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국수를 찾아서

아기 달맞이 2010. 8. 17. 21:19

음식은 메모리를 먹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추억하고 싶어 음식을 먹거나 친근해서 습관적으로 먹는다.

우리 음식 문화에서 국수는 또 그렇게 친근한 메모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왕후장상에서 필부까지 계급을 초월하고 시대를 관통해 사랑 받아온 음식이 국수다.

기원은 확실치 않다. 다만,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걸 정설로 여긴다.

그 길을 따라 전국 팔도 곳곳에서 치대고 뽑고 삶아냈던 ‘한국의 국수길’을 찾아간다.


한반도 국수 재료는 원래 메밀이었다. 밀가루보다 구하기가 쉬웠던 때문이다.

고려 때 중국에서 국수 만드는 법을 배웠으나 귀한 밀가루 대신 메밀가루를 썼다는 기록이 전한다.

유학자 이시명의 아내 안동 장씨의 요리책 『음식디미방』(1670년)에선 메밀을 으뜸가는 국수 재료로 소개하기도 했다. 장씨는 이 책에서 ‘메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반죽한 후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고 쓰고 있다.

조선 2대 냉면으로 꼽히는 평양냉면·진주냉면, 막국수의 기본 재료 또한 메밀이다. 물론 밀국수·녹두국수·올챙이국수 등 다른 재료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 먹는 음식이었다.

구하기 쉬운 재료가 국수가 됐다

메밀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구황작물로 구하기 쉬운 재료였던 때문이다. 파종에서 수확까지의 기간이 짧은 데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재배 면적이 적지 않았다.

가을이면 농번기 때 물을 대지 못해 모내기를 놓친 논은 물론, 산간지방에서도 메밀꽃이 피었다. 이렇게 수확한 메밀을 빻은 후 끈기를 더하기 위해 전분을 섞어 국수를 만들어 먹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메밀은 상류층에는 별미로, 서민들에게는 없어선 안 될 식량이었다.

산간지방에서는 감자 녹말이 국수가 됐다. 가늘게 뽑기 힘든 성질 때문에 수제비 형태로 만들어 먹었다. 동그랗게 만든 것이 감자옹심이다. 옥수수 가루를 사용하기도 했다. 반죽한 후 손으로 뚝뚝 떼어 조리한 것이 강냉이수제비, 걸죽한 반죽을 구멍 뚫린 바가지를 통해 내려 끓이면 올챙이국수가 된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전분 반죽을 압축해 면을 뽑았다. 여기에 고기나 생선회 등을 고명으로 얹어 얼큰하게 비벼먹었다. 평양냉면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는 함흥냉면이다. 북한의 『조선의 민속전통』(북한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94년)은 이를 ‘농마국수’ ‘회국수’라 소개하고 있다.



꿩·은어·멸치…신비한 육수의 세계

‘국수를 먹을 때 중국인은 함께 끓인 채소·고기 등 건더기를 먹고, 일본인은 면을 먹고, 한국인은 국물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우리 국수의 비결과 맛의 원천은 육수에서 나온다.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식혀 국수를 말아먹으면 ‘비할 데 없는 맛’을 느낄 수 있다고 각종 문헌은 적고 있다.

특히 평양냉면의 경우 ‘육수 전쟁’이라고 해야 할 만큼 ‘제대로 된 평양냉면 육수’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원래 평양냉면은 ‘꿩고기 육수로 동치미를 담아 여기에 메밀국수를 말아먹었다’는 게 정설이다.

육수를 낼 만큼 꿩이 많이 잡혔을까? 김영복 전통향토음식문화연구원 원장은 “우리가 소를 잡아먹게 된 역사는 오래지 않지만, 꿩은 오일장마다 많이 등장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꿩이 귀해진 요즘, 평양냉면 전문점들은 대부분 사태·양지 등 쇠고기로 국물을 낸다.

안동 건진국시는 은어를 달인 장국을 쓴다. 여기에 밀가루와 콩가루를 반반씩 섞어 반죽한 국수를 만다. 기품 있는 외모는 물론 맛도 좋아 은어를 흔히 수중군자(水中君子)에 빗대기도 하는데, 잡힐 때 “죽는 것은 괜찮으나 상놈의 입에 들어갈까 슬프다”고 유언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남긴 생선이다.

진주냉면 육수는 멸치 장국이다. 멸치 외에 개발(바지락)·건홍합·마른 명태·표고버섯 등을 넣고, 재래식 간장으로 간을 맞춰 멸치장국을 만들었다. 잔치국수 또한 멸치가 기본 재료다. 메밀국수는 삶은 후 양념을 하지 않고 바로 먹기도 했다. 별도의 육수가 필요없을 만큼 메밀 특유의 향이 삶은 국물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혼례 때만 맛보던 ‘고급 음식’ … 멸치 귀한 내륙선 닭국물로

“국수 언제 먹여 줄래?”

처녀·총각에게 결혼 계획을 물을 땐 어김없이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무슨 국수를 먹여준다는 말일까. 답은 바로 잔치국수다. 밀가루로 만든 소면에 멸치 국물을 붓고, 호박·지단·실고추 같은 고명을 얹은 것이다.

지금은 ‘에이~’ 할 만큼 흔하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는 혼례 때나 먹을 수 있는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밀이 귀했기 때문이다. 실제 고려도경 잡속(雜俗)편에는 “밀가루 값이 비싸 성례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고 기록돼 있다. 서민층은 그야말로 누가 혼례라도 해야 밀국수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잔치국수를 원조로 한 ‘멸치국수’가 대중화된 건 일제 시대 이후다. 당시 한반도에 밀이 본격적으로 재배됐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원조 밀가루에다 싼값에 밀가루가 수입되면서 밀국수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된 것이다.

이 무렵부터 혼례 때나 먹던 잔치국수는 들일을 하다 새참으로 뚝딱 해치우는 ‘두레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국수를 삶아 들로 가져가서 고명 없이 국물만 부어먹거나 양념장 정도를 곁들이는 소박한 음식으로 변모한 것이다.

흔해지다 보니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탄수화물보다 고기가 더 각광을 받았고, 먹거리가 풍부해지면서 결혼식에서도 잔치국수 대신 갈비탕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혀 가던 잔치국수가 최근 다시 대중 속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나 가끔씩 해먹던 음식으로 밀려났던 것이, 멸치국수·잔치국수라는 이름으로 시장과 대학가, 시내 중심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세력을 넓히는 중이다. 먹기 쉽고 싸고, 또 집단 무의식 속에 자리한 ‘메모리 음식’이기 때문이다.

멸치국수 프랜차이즈 바람도 일고 있다. 공릉동원조멸치국수는 2년 만에 30여 개, 명동할머니국수 또한 최근 20여 개의 분점을 냈다.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게 특징이다.

명동·코엑스·선릉 등 강남권에서는 젊은 층이 많이 찾는다. 김경숙(51) 명동할머니국수 대표는 “인터넷과 입소문을 타고 젊은 손님들이 찾아온다”며 “한 그릇에 3000원으로 싸고, 뚝딱 말아먹고 곧바로 일어설 수 있어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7호선 공릉역 인근엔 아예 멸치국수 먹자골목도 형성됐다. 이 골목에서 20년 전부터 장사를 해온 공릉동원조멸치국수를 중심으로 하나둘씩 점포가 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10여 개의 국숫집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멸치국수의 포인트는 육수. 멸치의 쓰고 비린 맛을 남기지 않고 시원한 맛을 내는 게 관건이다.

명동할머니국수는 멸치·다시마·바지락·북어머리에 파뿌리를 넣어 육수를 낸다. 공릉동에서 멸치국숫집을 하는 이석환(36)씨는 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멸치를 15일 이상 바짝 말려 사용한다. “나무껍질처럼 바짝 마른 멸치를 끓여야 비린내가 덜 나기 때문”이란다.

2년 전 허영만 화백의 『식객』에 등장,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고대앞멸치국수는 멸치와 디포리(밴댕이)를 재료로 육수를 두 번 끓여낸다. “잘 마른 멸치와 디포리, 통무를 넣고 40분 정도 끓여 건져낸 다음 펄펄 끊는 물에 다시 멸치가루와 다진 마늘, 양파 등을 추가로 넣고 20분 정도 끓입니다.”

한편 경상도 바닷가에는 육수에서 생선 비린내를 없애는 방법이 구전으로 내려온다.

무쇠 덩어리를 시뻘겋게 달궈 솥에 담그면, 국물이 급속 가열되면서 안에 들어 있는 생선 찌꺼기를 녹여 비린내가 빠진다는 것이다.

멸치와 해물을 넣고 끓이는 어즙성 육수는 주로 바닷가에서 쓰던 방법이다. 멸치가 귀한 내륙 지방에서는 닭국물에 국수를 말기도 했다. 잔치국수에 얹는 고명도 다르다. 해안 지방은 삶은 조갯살·김가루 등을, 내륙에서는 호박·유부·지단 등을 올려 먹었다.

명동할머니국수·공릉동멸치국수·고대앞멸치국수 등 이름난 전문점의 잔치국수는 한 그릇에 3000원이다. 명동할머니국수의 20년 전 가격은 2500원, 지난해 밀가루 값 인상으로 국수공장에서 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덩달아 500원을 올렸다고 했다.

공릉동멸치국수(공릉동) 02-6080-6035 고대앞멸치국수(고대) 02-953-1095 명동할머니국수(명동) 02-778-2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