽 연기를 내뿜고는 말했다.

이참에 얘를 여의게 되었는데, 그 생각을 할수록 폭폭해서 그러우. 나두 첩살이 갔다가 중도에 파하고 돌아왔으니……

언제는 곳간 열쇠 차지하구 산다며 좋다더니, 왜 눈물바람이우?

내가 그러고는 더 할 말이 없어 슬그머니 그들을 남겨 두고 건넌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