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는 메주 쑤느라 바쁜데….”
남난희(49)씨와의 첫 전화 내용이다. ‘낮은 산이 낫다’며 지리산 자락 쌍계사 근처에 살고 있는 남씨와 만나는 일은 그래서 1주일 늦춰졌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 속에서 찾아간 경남 하동군 화개면. 백두대간을 76일간 혼자서 씩씩하게 걸어다녔던 남씨는 이제 된장을 담그며 느긋하게 산에 안겨 지내고 있다.
시골집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 순간 맞은 편 마루 위로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린 채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남씨의 입에서도 지난 시절 산과 함께 했던 이야기가 주렁주렁 구수하게 퍼져 나왔다.
남씨는 1984년 백두대간을 단독 종주하기 전 심한 마음의 열병을 앓았다. “아마 그때가 사춘기였나 봅니다. 산에 가지 않으면 왠지 폭발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열정적으로 산엘 다녔지요.” 산은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 마음껏 발산하도록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극도의 허무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철저하게 혼자 떨어져 지내면 어떻게 될까’라는 고민이 추운 겨울 홀로 백두대간에 올라서도록 만들었다. 정신과 육체의 고통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알아볼 요량이기도 했다. 20대에 뒤늦게 찾아온 영락없는 ‘사춘기’였다.
76일간 눈보라와 싸우며 걷는 동안 마주친 것은 다름아닌 바로 자신. 눈이 눈 앞을 가릴만큼 쏟아져 하루에 2.5㎞도 걷지 못한 날에도 눈송이보다 많은 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걸린 달을 희롱하기도 하고. 벌거벗은 나무를 부둥켜 안으면서도 상념은 항상 ‘나’를 맴돌았다.
“산을 내려오니 다들 혼자서 무섭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전 그 질문이 우스웠습니다. 무섭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었으니까요.”
■삶의 소중함 깨우친 놀이터
90년 ‘다시는 종주같은 것은 하지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또다시 능선에 올라서야 했다. 산악 전문지 월간 <사람과 산> 특집기사로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것이다. “이번엔 어떻게든 백두산까지 제대로 가보자”라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종주는 6년 전과 달라져 있었다. 혼자도 아닌 데다가 닷새에서 일주일 정도 끊어서 천천히 이어가는 종주 길. “즐거운 놀이였죠. 백두대간도 이렇게 즐기면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산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죽음과 나’라는 고민에 싸여 걸었던 시절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비로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실감한 것이다.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 연둣빛 새싹들.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 등등. 눈이 시리도록 보고 또 보고 감탄을 거듭했다.
“일체유심조라고 그러죠. 그걸 깨달은 거예요. 이제는 이왕 할거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쑤고 있는 메주도 기쁜 마음으로 해야 메주 자체도 좋아지는 것 아니겠어요.”
93년 지현옥이 이끄는 에베레스트(8850m)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했다.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최고봉에 오른 순간이었다. 이 원정대에 남난희라는 이름은 빠져 있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엄청난 상실감이 밀려왔다.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간 그 순간 남씨는 결혼이라는 비상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갖게 된 아이. 남편의 성화에 못이겨 모든 걸 서울에 남기고 94년 지리산으로 내려갔다. 아이를 낳고 2000년 정선으로 옮겨가 살다가 2002년 태풍 루사로 모든 걸 잃고 다시 지리산 밑에 자리를 잡았다.
이 와중에 남편은 출가를 했다. 하지만 남씨는 현재 자신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때 에베레스트에 가게 됐다면 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한테 떠밀려 쫓기다시피 살았을테죠. 이렇게 속도를 늦추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에 내려와 품 속에 거처하다 보니 비로소 산이 보인다는 남씨. 혹시 아직도 히말라야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아요. 산이 저를 선택해야죠. 어쨌든 지금 에베레스트에 간다면 참 편안하게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요. 경쟁심도 사라지고. 꼭 이루겠다는 목표도 없으니 산을 보다 잘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겠죠.”
이런 남씨에게도 소망은 있다. 통일이 돼 남겨진 백두대간을 마저 걸어가 보는 것. “백두대간은 저에게 있어 등반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죠. 많은 사람과 다 함께 손잡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못 가는 사람이 있다면 빵 한 조각이라도 보태면 되죠.”
남씨는 어느덧 나무도 거두고 새도 거두고 풀도 거두고 벌레도 거두는 넉넉한 산의 품을 닮아 있었다.
■남난희는
1984년 1월 1일부터 76일간 백두대간 단독 종주. 이때 기록은 <하얀 능선에 서면>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86년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7455m)을 올랐고. 89년엔 설악산 토왕성 빙벽 폭포를 등반했다. 94년부터 지리산에 내려와 살다가 2000년엔 강원도에서 ‘정선자연학교’를 열었다. 2002년 다시 현재 살고 있는 경남 하동군 화개로 내려왔다.
남난희(49)씨와의 첫 전화 내용이다. ‘낮은 산이 낫다’며 지리산 자락 쌍계사 근처에 살고 있는 남씨와 만나는 일은 그래서 1주일 늦춰졌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 속에서 찾아간 경남 하동군 화개면. 백두대간을 76일간 혼자서 씩씩하게 걸어다녔던 남씨는 이제 된장을 담그며 느긋하게 산에 안겨 지내고 있다.
시골집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 순간 맞은 편 마루 위로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린 채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남씨의 입에서도 지난 시절 산과 함께 했던 이야기가 주렁주렁 구수하게 퍼져 나왔다.
남씨는 1984년 백두대간을 단독 종주하기 전 심한 마음의 열병을 앓았다. “아마 그때가 사춘기였나 봅니다. 산에 가지 않으면 왠지 폭발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열정적으로 산엘 다녔지요.” 산은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 마음껏 발산하도록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극도의 허무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철저하게 혼자 떨어져 지내면 어떻게 될까’라는 고민이 추운 겨울 홀로 백두대간에 올라서도록 만들었다. 정신과 육체의 고통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알아볼 요량이기도 했다. 20대에 뒤늦게 찾아온 영락없는 ‘사춘기’였다.
76일간 눈보라와 싸우며 걷는 동안 마주친 것은 다름아닌 바로 자신. 눈이 눈 앞을 가릴만큼 쏟아져 하루에 2.5㎞도 걷지 못한 날에도 눈송이보다 많은 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걸린 달을 희롱하기도 하고. 벌거벗은 나무를 부둥켜 안으면서도 상념은 항상 ‘나’를 맴돌았다.
“산을 내려오니 다들 혼자서 무섭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전 그 질문이 우스웠습니다. 무섭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었으니까요.”
■삶의 소중함 깨우친 놀이터
90년 ‘다시는 종주같은 것은 하지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또다시 능선에 올라서야 했다. 산악 전문지 월간 <사람과 산> 특집기사로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것이다. “이번엔 어떻게든 백두산까지 제대로 가보자”라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종주는 6년 전과 달라져 있었다. 혼자도 아닌 데다가 닷새에서 일주일 정도 끊어서 천천히 이어가는 종주 길. “즐거운 놀이였죠. 백두대간도 이렇게 즐기면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산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죽음과 나’라는 고민에 싸여 걸었던 시절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비로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실감한 것이다.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 연둣빛 새싹들. 지천으로 널린 야생화 등등. 눈이 시리도록 보고 또 보고 감탄을 거듭했다.
“일체유심조라고 그러죠. 그걸 깨달은 거예요. 이제는 이왕 할거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쑤고 있는 메주도 기쁜 마음으로 해야 메주 자체도 좋아지는 것 아니겠어요.”
93년 지현옥이 이끄는 에베레스트(8850m)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했다.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최고봉에 오른 순간이었다. 이 원정대에 남난희라는 이름은 빠져 있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엄청난 상실감이 밀려왔다.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간 그 순간 남씨는 결혼이라는 비상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갖게 된 아이. 남편의 성화에 못이겨 모든 걸 서울에 남기고 94년 지리산으로 내려갔다. 아이를 낳고 2000년 정선으로 옮겨가 살다가 2002년 태풍 루사로 모든 걸 잃고 다시 지리산 밑에 자리를 잡았다.
이 와중에 남편은 출가를 했다. 하지만 남씨는 현재 자신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때 에베레스트에 가게 됐다면 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한테 떠밀려 쫓기다시피 살았을테죠. 이렇게 속도를 늦추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에 내려와 품 속에 거처하다 보니 비로소 산이 보인다는 남씨. 혹시 아직도 히말라야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아요. 산이 저를 선택해야죠. 어쨌든 지금 에베레스트에 간다면 참 편안하게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요. 경쟁심도 사라지고. 꼭 이루겠다는 목표도 없으니 산을 보다 잘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겠죠.”
이런 남씨에게도 소망은 있다. 통일이 돼 남겨진 백두대간을 마저 걸어가 보는 것. “백두대간은 저에게 있어 등반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죠. 많은 사람과 다 함께 손잡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못 가는 사람이 있다면 빵 한 조각이라도 보태면 되죠.”
남씨는 어느덧 나무도 거두고 새도 거두고 풀도 거두고 벌레도 거두는 넉넉한 산의 품을 닮아 있었다.
■남난희는
1984년 1월 1일부터 76일간 백두대간 단독 종주. 이때 기록은 <하얀 능선에 서면>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86년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7455m)을 올랐고. 89년엔 설악산 토왕성 빙벽 폭포를 등반했다. 94년부터 지리산에 내려와 살다가 2000년엔 강원도에서 ‘정선자연학교’를 열었다. 2002년 다시 현재 살고 있는 경남 하동군 화개로 내려왔다.
출처 : 일간스포츠 200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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