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의 삼베 속에 숨소리가 들리는구나 아주 작게 시작한 이 한 땀의 바느질이 누비의 거센 숨소리로 여인네들의 가슴을 불타게 하는구나 아서라 이 요란한 누비의 회오리가 저 묻혀버린 조상의 유산을 발굴하라는 옛 사람들의 뜻일지언정 나는 새로운 폭풍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하던 여인네의 원시적인 생활이 풍요롭고 아름다웠음은 인간의 성품이 메마르지 않았음에 있다.
불과 몇십 년전만 해도 전기라는 신문명이 풍족하지 않았을 시절 시골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가 호롱불 아래 바느질을 하던 모습이 아련히 기억되는 시간이다.
그 할머니의 손내음이 깃던 바늘을 첨단문명 속에서도 아직까지 고집하고, 한국 전통 복식문화를 이어가는 아름다운 이가 경주 북남산 자락 식혜골에서 오늘도 바느질에 여념이 없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 김해자(55) 누비장.
김 누비장은 “우리 인류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과 가장 밀접한 것이 의복 문화인데, 인간의 의식 속에 본능적으로 육체를 가리려고 하는 지성이 있고 또 추위에 체온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옷을 만들어 몸을 보호해야만 하는 조건을 통해 인간의 복식문화가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지역별로 더 나아가 국가별로 독특한 복식문화가 있어 나름대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고 이것은 상업화로 이어져 번창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유행의 도시, 패션의 도시 파리’라는 구호처럼 프랑스라는 국가 이름보다 파리라는 도시 이름이 전 세계적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강하게 부정하고, 경주를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조성해야 하고 특히 국제적인 패션도시로 성장할 가능성도 제기했다.
“경주 남산 유적을 비롯 석굴암에 깃든 정신세계 등 가장 순수한 디자인을 창출시킬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이 경주에 산재해 있고, 여기에다 우리민족의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가치관을 접목시키면 누비는 세계적인 패션 상품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녀는 지난 2002년 일본동경 퀼트페스티벌에 초대받아 30점을 출품했는데, 참가한 퀼트인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는 것.
이에 그녀는 “퀼트인들이 퀼트는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있는데, 누비는 색상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주고 한국을 대표하는 옷으로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김천 외곽지역인 금릉이 고향인 그녀는 오직 바느질을 배우기 위해 17살때 서울로 갔다.
시골에서 대처로 바느질과 한복을 배우러 온 시골 처녀는 한복학원에서 복식 수업을 받고 20대 후반에 누비를 배우기위해 수소문을 하던 중 경남 창녕에 거주하던 스승인 황신경(현재 문경 거주)이라는 여승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누비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황씨는 수덕사로 출가해 선방에서 스님들의 의복인 누비옷을 만들었고 여기서 익힌 솜씨 중 선을 치는 방법, 밀대를 튕기는 방법 등 고단위 테크닉을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수해 주었다.
중요한 것은 황씨의 스승이었던 구한말 고종 때 왕실 침방 나인 선복 스님이 대한제국 몰락으로 왕실이 폐쇄되자 속가에 나와 수덕사로 출가하면서 누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는 것.
특히 수덕사는 비구니 도량처로 조선시대 때 사대부 집안의 여인네들이 여기에 출가해 수행생활을 하면서 사찰 의복인 누비를 손수만들어 입었고, 이는 사대부 가풍에서 배운 솜씨가 승방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는 중요한 증언도 했다. 이것은 한국 누비 계보의 효시가 된 셈이다.
그녀는 침선장 87호인 정정완 선생으로부터 전승공예대전에 누비 출품을 권유 받아 지난 92년 10월 제17회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작품명 직령포), 국무총리상 수상하고 96년 국가로부터 누비장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오랫동안 꾸어왔던 작은 꿈을 실현하게 됐다. 그는 지난 96년 전통고유 기술개발사업 평가위원(통상부)을 거쳐 창원대와 부산대에서 외래 강사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누비를 학문화시키면서 후학들을 키우게 된다.
지난 99년 서울로 다시 진출한 그는 성균관대 전통복식과정 궁중복식 연구원 지도교수 겸 궁중복식 연구원장을 겸하게 되고, 2000년 한국 전통공예 건축학교 외래강사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이사장에 취임하게 되고 대구대학교 산업정보대학원 한복디자인 연구과정을 창설하게 된다.
지난 2000년 그녀는 정들었던 창녕을 떠나 이곳 식혜골에다 300평의 작업장을 마련하고 신라인이 된다. 그녀는 “경주는 찬란한 신라문화의 발상지일 뿐아니라 불교의 정신문화사상이 뿌리내린 곳이어서 이는 누비와 딱 맞아 떨어진다”고 잘라 말한다.
“누비를 위한 바느질은 인내와 수행·도덕성이 요구되는 철저한 인성 작업인데 이는 정신사상의 무장없이는 불가능하고, 제자들이 배움에 있어 중도 포기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고 말해 작업과 배움이 힘든 것을 입증시키고 있다.
특히 누비를 제외한 기타 의류사업의 경우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이 가능하지만 누비는 전적으로 수작업(Hand made)에 의존해 그 값어치나 상품성은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제자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있다.
국내 제자는 물론 이웃 일본·중국 등지에서 고작 6개월간 배운 솜씨로 누비를 상품화시켜 판매하는데 대해 못내 씁쓸해 한다. 또 베트남이나 중국 등지에서 수입되는 누비가 서울 인사동 골목에서 ‘김해자’ 브랜드를 붙여 판매돼 이는 ‘한국의 명품’을 훼손하는 행위이여서 관계당국에서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주문을 잊지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국의 규방문화는 전 세계인들도 인정하고 있어 그래서 누비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전문학교 건립과 경주의 관광상품으로 육성시켜야 하지 않을까요”하는 바람도 보탰다.
경주/윤종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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