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비 - 박용래(1925∼80)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시인 박용래보다 열세 살이 연상인 백석도 "돌절구에 천상수가 차게 복숭아나무에 시래기타래가 말라 갔다"라고 쓴 적이 있다. 박용래는 백석의 그 시를 보았을까? 몹시 궁금하다. 어쨌든 돌절구 바닥에 고인 차가운 빗물과 엮어 매단 시래기는 우리를 멀리멀리 데려다 준다. 고향 잃은 우리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혼자 우는 소리가 아니라 모여 우는 소리는 비천함을 뛰어넘는다. 김장독 빠져나간 허전한 자리를 메우려고 모이는 그 봄비, 헛간 시래기 줄에 모여 우는 그 봄비. 그 봄비는 비천함을 달래고, 텅 빈 고향을 달래고, 헛헛한 마음을 달랜다. 정월 대보름의 나물, 시래기를 삶아 들기름에 달달 볶아 먹자. 시래기 나물 먹고 시인들의 고향 강경, 논산, 함흥, 북청, 벽동, 희천, 박천, 팔원, 개마고원 그 너머 어디까지 갈 수 있나 가 보자. < 최정례·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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