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고싶은 영화

추석인데 한국영화, 한 편쯤은 봐야죠

아기 달맞이 2010. 9. 18. 08:11

예전에는 추석 하면 영화, 영화 하면 추석이었다. 미디어 배급 환경과 가족문화가 급변하면서 이제는 그런 풍경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찌됐든 추석에는 영화’라는 근본주의자들을 위한 가이드, 추석에 극장에서 볼 만한 한국영화들을 추려 보았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보는 것만 아니라면 추천할 만하다. 김기덕 감독의 조연출 출신인 장철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상식 이하의 가부장제 상황 아래 말라 죽어가던 여자 김복남의 복수극이다.

서울에서 은행 직원으로 일하던 혜원은 모종의 사건으로 휴가를 받아 어렸을 때 잠시 머물렀던 무도로 향한다. 무도에는 그 시절의 친구인 김복남이 살고 있다. 김복남은 혜원을 기쁘게 맞이하지만 섬 안의 다른 주민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섬에서 쉬는 동안, 혜원은 김복남이 남편을 비롯한 다른 남자들에게 극심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음을 눈치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젊은 시절 가부장적인 폭력을 모두 통과해낸 섬의 나이든 여자들은 더욱 심각한 논리로 김복남을 옥죈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고, 혜원은 김복남을 외면한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하늘을 바라보던 김복남의 손에 어느새 낫이 들려 있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우리가 왜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칼부림 우화다.

김복남은 사회안전망 밖에 방치된 모든 이들의 은유이고, 혜원은 사회안전망 안에서 밖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은유다. 세상이 그들을 돕지 않고, 제도가 그들을 돕지 않고, 우리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김복남은 자력 구제에 나선다. 수동적이거나 작위적이거나 자폐적이었던 그간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과 달리,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납득할 만하게’ 움직이는 여성 캐릭터의 탄생이다.

단 한 개의 극장에서 단관 개봉할 뻔했던 이 영화는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을 거쳐 국내 평단과 관객의 상당한 호응을 얻으며 기사회생했다. 이 기사를 읽는 시점이라면 아마도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타이밍일 것이다. 놓치지 않길 바란다.

땅의 여자
카메라가 세 명의 여성 농민을 쫓는다. 영화 <땅의 여자>는 대학 졸업 후 도시를 떠나 작은 시골마을에 정착한 세 친구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곳에서 그들은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그 모든 역할을 감내하면서 내가 이 삶에서 원하고 추구하는 것까지 챙기기란 매우 어려운 노릇이다. 그게 신념이든 행복이든 말이다. 삶이란 게 그렇다.

그래서 이들이 꾸려나가는 서로 다른 색깔의 인간관계를 지켜보는 일이 매우 흥미롭다. 세 명 모두 농촌 현장으로 가겠다는 농민운동의 구호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을 직면하고 그것의 무거움을 짊어지는 풍경의 온도는 서로 조금씩 다르다. 각자의 성격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며 앞으로 맞닥뜨릴 운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다큐멘터리의 기획성에 관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모든 종류의 영상물은 ‘기획된’다. 의도와 기획을 경유하지 않은 결과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좋은 다큐멘터리는 애초 기획되지 않았던 방향에서 의외의 순간을 맞닥뜨리면서 비로소 훌륭한 영혼을 갖게 된다. <식코>가 그랬고, <경계도시 2>가 그랬다. <땅의 여자>도 마찬가지다. 애초 ‘운동가’ 고부 관계의 특별함을 담고자 했던 카메라의 시선은,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이 아닌,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되면서 보기 드문 생명력을 갖게 된다.

감독의 카메라를 경유해 우리는 ‘목적으로서의 삶’이 ‘결과로서의 삶’ 앞에서 변질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닌, 같이 어울려 ‘삶’이 되어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진귀한 광경이다. 우리는 ‘결과로서의 삶’ 앞에 무릎 꿇고 순응하는 방법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날들을 위화감이나 거리낌 없이 온전히 섞여 들어가 담아낼 수 있었던 감독의 용기와 끈기는 근래 보기 드물게 칭찬 받을 만한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다큐멘터리가 선교 혹은 흥행을 위한 수단으로 급속히 전락하고 있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매우 평범한, 그래서 더욱 독특한 그들의 일상에 대해 이 지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생각은 없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녀들에게는 특별한 드라마도, 깜짝 놀랄 만한 사연도, 명쾌한 결말도 없다.

그저 ‘살아나간’다. <땅의 여자>의 힘은 그렇게 땅에 발 붙이고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열의와 절망, 끈기와 낙관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과 입장이 다른 관객은 있을 수 있어도, 이 영화를 ‘싫어할’ 관객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만큼 가볍고 가깝고 동시에 문득 문득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속을 드러내는, ‘보통 사람’이라는 짧고 가벼운 단어가 사실 얼마나 무겁고 단단한 것인지에 관해 땅을 밟고 선 그녀들의 표정으로 보여주는, 정말 땅 같은 영화다.

탈주
5년 동안 소속 부대에서 탈영한 군인의 숫자가 5900명이었다. 한 해 동안 자살한 군인의 수는 70명이었다. 2007년 국방부 조사자료다. <후회하지 않아>로 국내 장편 독립영화의 새 장을 열었던 이송희일 감독의 신작 <탈주>는 탈영한 병사들의 이야기다.

재훈은 말기암 선고를 받은 홀어머니가 있지만 의가사 제대 신청이 번번이 거부당한다. 민재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애인에게 버림 받았다며 괴로워한다. 동민은 끊임없는 따돌림과 구타 가혹행위로 이미 수 차례 탈영 경험을 가진 문제 사병이다. 이들 셋이 무장 탈영을 감행한 시점에서 영화가 출발한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는 동민은 자살의 길을 택하고, 재훈은 얼마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 어머니를 찾아나선다. 애인에게 버림 받았다던 민재의 사정은 언론 보도를 통해 부대 내 성희롱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서 이들의 탈주는 별 희망이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치달아 간다.

이송희일의 두 번째 장편영화 <탈주>는 군대로부터의 탈주를 그리고 있지만, 사실 지켜지지 않는 약속과 사회적 규범들로부터의 탈출을 그리는 영화다. 이 영화는 부조리의 체계를 시각화하거나 강조하기보다 세상의 모순을 이미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내내 달린다. 갈등은 쉽게 촉발되고, 감정은 차갑게 묘사되며, 여정은 조급하고 신속하다. 그리고 결국 파국의 절정에서 서둘러 막을 내린다.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힘이 있는 영화. 결국 우리는 갈 곳이 없다.

해결사
<탈주>가 어둡다면 <해결사>는 정통 ‘추석 특선’ 영화다. 설경구, 이정진, 오달수 등 호화 캐스팅에서부터 추석에 아무 생각 없이 시원하게 볼 만한 액션 활극이라는 점이 장점.

강태식은 지금은 고작 흥신소를 운영하는 뒷골목 인생이지만 한때 전직 형사였다. 그가 불륜 현장을 포착하는 평범한 의뢰라고 생각했던 장소를 급습했더니 놀랍게도 한 여자가 죽어 있다. 꼼짝없이 살인범으로 몰린 강태식. 그때 미상의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살인 누명을 벗고 싶으면 아무개를 납치하라”는 주문을 받게 되면서 이야기는 쉴 틈 없는 질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해결사>는 빠르고 대담한 영화다. 미드의 빠른 전개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점이 장점이다. 다만 스릴러로서의 잘 짜인 얼개보다는 ‘활극’의 쾌감 쪽에 방점이 찍힌다는 점을 염두에 둘 것. 정두홍 무술감독이 만들어낸 좁은 장소에서의 잘 짜인 액션 경합도 감상의 즐거움이다. 류승완 감독이 각본에 참여했고, 그의 조감독 출신인 권혁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퀴즈왕
여기 상금을 주는 퀴즈쇼가 있다. 공부벌레도, 나사 출신 공학박사도 서른 번째 마지막 문제만큼은 언제나 풀지 못했다. 그래서 누적상금이 133억원에 이르렀다. 그런데, 교통사고 때문에 경찰서에 모인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매우 우연히 그 마지막 문제의 정답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스물아홉 문제만 맞히면 133억을 가질 수 있다! 방송 당일, 약속이라도 한 듯 녹화장에 나타난 사람들. 133억은 누가 챙겨갈 수 있을까.

장진 감독의 신작 <퀴즈쇼>는 김수로, 한재석, 류승룡, 장영남, 류덕환, 심은경, 김병욱, 송영창 등 매우 다양한 색깔의 배우들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나가는 난장 코미디다. 익숙한 장진사단 배우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장진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김수로, 한재석 등의 배우가 눈에 띄는데, 다양한 캐릭터들을 한 영화 안에서 모자라거나 넘치는 감 없이 운용해내는 장진 감독의 재능이 여전히 빛을 발한다. 이 많은 배우들이 한 번씩만 웃겨도 120분은 그냥 간다는 우스개가 정말 통하는, 그야말로 추석에 기분 좋게 보기에 손색이 없는 영화.

계몽영화
한 가족이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다. 나름 탄탄한 주류 중산층 가족인 그들에게서 얼핏 알 수 없는 균열이 느껴진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순간,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시대인 일제 강점기 시절, 아버지의 시대인 군사독재 시절, 그리고 현재의 시점, 이렇게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우리는 삶을 마주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관된 ‘태도’들을 목격하게 된다.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는 그의 단편 <전쟁영화>로 부터 착안됐다. <전쟁영화>의 주인공인 정학송의 선대와 후대 이야기를 연결시켜 장편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이다. 1895년과 1960년대, 그리고 현재를 오가면서 우리는 선대의 욕망이 후대에 이르러 어떤 파장을 낳고 또한 어떤 식으로 유전되는지에 관해 ‘영화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을 맞게 된다. 이렇게 시대를 오가는 이야기의 경우 중심 캐릭터를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들이 병풍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잦은데, <계몽영화>는 치밀한 연출과 기획으로 모든 인물들을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데 성공한다. <계몽영화>가 보여주는 시대 안의 우리들은 어디서, 어떤 선택을, 어떤 태도로 하고 있었을까. 규모 있는 시공간의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진행과 이야기를 보여준 근래 보기 드문 영화.

옥희의 영화
<하하하>에 이은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영화를 전공하는 옥희(정유미)와 같은 과 동기 진구(이선균), 그리고 영화과 송 교수(문성근)를 둘러싼 이야기로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란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옥희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다르게, 또 같게 행동하며 조금씩 중첩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홍상수 영화를 글로 소개하는 일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던가. 극장을 찾아 실컷 웃고, 꼬집히고, 생각하고 나오면 그만. 이 작품은 9월 1일부터 11일까지 열리는 베니스 영화제가 끝나는 대로 16일 국내 개봉한다. 포스터 왼쪽 상단에 장난처럼 그려진 일러스트는 홍상수가 직접 그린 문성근의 얼굴이라고.

시라노; 연애조작단
‘시라노 에이전시’는 관계에 서투른 사람들을 도와 연애를 이루어주는 연애조작단이다. 정작 대표 병훈(엄태웅)은 사랑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사람. 그러나 연애만큼은 확실히 성공시킨다!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숨 가쁜 작전과 동선으로 종횡무진하며 의뢰인의 사랑을 실현시켜주는 이들 앞에 영 어눌한 남자 상용(최 다니엘)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별 볼 일 없는 로맨틱 코미디로 오해하고 있다면 우선 감독의 필모그래프를 눈여겨볼 일이다. 「YMCA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 등 탄탄한 이야기와 캐릭터로 인정 받은 김현석 감독의 신작. <시라노; 연애조작단> 역시 예의 뛰어난 코미디 호흡과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다. 감독이 15년 전에 쓴 각본 <대행업>(당시 대종상에서 신인각본상 수상)을 기초로 해 만들었다고.

허지웅<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