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연분홍 추억 만드는 ‘꽃들의 수다’

아기 달맞이 2009. 4. 1. 10:40

경주 안압지

“벚꽃이 눈송이처럼 하늘을 뒤덮는 4월이 되면 우리 딸이 오겠지. 얼른 벚꽃이 피기를 엄마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단다.”

360일간 지구 곳곳을 떠돌다가 마지막에 도착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그곳에서 받은 e메일에는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 때문일까. 긴 여행에서 돌아온 뒤 벚꽃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그리움이 왈칵 솟아오른다.

내게 벚꽃의 기억이 그리움인 것처럼, 누구나 벚꽃에 대한 자기만의 추억을 한 가지쯤은 품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팔짱을 끼고 여의도 윤중로를 걷던 기억,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진해로 벚꽃놀이를 갔던 추억, 흩날리는 벚꽃 아래 솜사탕을 먹으며 부모님과 함께 봄 소풍을 갔던 유년시절. 벚꽃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힘들고 벅찬 일상도 아련해지는 것은 하늘을 뒤덮는 꽃구름이 됐다가 함박눈처럼 한꺼번에 떨어지는 벚꽃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벚꽃에 싸인 천년고도, 경주

진해에 가려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던 경주 벚꽃. 누군가 올해 어디로 꽃놀이를 떠날 테냐고 내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경주에 가겠다고 답할 것이다. 경주 보문호를 수놓는 연분홍빛 벚꽃과 밤에 만나는 장군로의 황홀한 벚꽃 터널은 어느 곳의 벚꽃보다도 황홀함을 안겨준다. 덧없는 인생처럼 한순간에 스러지는 벚꽃과 천년의 세월을 흘러온 고도(古都) 경주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경주에서 벚꽃을 보기 위해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보문호. 수령 30년 이상의 벚나무 3만여 그루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보문호 주변에는 10km 길이의 벚꽃 산책로가 있는데,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꽃길 아래를 달려보는 것도 잊지 못할 봄을 만드는 방법이다.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쉽게 자전거를 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 도로도 잘 이어져 안전하다.

다음에는 불국사에 가볼 차례. 빼곡히 늘어선 왕벚꽃 그늘을 따라가면 불국사가 나온다. 불국사를 감싼 왕벚꽃은 우리나라 종으로, 보통 벚꽃보다 잎이 큰 편. 경주에 왔다면 남산도 빠뜨려선 안 된다. 문화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경주 남산이 봄이 되면 화려한 꽃대궐로 변신한다. 숲 속 구석구석에 핀 진달래와 함께 숲을 덮고 있는 벚꽃도 상춘객의 마음을 한없이 들뜨게 한다. 특히 불상과 마애석불을 볼 수 있는 삼릉골 주변의 벚꽃 터널은 남산에 갔다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