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만 또렷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Vermeer·1632~1675)가 그린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그렇다.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도 돌아서면 결국 기억에 남는 건 그 그렁그렁한 눈동자다. 왜 그런 걸까 싶어 이리저리 책을 찾아봤더니 이 작품은 윤곽선을 없애고 색조 변화로만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그 은은한 기법 때문에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그림의 중심인 눈동자가 더욱 부각된다는 설명이었다. 이 대목에서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때도 기억해두면 좋을 기법이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렌즈(50㎜)·감도(ISO 400)·셔터 스피드(1/60sec)·조리개(조리개 f/1.4).
사진으로 치면 이건 일종의 '아웃포커스(out of focus)'다. 피사체에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화면 전체가 그윽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건 소녀의 눈동자만큼은 분명하게 관객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는 이가 숨을 멈추고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진 초보자들이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기본'을 놓치는 것이다. 조리개·감도·셔터 스피드 같은 단어 앞에서 괜히 움츠러들고 그래서 "사람 얼굴을 찍어오라"고 하면 대개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은 사진을 가져온다. 왜 그럴까? 욕심이 많아서다. 사람 얼굴 속 이목구비도 다 잘 찍고 싶고 배경도 근사하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그러다 보니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다. 바로 사람의 눈동자를 제대로 찍는 것이다.
눈동자에 초점을 정확히 맞추는 것. 이건 참 기본처럼 들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인물을 찍고 싶다면 여기에만 집중해도 힘이 모자란다. 얼굴의 다른 부분이 모두 흐릿하게 찍혀도 눈동자만 명확하게 포착하면 얼굴 전체가 강렬해진다. '눈은 마음의 창(窓)'이란 말은 흔하지만 가장 정확한 말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나의 조카다. 녀석이 세 살이 되던 날이었다.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갔더니 녀석은 날 보지도 않았다. 다급해진 마음에 "아이스크림 사줄게!"라고 외치자 아이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이스크림?' 하는 표정으로 날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눈동자가 어찌나 또렷하고 간절한지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로 얼른 조카의 얼굴을 찍었다. 조리개를 최대한 열고(이렇게 하면 초점이 맞는 범위가 매우 좁아진다) 아이의 큼직한 눈동자에만 초점을 정확히 맞췄다. 다른 부분엔 초점이 정확히 맞지 않았지만, 아이의 표정은 이 투명한 눈망울 덕에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정확하게 표현됐다. 요즘도 녀석이 보고 싶을 때면 난 이 사진을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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