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염색

천연염색의 역사

아기 달맞이 2010. 10. 9. 19:44

 

 

천연염색의 역사


천연염색은 자연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색들을 옷이나 인체에 옮기고 싶은 충동과 주술적 목적이나
심미적인 욕구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즉 신체에 색깔이 있는 흙이나 돌로 채색을 하고,
나무나 동굴 벽면에 원시 형태의 채색을 했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동굴 벽화는 후기 구석기시대인 원시 동굴 벽화로부터 시작되는데,
동굴의 바위 표면에 선각, 채색 또는 여러 가지 동물의 모습을 조각한 형태로 나타났다.
따라서 천연염색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섬유라 부패되어 오랫동안 보관 할 수 없어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기원전 7160~6150년대 팔레스타인의 사막 지대에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청색으로 염색된 직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천마총에서 발견된
말안장에 붙어 있던 홍색과 자색으로 섞어 짠 직물 조각이다.
그러나 이보다 2000여년이나 훨씬 앞선 문헌적 기록이 있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시작된 천연염색은
삼국시대에는 모든 색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는 염색의 완성시대로 까지 발전을 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에 약 50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색명을 통해,
이미 원색은 물론 중간색까지도 다양하게 색을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색을 전문적으로 염색하는 관영공장으로 염궁, 홍전, 찬염전, 소방전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헌을 살펴보면 변한?진한?부여시대 때 누에치는 법을 알아 겸포를 짜서
"청색의복을 착용하였으며 청색, 적색, 자색 등의 색실로 문양을 넣어 짠 금직이 사용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지 권13. 오환선비 동이전)

또한 삼국시대는 단순한 침염뿐 아니라
다양한 무늬염도 큰 유행을 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하게 단색으로 염색하는 것은 이미 보편화 되었고,
새롭게 꽃이나 새 등의 무늬를 넣어 염색하는 방법이 외부로부터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등에 나타나는 땡땡이 점무늬를 비롯한
원문 등의 다양한 문양과 삼힐의 염색기법이 보였음을 통해 알 수 있으며,  
그것은 신라 공예품에서도 나타나 양국의 영향관계를 알 수 있다.
왕복은 오채라는 색깔 옷을 착용 했으며, 대신은 청색 옷을 입고 서민은 갈옷을 입었다.

백제는 품관별 복색제도를 정하여 신분을 구별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적색, 청색, 황색, 자주색, 비색 등의 색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기의 유적, 공주 송산리 고분벽화의 사신도, 일월도와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의 사신도,
연화문, 구름무늬 등에서도 주, 황, 청, 흑색의 색채가 보여 뛰어난 염색기술을 볼 수 있다.

신라의 염색기술은 직위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 황색의 옷을 입게 하여
자초, 꼭두서니, 쪽, 황벽, 울금 등의 식물염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염색관계 부서를 두어 다양한 염색기술을 발전시켰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렇게 발전된 염색을 토대로 중간색과 좀더 견뢰도를 높여 잘 빠지지 않게 하는 염색법이 점차 발달되었다.
가내수공업과 농촌수공업 이외에 경공장에서 교역품과 귀족충당의 염색품을 생산하였다.
염색장은 청염장 30명, 홍염장 20명, 황염장 20명으로 분업화되어 생산되었다.
설치된 공장이 보여주듯이 청색과 홍색이 중심이었다.
청색은 쪽으로, 홍색은 수입 소방목과 홍화로 염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염색법은 간편한 화학염료가 개발되고 발전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6.25가 터지면서 외래문화가 급속히 많이 유입되면서 천연염색은 점차 사장되었다.
화학염료가 들어오기 전인 1800년대 말 까지는
주로 치자, 울금, 황백, 홍화, 소목. 자초, 쪽 등의 식물성 염료를 사용, 매염제로는 잿물, 석회, 오미자산, 오매산, 명반, 철장 등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일부의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최근에 들어서는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환경오염의 문제 때문에 단절되었던 천연염색의 맥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