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을 생각하면 - 김남주(1946~1994)
이 고개는
솔밭 사이사이를 꼬불꼬불 기어오르는 이 고개는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욱신욱신 삭신이 아리도록 얻어맞고
친정집이 그리워 오르고는 했던 고개다
바람꽃에 눈물 찍으며 넘고는 했던 고개다
어린 시절에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어머니를 데리러 이 고개를 넘고는 했다
고개 넘으면 이 고개
가로질러 들판 저 밑으로 개여울이 흐르고
이끼와 물살로 찰랑찰랑한 징검다리를 뛰어
물방앗간 뒷길을 돌아 바람 센 언덕 하나를 넘으면
팽나무와 대숲으로 울울한 외갓집이 있다
까닭 없이 나는 어린 시절에
이 집 대문턱을 넘기가 무서웠다
터무니없이 넓은 이 집 마당이 못마땅했고
농사꾼 같지 않은 허여멀쑥한 이 집 사람들이 꺼려졌다
심지어 나는 우리 집에는 없는 디딜방아가 싫었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당부 말씀이 역겨웠다
나는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총각 머슴으로 거처했다는 이 집의 행랑방을
일자무식 농사 머슴을 아버지로, 보리 서너 말에 그에게 업혀온 주인집 딸을 어머니로 둔 소년이 있었다. 체제는 그를 강도로, 반란분자로 규정했지만 세상은 또 그를 시인이라 혁명가라 전사라 부르지만, 나는 왠지 제 아비의 고통과 제 어미의 고통 사이를 착하게 오가는 저 글썽이는 아이가 눈에 밟힌다. 그는 아비의 울화와 어미의 장애를 아파한 아이에서, 온 민중의 머슴살이에 분노하는 어른으로 아주 조금, 그러니까 혁명적으로 바뀌었던 것이리라. 그가 건너간 저세상에 정말로 크고 따뜻한 손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저를 대신해 쉼 없이 싸우다 다치고 온 한 소년을 응급실로 급히 옮기고 있지 않을까. <이영광·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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