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의 미학으로 세계를 누빈다
누비는 어떤 옷도 만들 수 있다. 당의와 다양한 배자, 색동포는 모두 누비로 만든 것이다. | |
지난겨울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샤넬은 코코 코쿤백으로 대박을 쳤다. 이는 솜을 넣어 두툼하게 누빈 백으로 폭신하고 가볍고 따뜻하다는 찬사가 따랐다. 또 순대파카라고 불렸던 가로줄 누비의 거위털 파카도 지난겨울의 핫 아이템이었다. 1㎝ 안팎의 촘촘한 누비로 옷 전체를 누비는 우리 눈으로 볼 때, 이들의 누비 수준은 초광폭(超廣幅)으로, 누비로서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렇게 옷이나 가방 전체를 누빈 누비 제품에 열광했다.
이를 보며 들었던 생각 하나. ‘한국의 누비가 한복·승복·이불을 넘어 세계의 명품 디자인과 만난다면?’ 우리의 명주나 모시 같은 고유의 옷감으로 세계시장에 접근하기는 아직 힘들다. 옷감은 사람마다, 나라마다 선호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옷감을 다루는 방식인 누비의 경우엔 세계화도 가능한 기법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경주에 갔다. 경주엔 인간문화재 누비장 김해자(58) 선생이 있다. 선생은 누비야말로 세계적인 우리의 문화상품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글=양선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제 퀼트박람회 ‘다시 보고 싶은 전시’ 1위
바느질로 옷감을 마련하는 걸 서양에선 퀼트라고 한다. 작은 조각천을 이어서 옷이나 이불을 만들 만큼 큰 천을 준비하는 것이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누비도 퀼트의 한 분야다. 서양에서도 갑옷이나 승마조끼의 안감 등으로 누비를 사용했다. 한데 옷 전체를 시종일관 균일한 땀과 간격을 유지하며 떠낸 누비는 한국에만 있다. 김해자 선생은 “서양식 퀼트는 기교의 산물이고, 우리의 누비는 모든 기교가 걸러진 단순함의 극치”라고 정의한다. 실제로 누비는 어떤 장식이나 특수한 바느질 기법도 없이 홈질 한 가지로 천과 천, 천과 솜을 이어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2003년 그가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국제퀼트박람회’에 참가했을 때다. 세계의 화려한 퀼트작품이 총출동한 그 박람회에서 일본인들이 선생에게 와서 이렇게 얘기하더란다. “다른 전시실은 너무 화려해 정신이 없었는데 여기서 누비를 보니 비로소 숨이 트인다.” 단순함이야말로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고, 숨을 쉴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올해 박람회 주최 측은 관객들을 대상으로 ‘다시 보고 싶은 전시’를 조사했다. 일본인들은 7년 전 선생의 누비 전시를 1위로 뽑았다. ‘단순함의 울림’은 그렇게 오래 갔다.
퀼트처럼 누비를 취미생활로
올 초 선생은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국제퀼트박람회에 다시 갔다. 일본 측의 메인 초대전에 초청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주최 측은 끊임없이 시연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선생의 시연에 사람들은 구름같이 몰렸고, 바늘땀을 뜨는 미세한 동작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중하더란다. “문득 일본인들이 누비를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누비의 일본화’에 대해 잠시 생각했단다. 그리고 내린 결론. ‘우주가 인간 사는 곳인데, 어느 인간에게라도 유익한 기술이면 됐다.’ 그리고 일본 시장을 둘러봤다. 거기엔 각종 장식품이나 가방 등을 만들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퀼트 반제품 키트가 즐비했다. 일본의 나이든 아주머니들은 이 키트를 사다가 집에서 바느질을 해서 자기 물건을 만든다는 것이다. 선생은 누비도 이렇게 패키지화하면 취미로 퀼트를 하는 인구를 누비 인구로 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비는 처음부터 혼자 다 하긴 힘들어요. 패턴화돼 바느질만 할 수 있는 반제품 상태로는 누구나 할 수 있죠. 그러려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누비에 맞는 디자인을 찾아야
“누비의 말뜻을 풀어보면 온누리를 누빈다는 뜻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정신을 담고 있어요.” 선생은 누비의 원래 정신이 ‘세계화’임을 강조했다. 선생은 처음부터 누비로 한복만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처음 누비를 하게 된 것도 짐승털을 벗겨 만든 코트가 비싼 값에 팔리는 걸 보고, 누비코트를 만들어 팔면 더 비싸게 팔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선생은 옛것을 재현하는 인간문화재이지만 옛 누비옷의 재현뿐 아니라 새로운 디자인에도 꾸준히 도전을 한다. 드레스도 만들어보고, 아이 옷도 만들어봤다. 최근에는 지갑이나 명함꽂이·클러치 등도 만든다. 하지만 소재가 다르면 디자인도 달라져야 하는 법. 누비장인 선생이 현대적 디자인까지 완성하는 건 벅차 보였다. 그렇다고 현대 디자이너가 무작정 달려들기에도 녹록지 않다. 누비로 옷을 만드는 건 일반적인 옷 만들기와 다르다. 일단 소재를 마름질한 뒤 어느 정도 형태가 갖춰진 옷을 판에 고정시키고 누비를 할 칸을 만들고, 누비 바느질을 해서 완성해야 한다. 일반 천을 다루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런 누비의 방식을 아는 누비디자이너가 필요한 이유다.
삯바느질로 생계 잇다 첫 누비장 된 김해자
“100년간 맥 끊겨 … 박물관 유물이 내 스승”
김해자(사진) 선생은 완전히 맥이 끊겼던 손누비를 어느 날 문득 들고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2년 일이다. 삯바느질과 한복집으로 생계를 잇던 그는 누비 간격이 3㎜와 5㎜인 누비 직령포와 액주름포를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했고, 그해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조선 말기 재봉틀이 들어온 이후 서서히 사라진 손누비의 재현은 당시 전승공예계의 숙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상 후 4년 만인 96년에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인간문화재가 된다. 40대의 최연소 인간문화재였고, 최초의 누비장이었다.
100년 가까이 맥이 끊겼던 문화이니 누구에게 배운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박물관 유물이 내 스승”이라고 했다. 박물관에서 본 누비옷을 그냥 재현해낸 것이다. 선생은 “사물을 보면 이치가 들어오고, 그대로 실현이 되더라”며 “바느질에선 막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눈앞에서 짚어가며 가르쳐도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마음을 비우고 사물을 바라보는 눈만 있으면 이치는 들어오고, 사물을 다루는 게 어렵지가 않아요.” 더 나가 선생은 보지 못한 것도 재현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양면누비기법이다. 단을 치지 않고, 걷어올려 안팎을 뒤집어 입을 수 있도록 만들었던 양면누비는 한동안 ‘김해자식 누비’로 불렸다. 그러다 양주의 해평 윤씨 묘역에서 발견된 미라에서 이 같은 양면누비로 지어진 옷이 나왔다. 이것도 전통기법이었던 것이다.
“기능보유자가 된 후 15년 동안 바람부는 대로 떠밀려 살아온 것 같아요.” 선생은 고단한 인간문화재로서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문화재가 되니 기능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몰려와 그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지금은 가르쳐서 내보낸 누비사들이 전국에 많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있어 이제 누비는 누구나 접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생활문화로서의 기반은 잡아놨다는 게 선생의 자랑이었다.
이를 보며 들었던 생각 하나. ‘한국의 누비가 한복·승복·이불을 넘어 세계의 명품 디자인과 만난다면?’ 우리의 명주나 모시 같은 고유의 옷감으로 세계시장에 접근하기는 아직 힘들다. 옷감은 사람마다, 나라마다 선호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옷감을 다루는 방식인 누비의 경우엔 세계화도 가능한 기법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경주에 갔다. 경주엔 인간문화재 누비장 김해자(58) 선생이 있다. 선생은 누비야말로 세계적인 우리의 문화상품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글=양선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제 퀼트박람회 ‘다시 보고 싶은 전시’ 1위
한 땀, 한 땀 홈질로 떠내는 손누비는 박음질누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유로움과 우아함을 느끼게 한다. | |
퀼트처럼 누비를 취미생활로
얇은 명주를 두 겹으로 겹쳐 평누비를 한 뒤 누비의 골마다 다림질로 꺾어 곡선을 살린 오목누비는 호화롭고 섹시하다. | |
솜을 넣지 않고 누비를 한 평누비는 오직 홈질만으로 장식의 효과를 낸 것이다(左). 솜을 두어 오목누비한 배자. 안과 밖을 다른 색깔로 하고 단을 접지 않아 양면으로 입을 수 있는 배자(右). | |
누비에 맞는 디자인을 찾아야
누비로 만든 클러치. | |
삯바느질로 생계 잇다 첫 누비장 된 김해자
“100년간 맥 끊겨 … 박물관 유물이 내 스승”
100년 가까이 맥이 끊겼던 문화이니 누구에게 배운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박물관 유물이 내 스승”이라고 했다. 박물관에서 본 누비옷을 그냥 재현해낸 것이다. 선생은 “사물을 보면 이치가 들어오고, 그대로 실현이 되더라”며 “바느질에선 막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눈앞에서 짚어가며 가르쳐도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마음을 비우고 사물을 바라보는 눈만 있으면 이치는 들어오고, 사물을 다루는 게 어렵지가 않아요.” 더 나가 선생은 보지 못한 것도 재현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양면누비기법이다. 단을 치지 않고, 걷어올려 안팎을 뒤집어 입을 수 있도록 만들었던 양면누비는 한동안 ‘김해자식 누비’로 불렸다. 그러다 양주의 해평 윤씨 묘역에서 발견된 미라에서 이 같은 양면누비로 지어진 옷이 나왔다. 이것도 전통기법이었던 것이다.
“기능보유자가 된 후 15년 동안 바람부는 대로 떠밀려 살아온 것 같아요.” 선생은 고단한 인간문화재로서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문화재가 되니 기능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몰려와 그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지금은 가르쳐서 내보낸 누비사들이 전국에 많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있어 이제 누비는 누구나 접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생활문화로서의 기반은 잡아놨다는 게 선생의 자랑이었다.
다른 나라와 다른 한국의 누비
누비는 두 겹의 천 사이에 솜을 두고 길게 바느질한 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해 만든다. 주로 방한용품으로 쓰였지만, 솜을 두지 않고도 바느질해 누빈 누비도 있다. 바느질은 기본적으로 홈질이다. 하지만 기계누비가 일상화된 뒤엔 재봉틀의 박음질 누비가 보편화됐다. 품위 있고, 아름답기로는 홈질로 만든 손누비가 으뜸이다. 누비는 몽골에서 기원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른 지역의 누비는 주로 안감이나 옷의 일부에 채용되고 누비 바느질의 간격도 넓다. 반면 우리나라 누비는 옷 전체를 누비로 하고, 간격도 3㎜짜리부터 있는 등 촘촘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 누비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누비의 간격에 따라
잔누비 누비 간격이 5㎜ 안팎, 1㎝ 미만이다.
중누비 누비 간격이 2㎝ 안팎이다.
드문누비 누비 간격이 5㎝ 안팎으로 솜을 넉넉하게 넣어 두터운 경우가 많다.
형태에 따라
볼록 누비 일반적으로 솜을 두고 누빈 누비를 총칭한다.
평누비 솜을 넣지 않고 천끼리 겹쳐 누빈 경우를 말한다.
오목누비 솜 없이 누빈 후 누비의 선을 따라 인두와 다림질로 꺾어서 누비의 효과를 낸 것. 공주의 옷 등 호화로운 옷에 사용됐다. 누비 중의 으뜸으로 세계에서 유례없는 한국만의 고유한 누비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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