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선생을 찾아가는 정릉 아리랑고개는 여전히 가팔랐다. 예전의 좁고 컴컴했던 길을 생각하면 개벽에 가까운 변화다. 남루한 가옥이 즐비했던 산동네는 깔끔한 아파트들로 정돈되었고 고개 너머 마을 골목들도 깨끗이 정돈되었다.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아리랑고개가 참 좋아졌네요”라고 말을 걸자 “어디서 온 사람?”이냐는 되물음이 돌아온다.
힘들 때 위로가 되어주는 문학
신경림 선생의 집은 아리랑고개 아랫마을에 있다. 1978년에 이곳에 들어왔으니 벌써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오래 사셨네요. 한곳에서 33년이면…
“첫 시집 『농무』를 발표하고 5년 뒤에 들어왔지요. 세상도 많이 달라졌고, 저 또한 세월과 함께 변했고, 나이도 많이 먹었습니다.”
33년 전, 서울 정릉은 어땠습니까?
“그때는 정릉이 서울에서 제일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개인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상하수도 등 기반 시설이 부족해서 거리에는 쓰레기와 오물 투성이였지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은 죄다 이 동네 사람들 머리 위로 떨어졌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너무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습니다. 한 동네에서 한 30년 살아보면 개발을 맹목적으로 반대할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깨끗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시끄럽고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 세상 어떻게 보시는지요.
“글쎄요. 어느 시절이든 세상은 복잡합니다. 한두 마디로 얘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늘 갈등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그게 지나치게 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게 큰 문제입니다. 골이 너무 깊은 거죠. 아무리 생각이 다르다 해도 옳은 말을 하면 수긍하는 게 건강한 관계인데, 지금은 진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게 문제예요. 이런 갈등 구조를 진정시키려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양보하되 상대적으로 강한 쪽에서 조금 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이든, 집단과 집단의 이질감이든, 생각과 생각의 충돌이든 그것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양보 이외에도 격한 감정을 가라앉혀줄 완충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시, 문학 등 예술의 역할에 목말라하기도 하고요.
“문학이라는 게 세상을 표현하고, 시대를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힘겨운 사람에게 힘을 돋워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충분히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문학계가 갖고 있는 ‘지나친 상업화’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견지해야 할 문학이 상업에 매몰되다 보니 본질이 자꾸 밀려나는 거예요. 모든 출판사가 장사가 되는 쪽의 문학 관련 책만 내려 하고, 문학가들 또한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출판사 요구에 묻어버리기도 하는 것이죠. 물론 문학에도 자본의 논리가 존재하고,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직 돈만을 위한 문학에는 문제가 있지요. 돈만 따라가다 보니 세상을 비추는 역할을 제때 제대로 못하는 겁니다.”
문학에 조그만 관심만 있어도 선생님의 ‘농무’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2008년에 발표하신 시집 『낙타』를 읽어보면 선생님의 시도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농무’를 읊으며 묘한 울분과 위안의 진동을 느꼈던 사람들도 이제는 ‘달관’과 ‘관조’의 느낌이 강한 ‘낙타’를 통해 오히려 ‘초월적 삶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농무’를 발표한 게 1970년대였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세상은 다릅니다.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동안 국민의 힘으로 세상은 진화했고, 본질적인 부분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1970년대만 해도 독재와 가난,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여전히 존재했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지요. 세상이 달라지니 문학도 달라지고 제 시도 변하는 겁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보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변하더라고요. 젊었을 때는 세상에 반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기도 했고, 또한 그것이 필요한 시절이기도 했지요. 시집 『낙타』의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도 말했지만, ‘농무’를 쓸 당시 내 생각은 ‘시는 그 시대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대답’이며,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나의 문학관대로 작품이 나왔으니 좋은 일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내 시가 공감을 얻으면 얻을수록 나의 갈증도 점점 커져갔어요. 민요적 정서를 시에 담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지요. 그러나 민요적 요소도 새로운 시에 대한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민요를 찾아다닌 순간들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 역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행위로,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고 만지기 위한 순례길이라는 것을 민요 찾기 과정을 통해 배웠거든요.”
내려놓아야 새로운 것이 들어온다
신경림 시인이 비로소 자유인으로서의 신명을 시에 불어넣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발표한 시집 『길』의 시를 쓰던 시절이었다고 시인 스스로 밝힌 바 있다. 물론 그것이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시인을 꿈꾸며 대학에 진학했던 청년기, 시인으로 데뷔하자마자 시에 대한 회의를 품고 고향으로 돌아가 눈칫밥 먹고살던 시간들, 학원 강사로 소일하며 용돈벌이나 하던 세월 속에서도 그의 마음속에서 시가 떠난 적은 없었다.
그가 만일 데뷔 이후 오로지 자신의 시에만 갇혀 살았다면,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웃 마을 과부들이 왜 같은 날 죽은 남편들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한 동네 이웃들이 왜 평생 얼굴 한번 쳐다보지 않고 사는지, 타인의 말 속에서조차 서로의 이야기가 섞이길 거부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낙향 십 수 년은 서울과 충주의 거리만큼 시와 멀어진 시간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의 시심을 더욱 깊고 넓게 만든 버릴 수 없는 삶이었다.
현실에 반하는 주제의 시 또한 그의 시가 진화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진화의 힘은 ‘갈증’이었다. 『농무』(1973)에 안주했다면 그는 우리 민요를 찾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새재』(1979)에 천착했다면 ‘새 시’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에너지가 되어 시인 신경림의 끝없는 변화를 이끌어내고 세상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조하는 지평을 스스로 열어간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발표한 시집들이 『길』(1990),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등이다. 새로운 시를 찾아가는 그의 행보는 결국 그의 시집 『농무』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 독일에서 출판되는 계기가 되었고, 언어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그에게 시란 처녀시가 탄생한 동네의 붙박이 언어가 아닌, 세상의 흐름과 동행하는 친구 같은 존재인 것이다.
요즘 여행을 즐기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여권을 받은 게 1993년이에요. 그 전까지는 여권 신청을 해도 나오지 않았어요. 지금은 여권 발급이 안 되면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만 그때는 그냥 ‘안 나왔다’면 그만이었어요. 아무튼 내 나이 60에 여권을 받았지요. 그리고 생전 처음 해외여행을 갔는데, 그게 중국이었어요. 그 뒤로 여행의 기회가 생기면 빠지지 않고 다니는 편이에요.”
여행을 가시면 시상이 잘 떠오르시나요?
“그냥 평범한 마음으로 다닙니다. 일상적인 눈으로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지요. 그러나 내가 시인이니 시적인 무언가가 개입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해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십니까? 메모를 했다가 나중에 시로 옮기시나요?
“그렇지 않아요. 시적 감흥이란 일종의 불씨라고 할 수 있는데, 영국의 어떤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 불씨가 살아 있으면 시가 되기도 하지만, 사라지기도 하는 게 불씨입니다. 억지로 잡아둘 필요는 없어요. 게다가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필기하는 걸 싫어해서 노트 한 권 없이 생활했어요. 대학 때도 노트 없이 강의를 들었지요.”
하하하, 대단하십니다. 기억력이 되게 좋으신가 봐요. 친구분들과는 자주 어울리시는지요.
“나는 친구 교류가 폭넓지 못한 편이에요. 문단 친구들도 제한적인 편이지요. 범문단 교류도 없고, 학교 동창들도 극소수 사람만 만납니다. 그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둘레길도 걷고, 북한산도 자주 오르고 멀리 원정 등산을 가기도 하지요. 지난가을에는 설악산에 다녀왔어요. 3박 4일 일정으로 지리산 둘레길도 걸었지요.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과 여행하고 술도 한잔 마시는 일이 즐거워요.”
동국대 석좌교수신데, 요즘도 시인이 되겠다는 학생이 많이 있나요?
“문학창작과가 있는 대학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만큼 문학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다는 얘기고, 대학에서도 문창과를 존속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증거예요. 그런데 열심히 시와 소설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시만 열심히 쓴다고 해서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세상을 넓고 깊게 체험하고 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시 쓰는 기술을 가르치는 경향이 있어요. 시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단, 문학을 꿈꿨다면 그 길이 어렵고 힘들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문학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문학을 전공하지 말고 다른 기술을 가르치는 학과에 입학하는 게 낫습니다. 문학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많은 부모들이 자식이 문학을 한다면 반대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문학은 세상살이의 경쟁력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돈과 관련해서 그렇다는 말이지요. 문학의 경쟁력은, 문학을 통해 세상과 진지하게 대화하고, 때로는 대결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꿈을 꾸고 키워나갈 때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문학을 시작했다 다른 분야에서 살던 사람들이 나이 50이 넘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는 경우도 많아요. 청년기의 꿈이 ‘옳았다’는 반증이지요.
여전히 많은 학생이 시인이 되길 원하고, 다른 분야에서 살던 사람들이 다시 시단으로 돌아오는 걸 보면 우리나라 시의 미래가 밝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시의 힘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시가 아니어도 접촉할 수 있는 매체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독자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그러나 시가 위축된 데는 시 자체가 자초한 면도 있어요. 시는 다른 장르와 꼭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다 보니 시가 어려워지기도 하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는 난해한 시를 누가 즐겨 읽겠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처럼 시를 즐기는 국민도 흔치 않아요. 우리나라에는 초판을 5,000부 이상 찍는 시인이 꽤 있습니다. 외국 문인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거짓말 하지 말라’고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는 일도 드물고, 낸다 해도 초판을 몇 백 부 찍는 일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를 좋아하는 게 확실합니다. 시의 힘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지요.”
2011년에 특별히 세우신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요즘은 한시에 열중하고 있어요. 두보, 이백, 한국의 한시를 열심히 읽고 있어요. 내가 한문이 좀 약해서, 일본어나 영어로 번역된 작품집을 주로 읽고 있지요. 지금은 『두보 평전』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어요! 두보 평전 읽기가 끝나면 『이백 평전』이 기다리고 있고, 앞으로 『왕유 평전』도 나온다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네요.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 궁극의 꿈은 좋은 시, 새로운 시를 계속 쓰는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평생 변하지 않는 꿈이요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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