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방

차(茶) 이야기② 수천 년 이어온 깨달음의 향기

아기 달맞이 2013. 9. 2. 07:45

                               

   

 

 

(서울=연합뉴스)

 

경남 김해는 최초로 차가 전래됐다고 추정되는 지역이다. 고려 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가락국(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차를 가져왔다. 김해시에서 한국 최초의 차로 홍보하고 있는 장군차(將軍茶)가 바로 허황옥이 가져온 차의 현재 이름이다.

화개는 차의 시배지로 알려져 있다. 고려 중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와 지리산에 심었다. 차 문화가 쇠퇴한 조선시대에도 화개 쌍계사 일대는 사오십 리에 걸쳐 야생 차나무가 산재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역사에서 차는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불교 중심 국가인 통일신라와 고려 때 차는 필수 공양물이었다. 정신을 맑게 하고 잠을 깨우는 효과가 있어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자세로 정진하는 선승들에게 유용했다. 특히 차의 카페인은 커피와 달리 몸에 축적되지 않고 다른 노폐물과 함께 바로 배설돼 건강에도 이로웠다.

차 문화는 숭유억불 정책을 편 조선이 개국하면서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태종, 세종 때 11개 불교 종단이 교종과 선종으로 통폐합되고 전국 각지의 사찰 수백 개가 사라지면서 차 문화의 기반이 붕괴됐다.

음료로서의 수요가 사라지자 차 재배도 맥이 끊겼다. 18세기 중반 부안현감 이운해는 부풍향차보(扶風香茶譜)에 "선운사에서 좋은 차가 생산되는데, 무지한 백성들이 차나무를 잡목으로 여겨 땔감으로 써 안타깝다"고 적었다. 18세기 후반 이덕리의 차 문화 관련 저작인 동다기(東茶記)에도 "조선에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희귀하다"고 기록돼 있다. 좌선하는 승려들조차 다 쇠한 찻잎을 따 시래깃국처럼 끓여 먹었다고 전해진다.

초의선사, 해동 다맥의 부활

차 끓이는 법조차 잊어 버렸을 정도로 끊겼던 다맥(茶脈)은 19세기에 되살아났다. 그 중심에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승려 초의(草衣, 1786~1866)가 자리한다.

초의는 15세에 출가해 19세 때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불교 선지식과 유학은 물론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다. 24세 때 다산 정약용을 찾아가 차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초의와 만날 당시 다산은 지천명을 바라보는, 완숙한 경지에 이른 다인(茶人)으로 명성이 높았다. 전남 강진에 유배된 이후 차를 약 삼아 마시곤 했는데, 어느 날 만덕산 백련사에 갔다가 가람 주변에 야생 차나무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고 한다.

다산은 구증구포(九蒸九曝) 방식으로 만든 떡차(餠茶)를 즐겼다. 구증구포는 찻잎을 여러 번 찌고 말린 후 절구에 넣고 곱게 빻아 분말로 만들어 물에 반죽해 떡의 형태로 빚은 것을 말한다. 다산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그 제다법이 전해진다.

초의는 39세 때 대흥사 뒷산 중턱에 일지암을 짓고 참선 수행에 매진하면서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했다. 다신전은 우리 기후와 풍토에 맞춰 찻잎 따기에서 시작해 차를 만들고 끓이고 보관하는 법까지 22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동다송은 우리 차의 역사와 효용, 우리 차 문화의 멋과 기품, 차나무 재배지와 품질 등을 읊은 시문이다.

초의는 당대의 석학 추사 김정희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동갑인 두 사람은 30세 때 한양에서 처음 만나 일평생 사귐을 이어갔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자 초의가 위로차 직접 찾아갈 정도였다. 추사는 초의가 건네준 차에 매료돼 죽는 날까지 그 풍미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초의에게 보낸 한 서신에선 '햇차를 빨리 보내지 않으니 몽둥이로 징계해야겠다'며 간절한 바람을 표했다.

추사의 대표 서예 작품으로 꼽히는 '茗禪(명선)'도 초의와 연관돼 있다. 추사는 초의가 직접 차를 만들어 보내오자 그에 보답하는 뜻으로 중국 후한 말기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탁본을 모범으로 삼아 '명선'이라는 호(號)를 지어 보냈다. 차에 대한 감동의 반영인지 '명선'은 현존하는 추사 글씨 중 가장 크다.

초의는 81세에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입적할 때까지 일지암에서 오직 차와 벗하며 다선일여(茶禪一如)를 심화했다. 차 마시는 행위를 참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월에 해남 대흥사를 찾아가면 절내 차밭에서 찻잎 따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또 대흥사 성보박물관 2층 초의관에선 선사가 차를 마실 때 즐겨 썼다고 전해지는 분청다완을 비롯해 선사가 직접 그린 탱화와 상량문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전국 각지의 차인들이 선사를 기려 1979~1980년 복원한 일지암 초당과 자우홍련사(자우산방)는 대흥사에서 30분가량 산길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사진/김주형 기자(kjhpress@yna.co.kr)ㆍ글/장성배 기자(up@yna.co.kr">up@yna.co.kr)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