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남난희

하동 / 산꾼 남난희

아기 달맞이 2010. 10. 4. 10:53

하동 / 산꾼 남난희

 

 

|올라가는 산보다 더불어 사는 산이 낫습디다"
높은 산에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욕망의 산에서 내려왔다
된장 만들고 차 덖으니 삼매가 따로 없다

3·4월이면 교통체증이 생긴다는 하동십리 벚꽃길이 한산했다. 하긴 6월 중순의 평일이니까.

경남 하동(河東)에 간 사람들은 숙제하듯, 벚꽃 길을 달리고, 화개장터 근처에서 재첩국을 먹고, 최참판댁을 구경한다.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 댁을 구현한, 그러니까 픽션의 세계를 '실재'로 만든 전략은 주효했다. 하동은 인기도, 만족도도 높은 관광도시다.

그러나 하동 사람들은 좀 더 옛날의 하동을 얘기한다. 바다에서 물자를 실은 배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물자를 내려놓던 곳이 바로 화개장터였다. 조영남 노래처럼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던 장터였지만, 이제는 양식한 은어와 재첩국을 파는 식당이 더 많다. '애기씨'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던 '토지'의 봉순이가 몸을 던진 깊은 섬진강, 진안에서 발원해 임실 순창 곡성의 물과도 몸을 섞어 살집이 좋던 섬진강은, 이제 이리 저리 물을 빼앗기고 말라 있었다.

하지만 하동 땅은 그렇게 쉽게 망가지는 곳이 아니다. 여전히 섬진강은 여울이 많아 자정능력이 뛰어나고, 흙은 무엇이든 튼실하게 키워낸다. 멀지 않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 바람은 열매를 야무지고 반들반들하게 만든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하동, 그중에서도 화개(花開)의 언덕배기에 한때 여성 산악계의 대표선수였던 남난희(53)씨가 산다.

그는 '최초'였다. 1984년 한국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그것도 한겨울에 76일 혼자서 종주했고, 86년에는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7455m)을 등정했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쓴 수필집 '하얀 능선에 서면'은 많은 사람을 산으로 달려가게 했다.

경북 울진 유학자의 집에서 태어난 남난희는 어릴 적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붙임성도 없던 아이였다. 경남여상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취직했다. 여전히 남과 어울리는 게 힘들었던 그는 이 산, 저 산 다니며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기도에 답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모든 걸 다 받아주잖아요. 산이 그랬어요. 나한테는."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다. 더 잘 올라가고 싶고, 더 빨리 올라가고 싶었다.

81년 한국등산학교에 다니며 암벽, 빙벽 전문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93년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려 팀을 꾸려 후배들을 훈련 시켰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 여성산악인은 지현옥씨로 기록돼 있다. "옛날엔 스폰서가 없어서 어디서 돈을 구해와야 했는데 내가 그걸 못했어요. 결국 내가 빠졌습니다. 그런 일을 하기엔 부족했어요." 그는 이 대목에서 말을 아끼고 싶어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굽히지 않는 성격, 여성에 대한 텃세, 고졸자 차별 등 여러 이유를 꼽는다.

첫 꿈을 접고 나서, 산을 타면서 사진 찍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아이가 세 살 무렵 남편은 집을 떠나 승려가 됐다. 그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찻집을 하다가 이곳에 돈냄새가 풍기기 시작할 무렵, 강원도 정선으로 옮겼다. 2002년 태풍 루사로 정선 살던 곳이 폐허가 되자, 다시 화개로 들어왔다. 이제 열일곱 살이 된 아들은 대안학교를 마치고 아는 스님이 네팔에 세운 무료 한국어학원에서 스님 일을 돕고 있다. 한국말을 아는 셰르파는 수입이 세 배쯤 되니 인기가 높다. 아이는 요즘 하동에서 '휴가' 중이다.

사실 그가 혼자 몸으로 애 키우며 먹고살 수 있었던 건, 화개의 땅과 바람의 덕이었다. 그는 몇 봉지 되지 않는 야생녹차와 집 뒤편 40~50평 야산에서 수확한 차, 콩 10가마니를 된장으로 만들어 팔아 한 해 1000만원쯤 번다. 아, 하동문화인들이 만든 '지리산학교'에서 숲길걷기 강사를 하며 한 달에 15만원씩 받는 것도 포함된다. 된장은 맛 좋다 소문나고, 야생녹차도 구하려는 이가 많지만 더는 안 한다. "뭐하러 많이 해요. 이거면 되는데." 중국차는 향으로, 일본차는 색으로, 한국차는 맛으로 마신다. 그가 만든 야생차도 색은 약하나 그 맛은 강하되 혀를 공격하지 않고, 부드럽되 여운이 오래 남는다.

산을 타면서 대나무들 사이에 숨은 차나무에서 잎을 딴다. 해 있을 때 종일 따야 한 줌 정도. 잎을 손질해 덖고 나면 자정이 훌쩍 넘는다. 기계나 남의 손 하나 안 쓰고 혼자 따고, 혼자 덖는다. 그 많은 장작도 혼자 다 팼다. "힘들어 죽고 싶을 때도 있죠. 어쩔 수 없어 할 때도 있지. 그런데 하다 보면, 잡념이 하나도 없는 삼매(三昧)에 빠져요." 얼마 전, 아들과 백두대간을 종주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그는 지리산이 제일 좋다. "설악산이 '오르는 산(등산)'이라면, 지리산은 '들어가는 산(입산)'이에요."

차나무는 경사져서 물이 잘 빠지고 바람이 좋은 데서 잘 자라는데, 여기가 딱 그렇다. 그런데 차(茶)가 인기지만, 인기라서 문제다. 농부들이 논밭을 갈아엎고 차나무 심은 지 한참 됐다. 이제 너무 많아서 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차만 먹고 삽니까. 논밭에선 양식 키워야죠."

'몸을 쓰는 삶'을 말로 풀어 돈 버는 이도 많고, '대안의 삶'을 상업화한 사람도 많다. 남난희는 자기 사는 방식을 자랑할 줄 모른다. "세상에 좋기만 한 건 없어요. 좋은 만큼 단점도 있는 거지."

그가 빵을 좋아한다는 귀띔을 듣고 그의 집에 가며 빵을 사갔다. 왜 이리 많이 사왔느냐 묻기에,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라 했다. 그가 말했다. "그런 거 없어요.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거지. 아, 달다." 욕망 없는 이 고집스러운 사람,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참 힘들겠다.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