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공예

한국의 보자기

아기 달맞이 2011. 4. 20. 01:45

한국문화 최고의 걸작, 보자기  

보 자 기 문 화

쌀 수 있는건 다 싼다.
부드러운 한국사람 의식과 꼭 맞는 포장문화의 원형질



한 10 ~ 20 년 전만 해도 보자기는 집안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물건이었다. 어머니가 친정에 갈 때, 또 돌아올 때 설레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보자기를 펼치면 그 안에는 마술처럼 맛난 음식이 들어 있기도 했고, 된장이나 고추장 단지, 그도 아니면 참기름 병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몹시 낡고 초라한 물건이었지만, 워낙 쓰임새가 많고 편리한 물건이라 쉬 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두고 썼기에 어린 시절 집안을 돌아다니던 그 자줏빛 보자기는 아직도 머릿속에 뚜렷하게 떠오른다.

보자기는 상자와는 많은 부분 차이가 난다. ‘상자’라는 물건 역시 그 맡은바 임무는 물건을 싸서 간편하게 들고 날르는 역할을 하거늘 상자는 운반해야 할 물건이 상자의 크기에 맞춰져야 하니 그닥 친철하달 수도, 때에 따라서는 실용적이랄 수도 없는 물건이 되기도 한다. 그에 반해 보자기는 훨씬 융통성있고 친절하고 소박한 물건이다.

싸야 하는 물건의 크기에 따라 아주 작아지기도 하고 아주 커 지기도 하고, 물건이 없을 때 이 네모난 천 쪼가리는 공간도 거의 점하지 않는 겸손함까지 갖추었다. 본디, 보자기라는 것의 뜻은 간단히, ‘물건을 싸는 작은 보’이다.

그런데 이 간단하고 작은 물건의 쓰임새는 엄청나니, 그 종류는 단번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먼저 혼례용보로 함보, 기러기보, 사주단자보, 예단보, 연길보, 폐백보가 있고, 상용보(常用褓)로 전대보(纏帶褓), 보부상보, 상보, 이불보, 빨래보, 버선본보, 받침보, 덮개보, 책보, 횃대보, 채찍보, 간찰보(簡札褓), 서답보, 경대보, 함보(函褓), 반짇고리보, 목판보 등이, 불교의식에 쓰인 보자기들로 마지보(摩旨褓), 공양보, 경전보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영전봉안보(影幀奉安褓), 기우제보, 보쌈보, 제기보 등도 있다. 또한 보자기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계층, 생긴 모양, 색상, 재료 등에 따라서도 수십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계층에 따라서는 민보(民褓)와 궁보(宮褓)로, 보자기 구조에 따라서는 안감을 대지 않고 홑겹으로 만든 홑보, 안감과 겉감 두 겹으로 된 겹보, 솜을 두어 만든 솜보, 조각천들을 이어서 만든 조각보, 일부 또는 전체를 기름종이로 만든 식지보, 누벼서 만든 누비보 등이 있다.

색상에 따라서는 청보, 홍보, 청홍보, 오색보, 연두보, 아청보, 재료에 따라서는 사보(紗褓), 명주보, 항라보, 모시보가, 문양에 따라서는 화문보(花紋褓), 수목문보(樹木紋褓), 용문보(龍紋褓), 운문보(雲紋褓) 등이 있다. 이렇게 보자기는 공식적으로 이름붙여지고 널리 알려진 그 종류만도 일일이 나열하기에 숨이 찰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구분과 정의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실생활에서 그 쓰임새가 적어지고 점점 사라져만 가고 있는 보자기의 위상을 생각하면 쓸쓸하기 그지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들이 들고 오셨던, 맛있는 그 무언가가 들어 있는 궁금하고 마음을 설레게 만들던 그 작고 소박한 물건을 대했을 적 정서를 생각하면 더욱 그립다.

요즈음은 생활에서 유용하게 쓴 보자기가 아닌, 장식품으로서의 조각보가 더 인기다.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빼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요 몇 년 사이 더욱 많은 각광을 받고 있는 조각보의 그 예술적인 아름다움도 결국은 쓰다 남은 천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쓴 조상들의 절약정신의 산물로 보는 견해도 많다. 물론 조각보는 그리 단순한 의미를 지닌 물건이 아니다.

그 빼어난 아름다움 뒤에는 여러 가지 까닭들이 숨어 있다. 아직까지 궁중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고 쓰다 남은 천을 조각조각 덧입힌 실용성과 절약정신이 눈에 띄는 물건이 조각보이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예술정신이 새삼 부각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조각보의 제작의도가 실용적인 목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우선 그 깨끗한 보관상태에 있다.

물건을 담고 싸고 들고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모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조각보라는 보자기의 제작과정 속에 구체적인 용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증명으로 볼 수도 있겠다.

또 하나는 조각을 이어간다는 연장의 개념이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와 연결되어 조각보를 많이 만들었다는 의견들도 많다. 조선시대에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여자들의 사회활동과 문화활동이 극도로 위축된 시기다.

500 년 역사를 통틀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류 문인이나 화가의 수가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이매창, 축향 등 극소수라는 점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름을 떨치지 못한 다른 많은 재능 있는 여자들은 그 에너지를 모두 규방공예에 쏟아 부었을 것이고 그 뛰어난 몰입의 결과 가운데 하나가 조각보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양에서 문화의 암흑시대였던 중세 때에 모자이크가 발달한 것이나 엄격한 이슬람교가 세를 떨친 아랍문화권에서 복잡한 문양의 예술적인 카펫이 발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쉬 이해가 된다. 사회가 억압되어 있을수록 사람들은 내면으로 침잠하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한정된 공간과 재료 속으로 들어가 복잡한 문양의 예술품을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몬드리안이나 파울 클레가 보았으면 뭐라 말했을까 궁금해지는 그 예술적인 조각보들 속에는 재능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갑갑하고 억압된 삶을 살아야 했을 조선시대 여인들의 한 어린 정성이 한땀한땀 묻어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조각보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정갈한 아름다움이 더욱 슬프게 빛을 발하는 듯하다.

 

 

[글/cambridgewebzine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