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라스트 프린세스'덕혜옹주'
덕수궁의 꽃이라 불리며
고종의 사랑을 받았던 비운의 황녀이다.
덕혜옹주는 명성황후의 최측근 궁녀였던 양씨와 고종사이에 태어났다.
고종의 나이 60세 즈음에 얻은 고명딸이셨다.
덕혜옹주의 아버지셨던 고종황제.
유모가 덕혜공주의 젖을 먹이고 있을때 갑자기 들어와
옹주가 젖을 잘 먹고있는지 궁금하다하시며
젖먹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시던 사랑이넘치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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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후궁 양씨(1882년생, 덕혜옹주의 생모)사진
사진출처 : http://cafe.daum.net/daehanbok/333i/50 (올린 이 :평강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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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덕혜옹주를 위해 세운 유치원에서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덕혜옹주시다.
윗줄 왼쪽에서 두번째는 민덕임으로 나중에 잊혀진 덕혜옹주를
찾아나선 기자 김을한의 부인되시는분.
고종은 덕혜옹주가 일본인과 결혼하게되는것을 두려워하셔
충신이었던 한 신하의 아들인 '김정한'과 약혼을 시키려하신다
'김정한'의 형은 앞에서 언급한'김을한'이다.
어렸을적의 덕혜옹주사진-
덕혜옹주 나이 8살일때 고종은 독살을 당하셨고,
옹주께서는 이 광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셨다하신다.
고종을 잃고 황실을 잃은 국민들에게
덕혜옹주는 그야말로 황실의 마스코트로
조선일보,동아일보같은 신문에서도
덕혜옹주의 기사를 자주 찾아볼수있었다고한다.
덕혜 옹주와 이 우공
의친왕의 가장 촉망받는 아들이었던 이우공과 10대의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한 덕혜옹주를 나란히
소개한 일본측 기사이다. 그러나 이우 공은 원자폭탄 투하 당시 나가사키에서 피폭되어 숨졌고,
덕혜옹주도 정략결혼으로 몸은 살아 있으나, 정신은 죽어버린
비극적 삶을 살아야 하였다.
이에 일본은 덕혜를 우리 국민들의 기억에서 지우기위해
덕혜옹주나이 14세때 강제로 일본유학을 결정하게된다.
덕혜옹주께서는 기모노를 입고 동경유학을 떠나신다.
이틀만에 동경에 도착한 덕혜옹주께서는 동경의 영친왕 저택에서 머무르게 되신다.
이때 옹주를 돌본 어떤분(이름이기억이나질않음ㅠㅠ)께서 일본말로 "긴여행에 피곤하시죠?"라고
물으니 대답이 없길래 다시 한국말로 "긴여행에 피곤하시죠?"라고 물었지만
덕혜옹주께서는 침묵하고 계셨다.
이분의 자서전에서는 일본에 유학오신 덕혜옹주를
"어렸을적 나를 매료시켰던 명랑함과 빛나던 눈빛은 찾아볼수없었다"고 표현하고있다
덕혜옹주는 이때부터 주욱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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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송별회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고 전한다.
덕혜옹주와 동급생, 선생님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덕혜옹주가 다른 학생들보다 높은 좌석에 앉아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서울 박물관소장자료...'마지막 화실,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살았던 덕혜옹주가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 급우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뒤쪽에 학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5년 3월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 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에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고 있다.
일출 심상소학교는 서울 충무로 현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전용 학교였다. (1925년)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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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께서는 항상 보온병을 가지고 다니셨다고한다.
그래서 한 급우가 "넌 왜 보온병을 가지고 다니니?" 라고 묻자
"독살을 당하지 않으려고 이 안에 있는 물만 먹어"라는 답을 했다한다.
덕혜옹주는 일본에서도 독살의 공포를 잊지 못하셨던 것이었다.
덕혜옹주나이 19때 어머니인 양귀인께서 운명하셨다.
이때 덕혜옹주께서는 어머니의 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동안 상복을 입지못했으며 3년상을 마치고 입는
옥색한복을 입어야했고, 이틀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셨다.
이때부터 덕혜옹주께서는 몽유병에 걸리시고
평생 고쳐지지않았던 병 '정신분열증'을 얻으셨다.
한국사'전'에서는 이때 이런말을 했었다
"암울한 현실속에 영혼만은 자유롭고싶었던것이 아닐까?"
덕혜옹주의 어머니셨던 양귀인
평민의 출신으로 후궁중 고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것으로 알려져있다.
(사진출처:동아일보)
덕혜옹주께서는 쓰시마섬의 도주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정략결혼을 하신다.
기자는 덕혜옹주의 말도안되는 정략결혼에 사진속에 분노를 담아냈다.
덕혜옹주의 결혼사진에는 남편이 없었다.
(사진출처:제국의 후예들)
덕혜옹주께서는 결혼 3년만에 따님을 출산하셨고
일본식이름을 지었다 "마사에"
한국이름은 "정혜" 라고 한다.
마사에는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버리고난
1년후 자살한것으로 알려져있다.
첨가자료) 1933년 덕혜옹주는 한국 이름을 정혜, 일본이름 마사에라고 하는 딸을 하나 두었으나 이 딸도 옹주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는 사이 18세인 1950년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사진은 덕혜옹주 부부의 한 때 다정하였던 모습으로 1932년 10월~11월 사이의 두 부부. 대마도 엄원의
고등(古藤家)에서 촬영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은 정신적 압박감을 낳게 하였고 머나먼 타국에서 옹주는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처음으로 시댁인 쓰시마섬을 방문한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이때도 덕혜옹주는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으셨다고 하신다.
한 남자분께서 덕혜옹주를 만나고 난뒤 기록한 일기에 따르면
소 다케유키백작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도중 덕혜옹주가 들어와
갑자기 웃기시작하더니 기괴한 소리로 끊임없이 웃으셨다고 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패번취현"이란 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 있던 "번주"란 집권층을 없애고 중앙집권적인 현을 구성하게 되었고
이때에 귀족의 작위를 잃은 소 다케유키는 평민으로 살아가야했다.
그동안 모았던 재산도 잃게되었으며
정신분열증이었던 아내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강제적으로 집어넣고
이혼을 했으며 그해에 새아내를 얻었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이후로 김을한이 찾아올때까지 15년동안 병원생활을 하셨다.
김을한은 평생 기자로 일하셨고 덕혜옹주의 약혼자가 될뻔한 '김정한'의 형이다.
동경 특파원으로 일본에 온 김을한은 덕혜옹주를 찾았고
전화번호부에서 소 다케유키를 찾아 전화를 걸어 근황을 물었지만
입원했다. 당신이 상관할일이 아니지않느냐. 하는 냉정한 대답을 얻을수있었을 뿐이었다.
병원을 찾아낸 김을한은 덕혜옹주를 만나게 되었고
비참한 모습의 덕혜옹주를 한시바삐 귀국시키려했지만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했던 이승만은 황족인 덕혜옹주를 꺼려했고
시간이 지난후 1962년 1월 26일 박정희의 도움으로 38년만에 고국의품에 안길수있었다.
이때 유모인 변복동 할머님은 비행기를향해 절을하셨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창덕궁의 낙선재에 기거하신다.
덕혜옹주께서 낙선재에 머무르실때
옹주의 전남편인 소다케유키가 찾아왔지만
당시 낙선재 비서실장이었던 이공재에 의해
옹주와의 만남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오랜 기간의 정신질환으로 생을 보낸 후 창덕궁 낙선재로 귀환한다.
그러나 수십년을 병상에 있었다는 그녀가 낙선재에 들어 서자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순종순명효황후 윤비에게 황실 예법에 맞게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덕혜옹주 회갑날. 왼쪽은 옹주의 유모인 변복동할머니시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덕혜옹주입니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과 왕진 치료를 번갈아 하며 지내던 덕혜옹주.
그녀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며
상궁들의 도움을 받아 나들이를 하거나, 상궁들과 화투를 치기도 했습니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생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얼마 전에 훙서한 회은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비전하는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가리킵니다)
"나는 낙선재 살고 싶어요"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홍유릉 뒷편에 모셔집니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그녀 스스로도 정말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부부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의 곁으로...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
(낙서.
아마 덕혜공주가 가장 두려워했던건 잊혀짐이 아니었을까
한국사'전'을 보고 매우 가슴아팠던
조선의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
우리의 가슴아픈 역사를 그대로 짊어지셔야했던 비운의 황녀.
한국사'전'에서 끝날즘에 이런말을 했었다.
아마 덕혜공주가 가장 두려워했던건 잊혀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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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daum.net/esther609/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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