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
표고차 15cm.
몸이 그걸 느낀다.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등은 짓무르지 않았을까 싶게 뜨거운데 콧날엔 시큰한 찬 공기가 돈다. 겨우 한 뼘의 표고차가 만들어내는 열기와 냉기의 교합. 불 넣은 구들과 콩댐한 장판, 숨쉬는 창호지문의 한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동지섣달 긴긴 밤의 매력이다. 외풍이 매서울수록 아랫목의 온기는 감칠맛 난다. 머리보다 살갗이 기억하는 그리운 온기다. 지리산 자락이 서남으로 평평해지는 구례 땅, 거기 이백년 묵은 아궁이에 지난 주말 소나무 장작불을 지폈다.
↑ 서울 가회동에 있는 전통한옥 락고재 내부. 한국일보 자료사진
↑ 삭정이를 그러모아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 한옥 구들의 온기는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를 쥔 누군가의 수고 덕분이다.
↑ 고무신 놓인 댓돌 뒤로 도끼질한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땔나무를 든든히 재어 놓는 것이 겨울 채비의 큰 부분이었다.
"이불은 너무 두껍지 않은 게 좋아요. 구들에서 밤새 열기가 올라오니까요."
고택 쌍산재(雙山齋)의 주인 오경영(48)씨가 깔아놓은 이불은 봄가을에 덮는 두께다. 이걸로 될까 하는 걱정이 든다. 일기예보의 이튿날 새벽 기온은 섭씨 영하 10도. 오래돼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틈으로 얼음 같은 밤공기가 스민다. 이웃집 노부부의 수군거림, 멀리 딴 마을의 개 짖는 소리도 함께 스며든다. 하지만 데워진 구들의 검질긴 불기운이 추위에 대한 걱정을 잊게 해준다. 불면의 골칫거리도 녹여버린다. 농가의 밤은 일찍 깊어진다. 꿈도 없는 잠이 찾아온다.
불편하고 오래된 것은 뭐든 갖다 버리기 바빴던 세태에서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흔하디 흔하던 부뚜막 아궁이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산간마을에 가도 '현역' 아궁이는 동네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 단열 효과와 열효율을 기준으로 삼으면 나무를 때는 구들은 원시적인 난방 방식. 그래서 일찌감치 보일러에 밀려났다. 그러나 외부 공기의 틈입을 허용치 않는 시스템 창호로 무장하고 나서부터, 아랫목에 누빈 이불을 나눠 덮고 앉아 얘기 나누던 정겨움도 사라지고 말았다.
"겨울에도 민소매 옷을 입고 지내는 도시 사람들에게 한옥은 추운 집입니다. 그래서 새벽 아궁이에 불을 넣어주는 식구의 고마움을 알 수 있는 집이죠."
고조할아버지부터 대대로 살아온 집(쌍산재)을 한옥 체험 공간으로 내놓은 오씨의 설명이다. 몸과 마음이 따듯해지는 겨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옛 구들장의 온기를 찾아가는 건 어떨까. 나무를 베어내 태우는 것과 화석연료를 캐서 태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환경에 해로울지 따지는 건 잠깐 접어두기로 하자. 그저 설한풍이 너무 매섭고, 새카맣게 탄 구들 장판의 뜨끈함이 간절하고, 타닥타닥 튀는 아궁이불에 구워먹던 고구마 맛이 사무치게 그리우니까.
함평 모평마을 흙으로 다져 쌓은 돌담과 흰 눈을 이고 있는 댓잎, 살얼음 덮인 샘물이 수백년째 한결같은 겨울 풍경을 지키고 있는 마을이다. 바닷물에 7년 동안 담근 뒤 꺼내서 15년 말린 소나무로 지었다고 전해지는 모평헌(牟平軒)을 비롯해 여러 채의 한옥에서 구들장의 온기를 느껴볼 수 있다. 오래된 마을인 만큼 유서 깊은 집들이 많다. 귀령재(歸潁齋)라는 편액을 건 파평윤씨 종가, 조선 천석꾼 선비 윤상용이 세운 영양재(潁陽齋) 등이 자리잡고 있다. 황토와 돌로 이뤄진 골목길, 물레방앗간, 야생차밭 등도 조성돼 있어 산책하기 좋다. ●서해안고속도로 영광IC에서 광주 방향 22번 국도를 타고 가다 838번 지방도로 길을 바꿔 4㎞ 정도 가면 닿는다. 홈페이지(www.mopyeong.com) (061)323-8288. 고성 왕곡마을 설악산의 봉우리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동해의 파도를 품고 있는 마을이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발해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함부열이 은거한 데서 마을이 유래됐다고 한다. 600년이 흘렀지만 세상사와 떨어진 외지고 호젓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한국전쟁 때도 폭격을 피해 예스러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았다. 초가도 수십 채 보존돼 있다. 마을 위쪽은 강릉 함씨, 아래쪽은 강릉 최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이웃이 모두 아제고 사촌이다. 북방형 'ㄱ'자 전통가옥에 머물며 두부 만들기, 왕곡주 만들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속초 방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송지호 지나 간성읍 방향으로 가다 공현진교 건너기 전에 좌회전하면 된다. 온라인 예약(www.wanggok.kr)이 가능하다. (033)631-2120. 거창 황산마을 덕유산에서 발원한 계곡이 흐르는 수승대국민관광단지 가까이 있는 한옥 마을로 거창 신씨의 집성촌이다. 높은 벼슬과 너른 땅을 지녔던 이들의 기와집이 모여 있어 반가의 전통 살림살이를 짐작해볼 수 있는 곳이다. 커다란 자연석과 황토로 된 돌담길이 마을을 두르고 있다. 대관댁으로 불리는 전을주가옥을 비롯해 민박을 할 수 있는 한옥이 여러 채 있다. 마을 동쪽의 호음천을 건너 있는 동촌은 벽화로 유명하다. ●수도권 쪽에서는 통영대전고속도로 무주IC, 남쪽 지역은 88고속도로 거창IC가 가깝다. 부근에 수승대, 정온선생 고택 등 문화유적이 많다. 거창군청 문화관광과 (055)940-3420. 보성 강골마을 행정지명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인데 주민들은 득량마을, 또는 강골마을이라 부른다. 오래된 한옥 30여채가 오봉산을 등지고 오종종 모여 있다. 가장 오래된 집은 1900년을 전후해 지었고, 나머지도 지난 세기 초의 집들이다. 이 마을은 '한옥에서의 불편한 하룻밤'을 선사한다. 화장실 등을 개수한 다른 한옥마을과 달리 여기서는 재래식 화장실과 우물 등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 불편하더라도 옛사람들이 살던 대로 한옥살이를 체험해보고 싶다면 이 마을이 제격이다. 가까운 득량만에서는 지금 바지락, 쏙 등이 제철을 맞았다. ●호남고속도로 주암이나 승주IC가 비교적 가깝지만 광주나 목포, 순천 쪽에서 2번 국도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 게 낫다. 20인 이상이 신청하면 갯벌체험을 할 수 있다. (061)853-2885. 청송 송소고택 최근 여러 매체에 거듭해 소개되면서 누구나 하룻밤 묵어보고 싶어하는 집이 됐다. 7동 99칸. 솟을대문을 인 행랑채, 멋들어진 팔작지붕의 사랑채 등 당우는 물론 꽃담, 문고리, 아궁이 하나하나에서도 조선시대 만석꾼의 풍요와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집이다. 영조 시절 갑부 심처대의 7대손에 의해 1880년경 건립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아랫목에 누워 만석꾼의 허허로움을 누려볼 수 있다. 칠교와 투호 등 민속놀이도 준비돼 있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안동을 거치거나 의성IC에서 의성과 청송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주왕산, 주산지 등이 지척에 있고 하회마을과 봉정사 등 안동의 관광지도 멀지 않다. 홈페이지(www.송소고택.kr) (054)874-6556. |
'한국의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창호와 빛 (0) | 2012.01.13 |
---|---|
태극기의 역사 (0) | 2012.01.06 |
비의 종류 (0) | 2011.12.27 |
바람의 종류 (0) | 2011.12.27 |
한국의 굴뚝은 표정이 있다 (0) | 2011.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