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자전거로 찾아가는 문화기행]전통 예술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안성’

아기 달맞이 2010. 2. 21. 23:56

2년 전 가을,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관련 독자 초대 이벤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장생처럼 줄타기를 해볼 수 있는 기회라는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자전거와 함께하는 필자 이재언이 이번엔 문화 예술의 보고로 통하는 안성을 다녀왔다. 바우덕이의 자취를 찾아 떠난 어느 주말의 여정은 안성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진중하다. (편집자 주)


안성은 갈 때마다 편안하고 넉넉한 안식과 즐거움을 얻고 돌아오는 곳이다. 생태가 살아 있는 수많은 호수와 하천이 연출하는 절경, 들판이나 구릉에 펼쳐지는 농지나 목장 풍경들도 일품이다. 게다가 안성은 문화 예술의 보고로 통한다. 과거 삼남의 물산이 집산을 이룸과 동시에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린 고장이었기에 문화 예술 면에서도 우호적인 환경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안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무형의 문화재가 즐비하며, 현재까지 전통 예술을 가장 잘 보존하고 대중화에도 성공한 곳이다. 그러한 전통과 풍토 때문인지 예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룡리 사당에 있는 바우덕이 동상
안성맞춤의 신화와 현실
운송 차량을 중앙대 안성캠퍼스 입구에 있는 ‘안성맞춤박물관’에 주차하고,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박물관은 조형성이 중시된 현대적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웅장한 건물은 역사적·문화적 자부심을 웅변하고 있는 듯했다. 예나 지금이나 안성이 자랑하는 최고 브랜드는 역시 ‘안성맞춤’이며, 이는 유기류(놋쇠 제품) 제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통했다. 특히 두들기는 단조 기법으로 만드는 방짜유기는 지금도 전국의 유명 한정식 식당에서 쓰고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고가의 제품이다. 이곳 안성맞춤박물관은 바로 안성유기가 왜 최고 품질의 것인지를 소상히 설명해주고 있다.

오랜 세월 안성을 번영시켜준 안성유기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고 전해진다.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놋쇠를 징발해가면서 자재 부족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6·25전쟁 후부터는 주 연료가 연탄으로 대체되면서 놋쇠의 표면과 미관을 손상시키기 시작했으며, 게다가 서구화되어가는 식탁문화로 말미암아 안성유기의 위상이 많이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란다.

안성맞춤의 대명사 유기는 시대의 흐름에 의해 불가피한 쇠퇴를 겪고 있다. 하지만 안성맞춤의 정신은 우리 경제 의식과 철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안성 장인들의 솜씨와 비법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이 소비자들에게 최상의 만족을 주었듯이, 지난날의 경제 도약과 오늘날 IT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게 된 원동력도 결국은 바로 이러한 안성맞춤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바우덕이의 자취를 찾아
안성맞춤박물관을 뒤로하고 좀 먼 길을 나섰다. 바로 안성의 자랑 바우덕이의 자취를 더듬어보기 위해서다. 23번 도로를 따라 안성천을 건너고 안성경찰서를 지나 70번 도로를 이용해 남쪽으로 내려가다 잠시 농로를 타면 제2산업단지에 당도하게 된다. 거기서 다시 57번 도로를 따라 10km 정도를 내려가면 서운면 청룡리가 나온다. 거의 천안시, 충북 진천시와의 경계 지역이다. 진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청룡호수와 청룡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이 지점이 그 유명한 절세의 예인 바우덕이가 자라고 묻힌 곳이다.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덕(1848~70)으로 출생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청룡사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남사당패에 맡겨져 자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곳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을 익혀 출중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15세 때 남사당의 우두머리 꼭두쇠를 차지했다. 남자들의 무리에 여성이, 그것도 심부름꾼으로 부릴 정도의 어린 처녀를 우두머리로 삼은 전례는 없었던 일이다. 재능도 재능이었지만 탁월한 리더십과 남다른 카리스마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처녀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한양으로부터 운명적인 부름을 받는다. 당시의 실권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자 대중예술을 활용하겠다는 발상을 한 것이다. 꼭두쇠가 특이하게도 여성인 청룡리 남사당은 조선 8도에서 가장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이 소문을 바로 대원군이 접하고서 하나의 아이디어로 착안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영화 ‘왕의 남자’ 스토리와 비슷하게도 남사당은 경복궁 공역장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실제로 공역자들에게 힘을 북돋아 성공적인 공사를 마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해 대원군은 정3품 당상관이 쓰는 옥관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지는데 확실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자기를 업신여긴 정적까지도 요직에 기용한 대원군의 배짱과 호기로 보아 신빙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비천한 신분의 남사당 활동이 비로소 국가 중대사에 영향을 미쳤으며, 대중문화의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는 것이다. 이로써 안성은 남사당의 본산이 되었으며, 전국의 남사당은 청룡리의 남사당에게 머리를 숙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양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는 전설까지 가미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헤로인 바우덕이는 스물세 살의 꽃다운 나이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하고 만다. 각혈을 쏟아내며 폐병으로 요절한 것이다. 이 사실 또한 임금의 붕어 못지않은 부음으로 세상에 널리 전해졌던 것이다. 바우덕이를 사모했던 것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청룡천이 굽어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주었으며, 1990년대에야 청룡골 골짜기에 사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사당에 들어서자 먼저 바우덕이 동상이 보인다. 한 많고 고단한 삶을 살아간 여걸의 모습을 궁금해하던 나 같은 속물에게 어느 정도 상상의 실마리를 주는 조각상이다.

이제 다시 페달을 밟아 57번, 325번 도로를 따라 18km 북쪽으로 올라가야 남사당 전수관에 당도하게 된다. 청룡마을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출발해 3시에 있을 정기공연을 보러 갈 작정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에서 내내 바우덕이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드라마틱한 생애, 불꽃같은 삶, 안타까운 요절…. 시간이 좀 넉넉해 가는 길에 안성1동에 있는 안성맞춤브랜드센터에 잠시 들렀다. 오늘날 안성유기의 전통이 어떻게 현대화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였다. 전통에 대한 설명은 안성맞춤박물관과 유사하지만 그것이 오늘날 어떤 가능성과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데는 미흡해 보였다.


주말이면 축제가 벌어지는 안성
안성을 대표하는 축제가 바로 ‘바우덕이 축제’다. 축제의 계절 가을 못지않은 다채로운 공연이 주말마다 무료로 펼쳐지고 있다. 이번 안성 자전거 여행도 이 공연을 보기 위해 토요일로 잡았다.

보개면에 있는 남사당 전수관에 닿았다. 넓게 잘 가꾸어진 마노아트센터의 잔디 마당에 면한 전수관의 공연장은 공연을 20여 분 앞둔 시간임에도 이미 인산인해를 이뤘다. 낮 공연은 더위 때문에 숲 속 공연장에서만 열리는데 ‘덜미’라는 인형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미인 줄타기는 저녁 공연에만 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보듯이 남사당의 인형극은 풍자와 해학이 넘치며 관객과의 즉흥적인 교감과 호흡이 중시되는 것이 특징이다. 관객들이 갖가지 추임새를 즉흥적으로 외치면서 작품에 몰입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1천여 명에 달하는 관객이 운집해 있는 모습이 놀라웠다. 외국인의 모습도 적지 않게 보인다. 우리말 대사를 잘 알아듣지는 못해도 웃게 되는 대목에서는 다 함께 웃는다. ‘왕의 남자’ 이후 지금까지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 한다. 가족이 함께 와서 즐기기에 좋은 한마당 잔치의 프로그램으로 보인다. 내년이면 그 일대에 전용 전시장이 마련돼 남사당 풍물 공연이 체계적이고도 대규모로 이루어진단다.

공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자전거를 끌고 6km 정도 떨어진 사곡동 소재의 태평무전수관으로 갔다. 강선영 선생의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이곳 역시 무료 관람이었다. 조금 늦게 당도하고 보니 앉을 자리마저 없을 정도로 이곳도 수많은 관람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관객 연령층이 남사당 공연에 비하면 노년에 가까웠지만 학생들도 많은 편이었다. 공연은 남사당에 비해 조금은 엄숙하고 우아하며 화려한 구성과 춤사위가 특징이다. 전자가 놀이 속에서 예술성을 구현한다면, 후자는 예술적 가치에만 매진하는 전문적 장르다. 부채춤을 필두로 현대 창작무 등 다양한 레퍼토리도 볼거리지만 역시 백미는 태평무였다. 우아하고 장엄하기까지 한 자태가 정말이지 매혹적이었다.


에필로그
오후 5시가 조금 넘어 안성맞춤박물관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앞서 그로부터 가까운 미양면의 안성목장으로 가서 드넓은 안성 들판을 보고 싶었다. 마침 목장 근처에는 동물을 의인화해 그리는 서양화가 안윤모(46) 작가가 몇 년 전부터 창작을 위해 정착해 살고 있었다. 동물 이미지를 의인화한 해학적이고도 풍자적인 그림은 작가가 안성의 전원생활을 통해 얻은 결실이다.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갔는데 운 좋게도 작가는 집에 있었다. 그것도 밀짚모자를 쓴 채 마침 집 밖의 텃밭을 돌보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 번째 방문이다.

그에게 안성목장으로 가는 길인데 동행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목장 아래 동네에 사는 안 작가는 자주 찾아가는 산책 코스라며 기꺼이 동행을 허락했다. 안 작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안성목장으로 올라갔다. 비로소 내 모습을 찍어줄 벗이 생겨 굶주렸던 셔터를 무수히 눌러댔다. 완만한 구릉들과 광활한 들판에 펼쳐진 보리밭은 이미 수확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기대했던 청맥 철이 지나, 지금은 가을 농사를 위해 황톳빛 땅을 갈아엎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푸른 들판은 들판대로, 황톳빛 들판은 그것대로 싱그럽고도 생기 넘치는 대지의 기운을 뿜고 있었다. 청맥이 물결처럼 넘실대는 때 바우덕이도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징 소리며 꽹과리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돌고 있구나.


필자 이재언은
1958년생. 강원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명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선갤러리 아트디렉터 및 한국공예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9년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2006년부터 인천-서울, 일산-서울 장거리 ‘자전거 출근’과 함께 자전거 문화와 미술을 접목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다. 역서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글&사진 / 이재언(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