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다섯손가락'은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연인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노래했다. 왜 그랬을까. 비 오는 날만큼 붉은 장미가 돋보이는 날도 없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젖어들어 더욱 생생한 빛깔을 뽐내는 날이다. 장미도 이런 날엔 더욱 붉고 소담스럽게 보인다. 비 오는 날 꽃을 받아들면 설렘은 아마 두 배가 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촉촉하고 싱그럽게 보이는 날. 이 순간을 두고 나 혼자 은밀하게 붙인 별명이 있다. 바로 '질감의 시간'이다. 흔히들 비 오는 날은 사진 찍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비가 막 그치려고 할 때, 또 방금 비가 그치고 햇살이 다시 은은하게 비추는 순간이 사진 찍기엔 오히려 최상의 시간이다. 초보자도 이 순간만큼은 방금 물에 빨아 헹군 것처럼 말끔하고 환한 세상을 사각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 나무는 빗물에 젖어 잎맥과 줄기의 모양 하나하나까지 또렷하게 보여준다. 빗물을 머금은 꽃잎 역시 더욱 유혹적으로 변한다. 거리는 물에 젖어 반들반들한 채로 도시의 불빛을 온몸으로 반영한다. '질감의 시간'도 이때 시작된다.
↑ [조선일보]렌즈(35㎜)ㆍ셔터스피드(1/100〉sec)ㆍ조리개(f/4.0)ㆍ감도(ISO 400).
3년 전 중국 베이징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촬영 일정 내내 비가 내렸다. '워터큐브'라고 불리는 푸른 불빛의 수영경기장 건물을 촬영해야 하는데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동행했던 취재기자가 사진이 잘 안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비가 그치자마자 달려가서 찍은 건물 사진은 우려와 달리 훌륭했다. 비에 젖은 워터큐브는 어둠 속에서 더욱 생생한 푸른 빛으로 빛났고, 반들반들해진 땅바닥 위로 건물이 내뿜는 빛이 어룽거려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다. 비가 오히려 사진을 도와준 셈이었다.
이 울릉도 바다 사진 역시 마찬가지다.〈사진〉비가 줄곧 내리던 때 하필 울릉도로 출장을 가게 됐다. 할 수 없이 관선 자연굴 옆 바다 앞에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계속 그 주위를 서성대다 장대비가 이슬비로 변할 무렵부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하늘빛은 흐리기 마련이다. 그 하늘을 반영한 바닷물의 빛깔은 몹시 은은하고 아름다웠다. 주변의 돌들은 빗물에 젖어 검고 생생하게, 반대로 바닷물 중간중간 솟아 있는 바위는 더욱 하얗게 빛났다. 빗방울이 군데군데 파문을 그렸다. 비가 그칠 무렵의 날씨 덕에 동양화처럼 몽환적인 바다 사진이 나온 것이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울릉도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같은 바다를 찍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가장 맘에 드는 건 역시나 비가 그치기 직전 찍은 이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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