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색
우리나라는 일제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진화적으로 발전되어오던 전통 문화의 단절이 있었다. 단절된 전통 문화는 현대화와 더불어 더욱더 찾아보기 힘든 자리로 모습을 감추었다. 색체에 있어서도 전통색의 현대적 계승과 적용은 쉽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으며, 디자이너에게는 이러한 문제가 신중하게 접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음양 오행 사상에 근거한 색채 문화를 지녀왔다. 우리나라의 전통 색채는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요소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 오행 사상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의 표현 수단으로서 이용되어 왔다. 따라서한국의 전통 색채를 음양 오행 사상의 기본색인 오방색과 일상 생활의 색으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1. 오방색
색채가 음양 오행으로 의미화될 수 있었던 철학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졌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우주 만물은 음양과 오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요소들이 서로 균형있는 통합을 이루어야 질서를 유지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이중 오행이란 목, 화, 토, 금, 수를 의미하는데 하늘에는 오운이 있고, 땅에는 오재, 사람에게는 오성이 있어서 모두 오사가 따르고 이러한 오행의 요소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입시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양 오행 사상의 색채 체계는 동서남북 및 중앙의 오방으로 이루어지며, 이 오방에는 각 방위에 해당하는 다섯가지 정색이 있고, 각 정색 사이에는 다섯가지 간색이 있다.
정색의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이며, 이중 청, 적, 황색은 양의 색이고 흑과 백은 음의 색이다.간색으로는 동방의 청색과 중앙의 황색 사이에 녹색이 있고, 동방의 청색과 서방의 백색 사이에는 벽색, 남방의 적색과 서방의 백색 사이에는 홍색, 북방의 흑색과 중앙의 황색 사이에는 유황색, 북방의 흑색과 남방의 적색 사이에는 자색의 다섯가지가 있으며 모든 간색은 음의 색이다. 이와 같은 정색과 간색의 10가지 기본색을 음양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화평을 얻는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불교의 사찰과 궁궐에서 사용하던 단청은 이러한 오방색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예인데, 이 다섯가지 오방색을 방위와 위치에 따라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되었다. 천장은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천계의 신격이 나타나도록 하고, 천장을 떠받치는 부재는 5색 구름과 무지개가 그려지고, 기둥에는 구름처럼 너울이 드리워지고, 기둥 아래에는 현세의 존엄성을 푸른 색과 붉은 색의 단조로움으로 나타냈다. 街피 단청의 무늬마다 그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박쥐문은 복과 자손 번창의 의미를 나타내고, 연화문은 불교에서 대자 대비와 극락 정토를 상징하는 것이다.
색동 저고리도 오방색을 사용한 예로서 건강과 화평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이유로 서민들도 아기의 돌과 명절 및 혼례 때에는 색동옷을 입었다. 색동에 사용된 주된 색은 적, 청, 황, 백의 네가지 정색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간색이 첨삭되어 사용되었다. 색동은 또한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무당의 옷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오방색의 상징적 의미로 무당의 주술적 능력을 가시화하는데 사용된 것이 그 예이다.
2. 일상 생활의 전통 색채
한국의 전통 색채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는 음양 오행 사상을 기초로 한 유교의 영향이 컸다. 恪떼 시대에 정신 세계와 생활 양식을 지배했던 유교는 인간적인 감정을 멀리하고 인격과 형식, 규범 등을 중요시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주술적이거나 상징적인 의미 이외에 색을 사용하는 것은 천하고 품위없는 것으로 여겼다. 街피 계급에 따라 의복의 색에 대한 금기 사항이 많아서 서민들은 백색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주택과 실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색채는 자연적인 재료의 색 그대로였다. 전통주택의 외관에서 볼 수 있는 색은 검정색 기와나 마른 볏짚의 누런 초가 지붕, 마른 진흙의 흐린 황토색 벽체나, 흰 벽, 석간주로 칠한 붉은 나무 기둥이나 검게 퇴색한 목재의 대문 등이다. 모두 중성화된 색으로 자연과 쉽게 조화를 이루는 색이다. 전통주택의 내부에 사용된 색채도 문틀이나 마루를 이루는 자연의 나무색과 흰 벽, 창호지의 흰색, 온돌 바닥을 덮은 장판지의 연한 노란색 등 거의 색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중성화된 자연적인 색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일상 생활에서의 전통 색채는 소박하고 차분한 중성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상 생활에서 색의 사용이 지나치게 금지된 데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는 풍자적 기법의 민화, 보자기, 자수, 매듭 등이다. 이러한 장식물이나 생활용품에서 사용된 원색적인 색채는 중성색으로 둘러싸인 일상의 무미 건조한 환경에서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중 민화는 조선 시대 양반들의 고상한 취미를 표현하던 수묵화와는 달리 서민들의 소박한 미감에 기초한 민예적인 그림이다. 민화는 특히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는데, 당시의 정통 회화의 조류를 모방하기는 하였으나 주로 무명 화가나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받지 못한 떠돌이 화가들이 그린 것이어서 미술적 수준이 그다지 높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민들의 생활 양식이나 관습, 이념들을 바탕에 두고 발전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민족이 지닌 미의식이나 정감 등이 솔직하게 표현된 미적 대상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민화는 서민들의 생활 공간에 활기를 불러넣기 위해 주로 병풍, 족자 등으로 만들어 장식하였으며, 장지문이나 벽장문 등에 직접 붙여 장식하기도 하였다. 민화는 그 내용이 다양하나 소박한 형태와 대담한 구성, 그리고 강렬한 색채 등이 공통된 특징을 이룬다. 민화는 장식의 장소와 용도에 따라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내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민화 가운데 가장 많은 것으로는 꽃과 새를 소재로 한 화조도가 있으며 이는 주로 신방이나 안방에 병풍으로 꾸며 장식되었다. 이중 특히 모란꽃을 그린 것은 부귀를 상징하며 혼례식의 병풍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붕어, 메기, 잉어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은 어해도라 하는데, 특히 잉어와 아침해를 함께 그린 것은 출세의 기원이나 축하용으로 사용되었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와 그 밑에 앉아있는 호랑이를 함께 그린 것을 작호도라 부르는데, 이는 잡귀를 물리치는 사신도의 변형이라고 보여진다.
불로 장생을 기원하는 내용의 10장생도는 장수의 상징으로 거북, 소나무, 해, 달, 사슴, 학, 돌, 물, 구름, 불로초 등을 그린 것으로 회갑 잔치를 장식하는데 사용되었다. 刊이 외에도 사랑방을 장식하기 위한 산수도와 풍속도가 있으며, 역사나 소설을 표현한 고사도도 있다. 刊또한 산신이나 용신을 비롯한 여러 신을 무속화한 무속도가 있는데, 이런 그림은 무당집이나 점쟁이집을 치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불화를 무속도와 같이 그린 것은 절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여러가지 의미가 담긴 문자의 자획 속에 그림을 그려넣는 문자도에는 주로 수, 복, 효, 제, 충, 신, 예, 의, 자 등 교화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주로 어린이의 방을 장식하였다. 문자도는 각 글자마다 뜻을 지니는데 효는 부모를 공경할 것을, 의는 언제나 진리와 정의의 편에 설 것을, 제는 형제와 이웃이 화목할 것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림의 의자를 보면 문자의 획마다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으며 모란꽃 사이 사이에 말, 신선, 산, 구름, 집 등이 그려져 있다. 이 문자도는 채도를 낮춘 연한 노란색 바탕에 검정색 글자를 사용하여 명도의 차이를 매우 크게 하였는데 이는 글자의 뜻을 매우 힘있게 전달해 주는 효과를 가진다.
책거리 라고도 불리는 책가도는 사랑방을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채, 붓, 벼루, 먹 등 문방 사우와 다양한 일상 용품이 특이한 조화를 이룬 그림이다. 책거리는 보통 배경을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며, 사물은 매우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독특한 원근법이 사용되었는데 마치 이쪽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저쪽에서부터 보고 있는 듯하다. 책거리는 책상의 뒤편에 배경이 되도록 붙여졌으며 학문을 숭배하였던 조상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보자기는 물건을 덮거나 싸서 보호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수를 놓거나 이어 붙여서 장식을 하였다. 보자기는 주거 공간이 협소하여 발달하게 된 가재 도구이며, 의례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능 외에도 보자기를 만드는 일은 여성에게 창조의 기쁨을 주는 여가 활동이었다. 즉 보자기 제작은 노동의 일부였으며 오락과 예술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보자기에 있어서도 색상 사용에 규제가 있었다는 것이 조선조 기록에 남아 있다.
보자기는 제작 방법에 따라 홑보, 겹보, 솜보, 누비보 등으로 나누어지며, 재료에 따라 사보, 명주보, 모시보, 무명보, 베보 등으로 구분된다. 또한 사용하는 계층에 따라서는 궁보와 민보로 나누어진다. 궁보 주로 귀중한 물건 등을 싸두거나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장식의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궁보는 용도별, 규모별로 다량으로 제작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쓴 것으로 보인다.가운데 당채 문양이 많이 사용되었고 홍색 계열의 색상이 주로 사용되었다. 민보에는 조각보와 수보가 대표적인 예이다.
조각보는 폐품 활용의 지혜를 발휘한 우리 조상들의 절약 정신이 담긴 소품으로 서민층에서 주로 통용되었고 궁보에는 사용되지 않은 제작 방법이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조각보들 중에는 사용된 흔적이 없는 것들이 많다. 이는 조각보가 반드시 사용될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천을 조각 조각 이어가면서 정성을 모아 무언가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제작된 것이며, 장 안에 귀중히 넣어두었다가 시집가는 딸에게나 친척들과 나누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모시나 얇은 사(紗), 라(羅) 등의 직물을 사용한 조각보는 주로 여름철에 사용되었으며, 명주 등의 직물을 사용한 조각보는 주로 겨울철에 사용되었다. 조각보의 색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모시와 사를 이용한 조각보는 파스텔 톤의 색상을 지니며 은은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 명주를 이용한 조각보는 오방색을 사용하였으며 그 중 양(陽) 색에 해당하는 청, 홍, 황의 색상을 주로 사용하였다.
수보에는 나무, 꽃, 새 등 자연물을 수놓았는데 구체적인 묘사 대신에 단순화된 문양으로 표현하였다. 수보에 나타난 이러한 문양은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주로 오방색을 사용하였다. 오방색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바탕이 되는 소재가 자연적인 중성색을 지녀 원색들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보이지 않고 안정감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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