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방

다반사 … 차 마시는 일처럼 진리는 평범 속에 있다

아기 달맞이 2012. 4. 4. 07:30

경봉 스님의 고려선차, 양산 통도사서 시연

 

원행스님이 시연한 고려선차 차회

 

한국 불교에서 차(茶)와 선(禪)은 동의어다. 통도사 원행 스님이 3일 고려선차 차회를 시연하고 있다. 경봉 스님의 가르침도 ‘선다일미(禪茶一味)’로 집약된다. [송봉근 기자]
경남 양산의 통도사. 선원(禪院)·율원(律院)·강원(講院)을 두루 갖춘 총림(叢林)이자 부처님의 진리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유명하다.

통도사는 일주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넉넉한 절터, 고졸한 전각, 하늘로 뻗은 소나무 숲, 가지런히 정돈된 석축과 대나무 울타리 등 구석구석 알뜰한 살림살이를 뽐낸다.

 무엇보다 통도사는 빼어난 선지식(善知識)이었던 경봉(鏡峰·1892~1982) 선사가 주석하며 ‘선과 차는 하나’라는 선다일미(禪茶一味)의 가르침을 설파했던 곳으로 이름 높다. 차문화를 수행자의 참선 방편으로 끌어올려 오늘날 통도사의 가풍으로 거론되는 자비로운 선을 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경봉의 법맥(法脈)을 잇는 통도사 극락암의 후학들(경봉선풍 중진불사회)이 그간 굳건히 잠겼던 절문을 열고 고려선차를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 잊혀지는 경봉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알려 이 시대, 어지러운 세상을 밝히는 법등(法燈)의 역할을 하겠다는 원력(願力)에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3일 낮, 경봉 스님이 깨달음을 얻었던 극락암 내 삼소굴(三笑窟)에서 고려선차 시연이 있었다. 11세기 고려시대의 선차는 점심 공양을 끼워 넣어, 길게는 세 시간이나 이어진 고도로 양식화된 여가 문화였다. 이날 시연은 약식으로 했는데도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삼소굴로 들어가는 대문에 일기일회(一機一會)라는 선구(禪句)가 붙어 있다. ‘기회는 지금뿐, 현재에 충실하라’는 진리를 담은 구절이다. 삼소굴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놓인 물항아리에 손가락을 가볍게 적시듯 닦아야 한다. 경봉 스님의 영정에 합장 반배하고 전각 안으로 들어서니 차를 대접하는 다두(茶頭)인 원행(圓?) 스님이 반갑게 맞는다.

 원행 스님은 녹차를 내놓았다. 차도 차지만 다구(茶具)도 수십년 이상 된 것들이었다. 특히 찻잎을 우려내는 다관은 경봉이 직접 사용하던 것이었다. 스님은 “다구가 귀한 물건이니 조심해 다뤄달라”며 신신당부했다.

 스님의 주문대로 사람의 체온 비슷한 미지근한 온도의 차를 한 모금 머금고 혀를 굴렸다. 떫기보다 구수한 맛이 강한 차향이 입 안에 퍼졌다. 스님은 “모든 식물은 열을 가하면 구수한 맛이 난다”며 “차를 어떻게 다루고 우리느냐에 따라 차향이 적당히 나면서 숭늉처럼 구수한 선차의 맛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선다일미의 경지는 극락암 선원장인 명정(明正) 스님과의 차담에서 제대로 엿볼 수 있었다. 20여 년간 경봉 스님을 모신 스님은 극락암 고려선차의 적자다. 하지만 스님은 수행력 높은 선승의 위신을 세우기보다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주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선기 어린 한 마디를 뱉곤 했다. “경봉 스님과 주로 무슨 차를 마셨냐”는 질문에 “곡차!”, “차 한 잔 더 달라”는 청에 “그럼 돈 내라”고 답하는 식이다.

 스님은 “젊어서 불국사 선방에 살 때 하루 세 시간씩 자며 가행정진(加行精進) 하곤 했는데 당시 차는 피곤에 지친 선승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주는 정신적 양식이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바쁘니까 차 한 움큼 집어 넣어 우려 먹고 공부했다”며 “당시 차가 없는 참선은 뭔가 알맹이가 빠진 것과 같았다”고 했다. 차와 선은 둘이 아니라는 얘기다.

 삼소굴의 ‘삼소’는 진리를 상징하는 108 염주를 평생 찾아 헤매다 결국 자신의 목에 걸린 사실을 발견하고는 허탈해서 웃는 웃음을 말한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얘기다. 항다반사(恒茶飯事). 차 마시는 일처럼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에 진리가 있음을 극락암의 승려들은 실행하고 있었다.

◆경봉 스님=1892년 경남 밀양 출생. 1907년 통도사에서 출가했다. 1927년 촛불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었다. 한암·만공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과 교류했다. 사찰에서 화장실을 지칭하는 해우소(解憂所)란 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