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7화

아기 달맞이 2012. 10. 5. 22:11

그러고는 뒤채로 향하는데 연희패들이 악기며 보따리 등속을 지고 몰려들어왔다. 광대 연희패는 대처의 대보름, 한식, 단오, 추석 등의 사대 명절 놀이와 바닷가의 파시, 내륙 교통 요지의 향시, 각 감영의 대목장 등을 돌아다녔는데, 각 지역에 터를 잡고 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공연하는 풍물패, 탈놀이패 등이 있는가 하면 사당패나 잡색 놀이패들처럼 전국으로 떠돌아다니는 전문적인 광대들이 있었다. 대개는 지방의 아전층들이 서로 연락하여 놀이패를 부르거나 장터의 상인들과 엮어주기도 했지만, 이들과 상단을 직접 연결하는 광대물주는 수십 년씩 각 지방을 유랑하며 연희를 해온 광대들 중에 수완 있는 자로서, 재간 있는 연희자를 조직하여 흥행지를 물색하고 상인들과 공연 일자며 비용 등을 약계했다. 박돌은 소리광대로서 몇 해 사이에 광대물주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파시의 개시와 더불어 닷새 동안 저녁마다 공연을 해주고 떠날 모양이었다. 보통 점심참에는 오후 무렵까지 한가한 때였고 악사와 놀이패들도 간단한 가락 장단이나 재담을 주고받으며 연습을 하는 시간이었다. 점심참에 나는 박돌에게 낮것 상을 대접하면서 이신통의 소식을 물었다.









 

신통이 녀석 언젠가부터 우리네와 좀처럼 안 어울린다네.

하는 것이 그의 첫마디였다. 박돌은 이신통을 십 년 전에 처음 만났다고 그랬다. 천안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울고 웃고 성나고 기쁘게 하기를 하늘이 여름날의 바람과 구름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옛말에 이야기 주머니(說囊)라고 하더니 바로 신통이 그러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가장 간절한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그치니 사람들은 뒷얘기가 너무 궁금하여 다투어 돈을 그의 발 아래 내던졌다. 이야기를 마친 뒤에 신통은 주막에 가서 다리쉬임을 하고 있었는데 박돌이 따라가서 막걸리 잔이나 사면서 동무가 되었다. 신통은 다시 때와 장소를 구분하여 이를테면 장터 어구의 버드나무 아래라든가 다리 앞이라든가에서 다른 이야기로 판을 벌였다. 새 손님이 많았지만 앞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지나가다 다시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박돌은 소리꾼으로 스스로 북을 치며 잡가와 판소리 대목을 부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봉놋방에도 함께 들었고 이번에는 주막의 마당에서 이신통이 언문 소설을 읽었다. 그는 보퉁이에 몇 권의 방각본 언문 소설책을 넣어 가지고 다녔는데, 인기가 있던 것은 < 임경업전 > < 숙향전 > < 박씨전 > < 전우치전 >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는 약간 쉰 듯한 탁한 목소리로 첫 대목부터 읽기 시작했다.

조선국 충청도 충주 달천촌에 한 사람의 영웅이 있으되, 성은 임이요 이름은 경업이요 자는 영백이라. 나이 여섯 살에 모든 아이를 희롱할새, 돌을 모아 영채를 세우며 풀을 뜯어 기를 만들어, 싸움하는 형상을 하고 몸소 원수가 되어 여러 아이들을 호령하매, 모든 아이들이 그 약속을 어기지 못하니, 보는 자 신기히 여기지 않는 이 없더라.

모여든 사람들은 마루에 하나 가득, 윗방 아랫방은 툇마루에 늘어앉고, 마당에도 둥글게 원을 그려 둘러섰고, 담장 밖에도 이웃 주막의 사람들까지 목을 길게 빼고 그의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에 이신통이 요전법(邀錢法)으로 일단 읽기를 그치고 기다리면, 박돌이 나서서 북을 두드리며 단가 한 수를 부르고는 바구니 들고 한 바퀴 돌면 엽전이 수북이 모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헤어졌다가도 다시 대처 도방에서 만나기를 거듭했고 나중에는 신통이가 광대물주를 하게 되었다. 그들이 전주에서 엄마의 색주가에 들렀을 때에 이신통은 광대물주를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그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내가 글쎄 그 일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박돌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지도라구 들어봤나? 신통이가 그 패거리에 들게 되었거든.

천지도가 뭐예요? 무슨 일을 하는 패거리요?

저 머신가, 나라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하는 미신인데 그것이……

그러면 예전 천주학 같은 거 말예요?

이전에는 모두 죽였지만 시방 천주학은 양귀들 때문에 묵인이 된 셈이고, 천지도는 처음 시작했다는 교주를 국법으로 처단을 했다 그 말여.

'연재소설·[황석영 연재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울물소리 19화  (0) 2012.10.05
여울물소리 18화  (0) 2012.10.05
여울물소리 16화  (0) 2012.10.05
여울물소리 15화  (0) 2012.08.22
여울물소리 14화  (0) 2012.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